폐문의 달에 오크마 시를 누비다 보면, 종이를 태우는 달짝지근하면서도 매캐한 연기가 이 골목 저 골목에서 피어오르는 걸 목격할 수 있다. 한가로운 여행객이 뒷짐을 지고, 거기 존경하는 오크마 시민 여러분, 뭘 그렇게 태우고 계시는 겁니까, 하고 질문을 던지면 그들은 입을 모아 이렇게 대답할 것이다.
“죽은 연인과 나눈 편지인데, 이제 보내주려고요.”
“어머니가 남기신 재산 목록입니다. 탈란톤의 저울 위에 올려도 만족스러워하실 만큼 공정하게 분배했으니, 이제 이걸 또 들여다볼 필요도 없겠지요.”
“아들이 전사했다는 소식이랍디다. 아직 이 두 눈으로 그 몸에 영광스러운 상처가 얼마나 많이 남았는지 확인하지도 않았는데, 이런 종이 조각이 무슨 의미가 있다고.”
이렇듯 야누스의 달은 골목 여행객들에게는 코가 간질간질한 달이고, 시장 둘러보기를 좋아하는 사람들에게는 누가 버린 좋은 물건이 싼값에 흘러들어오는 시기이기도 했다. 그리고 나무 정원의 조교들에게는 안타깝게도―묵히고 묵힌 시험 답안지들과 쌓여있는 졸업생들의 과제물을 정리하느라 눈과 어깨가 혹사당하는 달이었다.
“세르세스의 나뭇가지시여, 한 번만 더 일어났다간 허리가 끊어질 것 같아.”
문비시 초각부터 소각장을 왔다 갔다 했다고 하는, 덥수룩한 머리를 한 선배가 의자 위로 무너져 앉았다. 히아킨은 걱정스러운 눈길로, 그러나 단호하게 눈을 빛내며 말했다.
“피곤하시겠지만 이럴 때 평소처럼 구부정한 자세로 앉아 계시면 통증이 더 심해진답니다. 그리고 종이를 나를 땐 무릎을 굽히고 허리를 곧게 펴시고요. 몸을 일으킬 때 숨을 내쉬는 것도 도움이 될 거예요.”
“하, 하하. 조언 고마워. 히아킨네는 일이 별로 없나 봐?”
하기야 너희 학파에 고생할 만큼 학생 수가 있어야 말이지. 그런 뒷말이 숨어 있는 발언이었다. 일일이 응수할 가치도 없는 얄팍한 발상이었지만, 그래도 사실을 바로잡을 필요는 있었다.
“아낙사 선생님은 학생들 과제물이나 시험지를 전부 모아두시거든요.”
“하나도 안 버리고? 전부 다?”
“네, 그러니까 폐문의 달이 왔다고 해서 괜히 분주하게 굴지 말라고 하셨어요.”
그 말에 타 학파 조교는 허리를 두드리던 손을 멈추고 마음속으로 진심 어린 감탄을 보냈다. 역시 누스페르마타의 미친 민트색 재앙, 불경의 끝을 달리는구나. 티탄과 그 신앙에 관련된 거라면 어떤 사소한 거라도 무시하고 경멸하는 저 집념. 연구실이 시험지와 과제물 산이 되는 불편함도 감수하겠다는 저 비뚤어진 신념. 조교는 민트색 재앙이 있을 방향을 향해 덥수룩한 머리를 꾸벅 숙이는 걸로 그 (잘못된) 집념과 신념에 경의를 표했다.
그리고 여기, 아낙사 선생님의 방침이 어떤지도 모르고 그의 연구실 근처를 서성거리는 불행한 학생, 엘리사이 에데스의 파이논이 있다.
평소보다 움직이기 편한 가벼운 옷차림인 건, 지금쯤 일손 부족에 시달리고 있을 선생님 그리고 조교 히아킨을 돕기 위해서였다. 하지만 근처에서 기다린 지 일각째, 아낙사는 등장할 기미가 보이지 않았다. 파이논은 슬슬 우연을 가장해 맞닥뜨린다는 계획을 포기하고, 연구실 문을 두드려야 하나 생각하는 중이었다.
그때 문이 열렸다. 속마음을 읽힌 듯한 이 완벽한 타이밍에 파이논은 조금 당황하고 말았다. 생각해 두었던 인사말은, 아낙사의 조금 피곤해 보이는 드러난 한쪽 눈과 시선이 마주치는 순간 깨끗하게 잊어버렸다.
“거기서 뭐 해? 엘리사이 에데스의 파이논.”
“선생님을 기다렸어요.”
즉답한 파이논의 뺨이 조금 붉어졌다. 기세에 눌려 저도 모르게 순순히 인정하고 말았다. 그러거나 말거나 아낙사는 잠시 생각에 잠기더니, 침착하게 묻는다.
“오늘 면담하기로 했던가?”
“아뇨, 그런 건 아닌데, 혹시 일손이 부족하실까 해서요.”
“아, 그러니까 너도 그 통로의 티탄을 따르는 무리의 관습을 아무 생각 없이 답습하겠다는 거군. 됐어, 네 학기 말 과제물이라면 오른쪽 두 번째 문서장에 오랫동안 보관될 거니까.”
“네?”
“참고로 네가 낸 최초의 쪽지 시험 답안지도 같은 칸에 있어. 이름 빼고 백지로 낸 그 답안지 말이야.”
“그걸 왜, 아니지, 계속 갖고 계실 생각이세요?”
선생의 입꼬리가 삐죽 올라갔다. 물론 답은 ‘그렇다’였다. 파이논이 멋쩍게 웃었다. 그 답안지라면 파이논 자신도 정확하게 기억하고 있었다. 살면서 처음 마주하는 철학적인 질문에, 생각이 얽히고 얽히다 아무 말도 적지 못하고 빈 종이를 내고 말았다. 답안을 걷어 간 아낙사고라스는 새하얀 답안지에 잠시 말문이 막히는 듯했지만, 결국 왜 백지를 제출했는지 파이논에게 묻지는 않았다. 감사하게도.
“정말… 부끄럽네요. 잊어주셨으면 했는데, 선생님이라면 절대 안 잊어버리시겠죠?”
“흥. 당연하지. 이만 가 봐, 파이논. 보다시피 일손이 부족하지 않으니까.”
“그러시다면 어쩔 수 없죠. 언제든 불러 주세요, 혹시 마음이 바뀌어서 제가 필요해지시면요.”
“그럴 일 없어.”
열렸을 때처럼 단호하게 연구실 문이 닫힌다. 그 사이로 쓱 사라진 아낙사의 마지막 얼굴이 살짝 웃는 듯 보였지만, 파이논의 착각일 것이다. 그나저나 선생님은 뭘 하러 나오셨던 거지? 소소한 의문을 품은 채, 파이논은 터덜터덜 왔던 길을 되돌아갔다.
닫힌 문 안에서 아낙사는 점점 멀어지는 파이논의 발소리를 듣고 있었다. 일각이 넘도록 들리던 저 특징적인 발소리를 무시하려야 무시할 수가 없어서 나가 봤던 것인데, 정말로 그 제자가 자신을 기다리고 있었을 줄은 몰랐다.
책상에 앉았을 때를 기준으로 오른쪽 두 번째 문서장, 위에서 세 번째 서랍. 의자에 앉았을 때 손을 뻗기 마침 좋은 위치에 제자들의 답안지며 과제물이 모여 있었다. 히아킨의 관점은 늘 특이한 데가 있지만 그렇기에 가치가 있다. 카스토리스의 글씨는 깔끔하고 논조는 놀랍게도 강인하다. 그리고 파이논. 파이논은…….
그의 빈 답안지를 아낙사는 눈을 감으면 또렷이 떠올릴 수 있다. 조금 구겨진 종이 모퉁이, 빈말로도 단정하다고는 할 수 없는 필체로 적힌 파이논이라는 이름을. 변화는 실재하는가? 나무로 자란 씨앗은 변화한 것인가? 이 질문을 눈앞에 두고 그는 금방이라도 울어 버릴 아이 같은 얼굴을 하고 있었다.
그리고 시간은 흘러, 비뚤비뚤하던 글씨는 그을 선과 찍을 점을 제법 유려하게 표현할 줄 알게 되었다. 이렇게 성장하는 너를 어떻게 어여쁘게 여기지 않을 수 있을까.
아낙사고라스의 연구실에서 폐문의 달에 제자들의 답안지며 과제물이 버려지는 날은 오지 않을 것이다, 영원히.
영원이라는 말에 담긴 철학적 모순을 알면서도, 그는 그렇게 재차 다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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