Observations of My Pupils: on their Character and Progress
깨달음의 나무 정원 누스페르마타 현인의 숨겨진 연구실에 소장되어 있던 수기집의 일부. 군데군데 파손이 심해 전체 내용을 파악하기 어렵다. 책등의 청구기호는 나무 정원 통용 방식이 아닌, 저자가 개인적으로 고안해 낸 것이다. 표에 따르면 저자는 이 수기를 사회과학 - 교육 - 교육자 - 일기 및 자서전으로 분류한 듯하다.
서문
새로운 제자를 둘 맞이했다. 학문적 여정에서 제자란 토양에 뿌려진 이름 모를 씨앗과 같아서, 두꺼운 종피 아래 감춰진 형질은 숙련된 농부라고 해도 섣불리 단정할 수 없는 법이다. 그들은 미숙하여 곧게 서게 되기까지 수없이 구부러지고 휘청거리겠지만, 바로 그 흔들림 속에서 가장 순수한 탐구의 싹이 피어난다는 것을 나는 경험적으로 알고 있다. 이윽고 어떤 꽃과 나무로 자라날지는 아무도 알지 못하며 정해져 있지도 않다.
나는 이 기록을 단순한 일지가 아니라 관찰과 성찰의 양면으로 삼고자 한다. 제자의 성장과 배움을 통해, 나 자신에게도 거울이 되도록 남겨둘 것이다.
#1
정치적 망명이라는 다소 불편한 현 상황으로 인해 일부 연금술 입문 교재 조달이 늦어지고 있다. 헬코리토 학파는 좀 더 발이 빠른 전령을 길러낼 수 없다면 다음 번 정기 보고가 다가오기 전까지 학파의 존속을 고려해 보는 게 좋을 것이다.
하는 수 없이 내 오래된 원고의 필사본 몇 부로 교재를 대신해야 했는데, 수업 중 파이논이 이에 대해 하고 싶은 말이 있는 듯했다. 손을 들고 질문하라고 하자 파이논은 이렇게 말했다:
“이 원고의 저자가 누구인지 알고 싶어서요. 피시아스… 제 고향 엘리사이 에데스의 선생님께서 갖고 계시던 사본 속 필체랑 꼭 닮았거든요. 같은 저자인 게 분명해요!”
…엠포리어스 전역의 보다 많은 사람들에게 내 이론을 전파할 목적으로 젊은 시절 값싼 필사본을 수없이 많이 생산해 낸 건 사실이지만, 교본의 저자명조차 확인하지 않는 제자를 받는 날이 올 거라고는 상상하지 못했다. 옆자리에서 필사적으로 저자명을 가리킨 카스토리스는 1점 추가, 파이논은 1점 감점한다.
- 앞으로 파이논에게 가르칠 것: 인용 시 저자명 표기하기, 수업 때 손을 드는 올바른 방법, 내 이름
#5
수업이 시작되었는데 카스토리스 한 사람만 자리를 지키고 있었다. 듣자 하니 그 백발 학생에게 「자체 휴강」의 개념을 설파해 준 사람이 있었다는 모양이다. 그것이 학창 시절 반드시 해 봐야 할 7가지 경험 중 하나라는 말에, 파이논은 적토에 이끌리는 배고픈 드로마스처럼 저항 없이 설득되었다고 한다. 나머지 여섯 가지가 무엇인지는 카스토리스가 끝까지 얼버무리고 대답하려고 하지 않았다. 대신 그 말을 한 인물의 인상착의에 대해 알게 되었는데, 이는 다음과 같다. (중략) 나 아낙사고라스의 기억에서 잊히지 않는다는 것이 무엇을 의미하는지 그자는 똑똑히 알게 될 것이다.
- 추가 기술: 종막시가 다 되어서 파이논을 찾았다. 2층 발코니에서 발견. 몰래 숨어 「자체 휴강」한 수업을 훔쳐 듣다가 그대로 잠든 게 분명하다. 1점 감점…… 1점 추가.
#21
정치적 망명 생활을 접고 나무 정원으로 복귀한 첫 주이다. 카스토리스에게 언젠가 약속한 대로, 수업이 없는 날 로토파고이 학파의 <옛 시 식물 구역>을 함께 방문해 분금화를 관찰하는 시간을 가졌다. 선인(先人)들의 문학적 비유 속에서 분금화는 언제나 티탄 타나토스와 깊은 연관성을 보인다. 분홍과 금빛이 섞인 화려한 꽃잎의 초청과, 누구도 다가올 수 없게 하는 가시 줄기의 채찍질이라는 양면성 속에서, 이 얌전한 제자가 최초의 참된 명상을 맞이하고 있다는 걸 알 수 있었다.
- 기록할 만한 현상: 관찰을 시작했을 때만 해도 굳게 닫혀 있었던 분금화 봉오리 하나가 우리가 식물 구역을 떠날 무렵 며칠의 시간이 흐른 것처럼 만개해 있었다. 추가 관찰 필요.
#24
한 가지 인정하자───파이논에게는 가설을 검증하고 경험적 근거를 수집하려는 강한 의지가 있다.
이번에 그의 흥미를 사로잡은 건 나무 정원 학생들 사이에서 도는 거울 전설이었다. 종막시 2각에 교사용 휴게실의 대형 거울을 들여다보면 미래의 배우자가 보인다는 그 고전적인 소문 말이다. 나 또한 나무 정원의 학생이었던 시절에 같은 전설을 접한 적 있으며 그때 나는… (이어지는 문장 위로 굵은 가로줄이 두 줄 그어져 있다.)
행동하기로 결심한 날, 파이논은 교사용 휴게실로 살금살금 잠입해 거울 앞에 섰다. 그는 진지하게 양손을 깍지 끼고 마치 하늘 위 천체의 움직임을 관찰하듯 숨을 고르며 기다리고 있었다. 나는 종막시 2각이 되는 걸 기다렸다가 어둠 속에서 모습을 드러냈다.
“거기서 뭐 하는 거지, 파이논?”
거울에는 물론 파이논의 미래 배우자의 얼굴 따위 나타나지 않았다. 당황한 그의 등 뒤에서 다가온 나 자신이 똑똑히 비쳤을 뿐이다. 이를 계기로 이 제자가 적어도 다음의 두 가지를 배웠기를 바란다: 첫째, 실험이란 언제나 환경 요소를 최대한 통제한 뒤 진행해야 한다는 것. 아무리 정밀한 관찰이라도 불청객이 끼어들면 결과는 왜곡될 수밖에 없다. 둘째, 모든 소문을 곧이곧대로 믿지 않을 것. 뜬소문에 이렇게 휘둘릴 필요는 없다. 하물며 그것이 미래를 ‘결정’해주는 종류라면, 파이논은 더더욱 그런 것에 연연해하지 않는 법을 배워야 한다.
#30
2주간 드로마스 돌봄 협회의 자원봉사에 참여했다. 최근 들어 그 빈도수가 주목할 만큼 늘어나고 있는 검은 물결의 침략은, 한 도시와 그 터전을 휩쓸 때 인간과 드로마스를 구분하지 않는다. 우선순위를 정하는 건 참사의 현장을 수습하는 이들이다. 구출된 드로마스들은 대부분 영양 상태가 나빴으며 심지어는 그 미세한 얼굴 근육을 최대한 사용해 봉사자들에게 자신들의 상태를 전하려고 애쓰는 기특한 모습을 보였다. 2주간 배우고 고찰한 것에 대해서는 별도의 기록물로 남기도록 한다.
돌아와서 확인해 보니 연구실 (대외비가 아닌 쪽 연구실) 출입자를 기록하는 자율기동 석판에 거의 매일같이 파이논이 찾아왔다는 로그가 남아 있었다. 분명 조교를 통해 사전에 공지를 전달 받았을 텐데, 급히 내 조언을 구할 일이라도 있었냐고 묻자 파이논은 내가 “연구실에 감금당해” 있는 줄 알았다고 했다.
터무니없다. 만약 정말 그랬다면, 구출이라도 할 계획이었던 건가?
#47 한시적 생명을 불어 넣은 나무 새를 전령으로 쓰기 시작했다. 한동안은 과제물 첨삭본을 끝끝내 찾아가지 않는 제자들의 창문을 두드릴 용도로 사용될 것이다.
#48 문비시에 날려 보낸 전령 새가 종막시까지 돌아오지 않는다. 나뭇가지에 걸리지 않도록 경로를 잘 입력했는데, 혹시 모르니 카프라 학파에 연락을 취해보기로 한다.
#49 머리에 나무 새가 둥지를 튼 파이논이 연구실을 찾아왔다… 원인 분석 필요
#51 몇 가지 실험을 통해 전령 새가 특정 인물에게 호감을 표하는 이유를 밝혀냈다. 연금 동력원의 하나로 채혈해 둔 내 황금 피를 사용한 것이 원인이었던 것으로 보인다. 단, 그것이 원인이라고 파악됐을 뿐, 왜 그렇게 작용하는지, 즉 원리에 관한 탐구로까지는 나아가지 못했다. 전령 새 1호는 잠정적으로 폐기 처분한다.
- 추가 기록: 파이논이 스승인 내 결정에 큰 의구심을 품고 반론하기에, 즉석에서 “전령으로 역할을 다하지 못하는 나무 새를 살려 두어야 하는가?”를 논제로 토론을 벌였다… 토론 결과 나무 새는 그 한시적 생명이 다할 때까지 희고 복슬복슬하며 나무만큼 높은 둥지에서 지내게 되었다. 나무 새를 돌려놓는 과정에서 파이논의 백발을 쓰다듬을 기회가 있었는데, 몹시도 편안한 둥지라는 점은 나 또한 인정한다.
#60
특기할 만한 일정 혹은 사건이 없었다. 다만 수업 전 카스토리스와 파이논 사이에 오간 대화가 제법 흥미로워 기록해 둔다.
파이: 난 정말 운이 없는 것 같아. 이걸 봐, 카스토리스 씨. 오늘 <명석시 점괘>에서 또 최하위권이잖아.
카스: 운이란 건 좋았다가 나빴다가 하는 법이라고 해요. 그러니까 좋아지는 날도 분명 있을 거예요.
파이: 이럴 때 아낙사 선생님이라면 어떻게 하실까…….
카스: 음, 일단 선생님이라면 운세를 확인하시진 않을 거예요. 그리고 우연히 접하게 되더라도 점괘가 말하는 바를 있는 그대로 받아들이지는 않으시겠죠.
파이: 예를 들어, ‘큰 손실에 유의’인 날엔 “이 운세를 확인하는 데 쓴 시간이야말로 손실이다” 처럼?
카스: 네. 나아가서 “운이란 무엇인가”, “운이란 존재하는가”, “운이 존재한다고 가정하면 운세는 운을 예측할 수 있는가” 같은 질문을 던지실지도 몰라요.
파이: “운세를 보는 순간 운이 결정되는가”도 있을 수 있겠지. 어쨌거나 나는 오늘 내 운세가 맞는 거 같아. 오늘이 내 행운의 날이었다면, 선생님께서 조용히 우리 대화를 귀담아들으시는 일도 없었겠지.
(몸을 돌리며, 나에게) 아낙사 선생님, 거기 그렇게 계시지 마시고 같이 말씀 나누시죠! 저희가 하는 말을 전부 들으셨잖아요?
카스: …파이논 님, 혹시 오늘 제 운세도 봐 주실 수 있나요?
두 사람에게는 ‘운’의 개념을 둘러싸고 각자 생각하는 바를 기술하도록 특별 자유 과제를 부여했다. 좋은 사고 연습이 되어 줄 것이다.
#68
오늘 파이논이 두 손을 조심스레 포갠 모습으로 연구실에 나타났다. 그 커다란 손이 감싸고 있는 건 작동을 멈춘 나무 전령 새였다. 그는 내게 이것을 돌려주러 왔다고 말하며, 가능하다면 함께 묻어주지 않겠냐고 제안했다.
나에게 질문해 본다. 생명이란 무엇인가?
호흡하고, 움직이고, 먹고, 죽는 것으로 정의할 수 있는가? 서로를 인식하며 다른 존재에게 의미를 남기는 순간 그것은 ‘살아 있었다’고 부를 수 있는가?
건네받은 나무 새는 파이논의 체온으로 따뜻해져 있었다. 나는 그것을 생명의 흔적으로 기록한다. 관찰자인 파이논의 시선 속에서 그것은 충분히 생을 누렸고, 짧은 생은 이윽고 찾아온 죽음으로 완성되었다.
우리는 그것을 아무도 찾지 않는 나무 정원 외곽에 묻었다. 파이논이 어디서 구해 온 들풀로 작은 무덤을 덮었고, 처음 듣는 기도문───아마도 그의 고향에서 배웠을 안녕의 말들을 외웠다. 그가 멋쩍게 웃으며 “교수님은 이런 걸 믿지 않으시죠” 라고 했지만, 나는 인간 마음에 작용하는 행위로서의 기도와 그 효과를 부정하지 않는다. 그렇게 말하자 파이논은 조용히 고개를 끄덕이며 내 말을 곱씹어 보는 듯했다.
[. . .]
#501
파이논에게 빌려준 책을 드디어 돌려받았다. 빌린 책을 전권 반납하지 않으면 졸업장이 나오지 않는다는 엄포를 듣고 허겁지겁 돌려준 게 분명했다. 책에 종잇조각 하나가 튀어나와 있어 확인해 보니, 「학창 시절 반드시 해 봐야 할 7가지 경험」이었다. 목록 첫머리에 “자체 휴강”이 버젓이 상위권으로 올라와 있었다… 파이논이 이미 한참 전 실행에 옮긴 항목이다. 전체 목차는 다음과 같다:
- 자체 휴강
- 나무 정원의 일곱 불가사의 중 하나를 파헤치기
- 교수님께 추가 과제를 자청해 보기 (후회는 본인 몫)
- 통금 시간을 넘겨 나무 위에서 하늘을 관찰하기
- 금서 구역 탐방하기
- 현인의 숨겨진 연구실 입구를 발견하기
- 마음 가는 사람이 있다면 졸업 전 고백하기
누스페르마타 학파 설립 이래 졸업까지 독보적으로 오랜 수학 기간을 자랑한 파이논이었으니, 그의 학창 시절은 다채로웠으리라 믿는다. 일곱 빛깔은 못 되었지만, 여섯 빛깔이라면 제법 훌륭한 결과라 할 수 있겠다.
책을 돌려받을 때 건네주려고 했지만, 결국 졸업 축하 카드는 내 비밀 서가에 남게 되었다. 언젠가 기회가 된다면─── (문장이 급하게 끊겨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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