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문 바로가기

hsr/au

[파이낙사] (현대AU) 파이논의 억울한(?) 날

Is It My (Un)Lucky Day?

 

  돌이켜보니 새삼 억울하다.

  오늘만큼은 파이논도 운명을 향해 억울하다고 외치고 싶었다. 다른 날이면 모를까, 오늘 아낙사 선생님의 연구실 문턱을 넘는 파이논의 가슴속에서 불탄 것은, 순수하고 진지한 학구열의 불씨였다.

  시작은 좋았다고 할 수 있겠다. 질문하러 온 학생다운 거리를 유지했고, 선생님을 친근하게 부르지도 않았다. 딱 한 번, 아낙사의 기대하는 눈빛과 마주쳤을 때 그 볼에 가볍게 쪽, 하고 뽀뽀했을 뿐이었다. 그런데 일이 어쩌다 이렇게 되어 버린 걸까. 하필 그 펜은 그때 왜 거기에 있었고, 파이논은 그걸 왜 팔꿈치로 건드렸으며, 떨어진 펜은 또 어째서 책상 아래로 운명처럼 굴러 들어갔단 말인가?

  파이논이 얼른 펜을 찾으러 책상 밑으로 기어들어간 건 어찌 보면 당연한 수순이었다. 며칠 전의 꽤나 격렬했던… 탐구 세션 이후로, 아낙사는 여전히 허리에 손을 짚고 다니고 있었다. 펜을 떨군 사람도 파이논, 아낙사의 허리를 못 쓰게 만든 사람도 파이논이라면 책임은 그가 지는 게 옳았다. 불편하지 않도록 아낙사가 눈치껏 의자를 뒤로 빼려던 순간이었다.

  경쾌한 노크 소리가 연구실에 울려퍼졌다.

  아낙사는 얼어 붙은 파이논을 황급히 책상 밑으로 완전히 밀어 넣었다. 아니, 구겨 넣었다는 게 더 적절한 표현이겠다. 잠시 아낙사는 마음을 가다듬고 자기 자신에게 주문을 걸었다. 지금 책상 밑에는 아무도 없다. 이 숨결은 파이논이 아니라… 그래, 강아지라고 하자. 성장기에 밥을 조금 많이 줘 버린 반려견이라는 설정이 좋겠다.

  “들어와.”

 

Case 1. 히아킨티아

 

  “계셨네요, 아낙사 선생님!”

  “히아킨티아.”

  상큼하게 등장한 사람은 히아킨. 석사 3학기생으로, 아낙사의 지도 학생이자 수업 조교이면서, 또 지도 교수의 안색이 유달리 파리한 날이면 교수를 냅다 밖으로 쫓아내는 랩실 내 실질적인 권력자이기도 했다. (그럴 때마다 어느 모퉁이에서 파이논이 약속이라도 한 듯 불쑥 나타나는 게 지금까지의 패턴이었다. 두 제자가 등 뒤에서 몰래 연락을 주고받는 건 아닐까, 아낙사의 의심만 나날이 깊어지는 중이었다.)

  “답안지 정리 끝났다고 알려 드리려고요. 공용 드라이브에 변환 점수도 넣어 놨는데, 지금 바로 확인하실래요?”

  “아니, 나중에 하지. 다들 수고했어.”

  “별말씀을요. 근데 교수님…” 히아킨의 입꼬리가 심상치 않은 기운으로 스멀스멀 올라갔다. “누구한테 남기신 코멘트가 유달리 달달하던데요? ‘3-A 문단의 분석은 참으로 내 우수한 학생이라고 할 만하다.’ 선생님이 이렇게까지 학생을 칭찬하시는 게 얼마 만이에요? 저희 조교들만 이걸 볼 수 있다니 너무 아쉽다구요. 파이논이 들으면 엄청 좋아할 텐데.”

  아.

  책상 밑에서 파이논이 숨을 삼키는 소리에, 아낙사가 발끝으로 그를 가볍게 찼다. 아낙사에게 있어 지금 상황이 썩 마음에 들지 않는 정도라면, 파이논은 현재 천상과 저승을 오가는 경험을 하는 중이었다. 우선 책상 밑은 원래도 넓은 공간이 아니었다. 솔직히 너무 좁아서 숨이 막힐 지경이었다. 그런데다 살짝만 고개를 돌리면 아낙사의 허벅지가 (다리는 왜 꼬고 앉으신 건가요, 선생님?) 문자 그대로 파이논의 코끝과 닿을 거리에 있었다. 엎친 데 덮친 격으로 파이논은 방금 히아킨을 통해 아낙사가 그를 ‘우수한 학생’이라고 평했다고 하는 폭로를 들은 참이었다.

  …과연 오늘은 파이논 인생 최고의 날일까, 아니면 최악의 날일까?

  “그만하면 됐어, 히아킨티아.”

  “알겠어요. 그럼 저흰 입 꾹 닫고 있을게요.”

  분홍 머리 조교가 입에 자물쇠를 거는 시늉을 한다. 다행스럽게도 히아킨은 더 지체하지 않고 연구실을 떠났다. 방 안의 두 사람은 몰랐겠지만, 닫힌 문 밖에서 히아킨은 한참을 갸웃거리며 이렇게 혼잣말했다.

  “아낙사 선생님 어디 몸이 안 좋으신가? 오늘따라 엄청 뻣뻣하시네.”



  히아킨이 떠나고, 책상 아래에서 “선생님” 하는 서글픈 목소리가 들려왔다. 서둘러 아낙사가 의자 바퀴를 뒤로 밀자, 안에서 파이논이 먼지 묻은 흰 강아지 같은 모습으로 얼굴을 쏙 내밀었다.

  “너무 답답했어요.”

  “…….”

  “목도 좀 아픈 것 같고, 콜록, 콜록.”

  “하.”

  “선생님의 우수한 학생이 먼지를 너무 많이 들이마셨나 봐요.”

  “알았어, 이리 와.”

  먼지 투성이 파이논이 아낙사의 품에 쪼르르 안긴다. 노림수라는 걸 뻔히 알면서도 저 파란 눈망울 앞에선 아낙사도 어찌 할 방법이 없었다. 등을 토닥이며 받아 줄 수밖에. 맞닿은 심장 박동이 서로를 쫓아 콩콩 울렸다.

  그렇게 몇 분이 지났을까. 또 한 번의 노크 소리가 고요한 평화를 깨뜨렸다.

  “아낙사고라스, 안에 있나?”

  두 번째 손님의 정체를 깨닫고 아낙사는 눈을 질끈 감았다.

  닥터 베리타스 레이시오. 그는 파이논의 헝클어진 백발과 청바지 무릎에 묻은 먼지만 보고도 이 방안에서 대략 무슨 일이 있었는지 추론해 낼 수 있는 남자였다. 하지만 추론만으로는 알 수 없는 자초지종 또한 있는 법이다. 파이논이 책상 밑에서 나온 이유가 펜이 그 안으로 굴러 떨어져서였다고 설명하면, 닥터 레이시오는 과연 어떤 표정을 지을까.

  리포트를 개가 뜯어먹었다고 변명하는 학생들을 볼 때와 비슷해지지 않을까?

  파이논의 잘생긴 얼굴 위로 슬픔의 기색이 스쳐 지나갔다. 그 또한 머지않아 닥칠 운명을 이해하고 있는 것이다. 다시금 탁자 밑 동굴의 거주자가 되기 위해 알아서 의자 아래로 내려가면서, 파이논이 마지막 한 마디를 속삭였다.

  “이번에는 다리를 꼬지 않아 주셨으면 해요.”

  “알겠어.”

  “감사합니다. 정말 큰 도움이 될 거예요.”

  어떤 면에서? 아낙사는 그렇게 묻고 싶지만, 또 동시에 묻고 싶지 않기도 했다.

 

Case 2. 닥터 레이시오

 

  들어오라는 말이 떨어지자마자 연구실 문이 성미 급하게 열렸다. 시간 낭비를 죄악처럼 여기는 남자인 만큼, 저 동료 교수의 입에서 ‘주말 잘 보냈나’ 라던가, ‘요즘 부쩍 추워졌군’ 같은 겉치레가 나올 일은 없었다.

  “너희 학과가 가진 웨어러블 MEG 스캐너 구동 허가가 필요해.”

  그의 말투에서는 1분 1초도 허비하지 않겠다는 의지가 느껴졌다. 다른 날, 다른 시간이었다면 아낙사도 물론 흔쾌히 협조했을 것이다. 하지만 스캐너실을 오픈하려면 카드키와 생체 인증 두 단계를 거쳐야 했다. 즉, 레이시오 교수의 부탁을 들어주려면 파이논을 이대로 책상 밑에 버려 두고 가야 한다는 뜻이었다. 저도 모르게 아낙사의 눈길이 의자 밑으로 흘끔 움직였다.

  “아낙사고라스? 책상 밑에 뭐라도……”

  닥터 레이시오의 말이 중간에 끊겼다. 깨달음이 서서히 그 얼굴에 번지고 있었다.

  “너희들……”

  “아니, 아니야.”

  “…MEG 스캐너 건은 잊어버려. 차라리 네 학과장에게 가서 묻지. 적어도 그 사람은 책상 밑에 다 자란 사람 한 명을 숨기고 있진 않을 테니까.”

  “그러니까 네가 상상하는 그런 게 아니라고──”

  안타까운 변명 시도는 문이 쾅 닫히는 소리에 묻혀버렸다. 아낙사가 온몸의 산소를 다 뽑아내는 긴 한숨을 쉬었다. 레이시오 교수와는 나중에 따로 진지한 대화를 나눌 필요가 있겠다. 아마 앞으로 약 한 달간은 아낙사 앞에서 그 석고상 가면을 벗으려고 하지 않겠지만 말이다. 이미 지난 일은 어쩔 수 없으니, 지금은 서랍과 PC본체 사이에 어깨가 끼어 있는 파이논을 구출하는 데 집중하자.

  “아무래도 책상을 더 큰 걸로 바꿔야겠어.”

  아낙사가 중얼거리는 소리에, 파이논이 애처롭게 고개를 끄덕였다. 정말 좋은 생각이에요, 선생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