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문 바로가기

hsr/au

[파이낙사] (현대AU) 알바 구합니다

Phainon The Serial Part-Timer

 

  그날 밤 제법 쌀쌀한 바람이 불기 시작하는 거리에서 파이논은 우연히도 레이시오 교수와 정면으로 마주쳤다. 정확히 말하자면, 거리에 있던 건 파이논이었고 레이시오 교수는 그가 무심코 들여다본 레스토랑 창문 안 풍경의 일부였다. 시선이 딱 마주친 순간 레이시오 교수는 놀람과 경악의 중간 정도 되는 표정을 지었는데, 그걸 보고도 다가가서 창문을 두드릴 만큼 파이논이 눈치가 없지는 않았다. 살짝 고개를 끄덕하고는 파이논은 빠르게 등을 돌렸다. 좋은 저녁 보내세요 무서운 교수님, 그리고 맞은편에 계신 화려한 옷을 입은 신사분.

 

  아마도 이 일이 계기였을 것이다. 파이논의 머릿속에 어떤 구체적인 상상이 자꾸만 뭉게뭉게 피어난 건. 상상 속에서 파이논과 그의 사랑스러운 아낙사 선생님은 2인용 테이블에 마주 보고 앉아서 함께 메뉴판을 살펴보았다. 파이논이 외국어로 된 기다란 메뉴를 가리키면, 옆에서 아낙사가 웨이터를 향해 “나도 같은 걸로” 라고 말하며 파이논만 볼 수 있을 만큼 작게 미소 짓는다. 그리고 와인잔이 부딪히는 소리—아낙사 선생님은 어떤 종류를 좋아할까, 레드, 화이트, 아니면 다른 무언가? 로제의 핑크빛도 눈동자에 어울릴 것 같고, 톡 쏘는 스파클링이 의외로 아낙사 선생님의 취향일 수도 있었다. 달콤한 계열이라면, 마냥 달기만 한 것보단 주정강화 와인의 은은한 오크 향 섞인 풍성한 달달함이 선생님과 잘 어울릴 것 같다. 여기까지 생각하다가 파이논은 퍼뜩 깨달았다.

  나 지금 아낙사 선생님을 그런 근사한 곳에 ‘데려가고’ 싶은 거구나.

 

  깨달음을 얻자마자 파이논이 맛집 어플을 총동원해 레스토랑의 긴 예약 대기 목록에 무작정 이름부터 올린——건 아니고, 모든 일에는 순서가 있는 법. 먼저 셰프의 초이스 - 오늘의 메뉴가 얼마인지 알려주지 않는 메뉴판에도 당황하지 않을 정도의 잔고가 필요했다. 학생 신분으로 갑자기 떼돈을 버는 요행을 바랄 수는 없고, 착실히 아르바이트를 해 나가며 목표 금액을 달성할 때까지 검소한 삶을 사는 게 지금 파이논이 할 수 있는 유일한 방책이었다.

  생활비(중에서도 주로 식비)를 계산해 보고 파이논은 조금 절망했다. 아아, 한동안은 꼬르륵 소리가 일상인 생활을 하게 되겠구나. 지금 눈앞에 놓인 그릴치즈샌드위치(2인분)과 베이컨 토핑 샐러드, 치킨텐더너겟 세트가 눈물겨운 마지막 만찬으로 느껴진다. 한 입 한 입 경건히 음미하는 파이논의 모습을, 그날 학생식당에 모인 모두가 숨을 죽이고 지켜보았다. 인지과학과 파이논의 공개 먹방 시리즈에 또 하나의 에피소드가 추가된 순간이었다.



1. 카페

  대학 근처 카페의 특징이라고 한다면 1. 저렴하다, 2. 회전율이 높다, 3. 늘 구인 중이라는 점이다. 면접 중 카페 아르바이트 경험이 있냐는 질문에 파이논이 “신입의 마음가짐으로 하나부터 차근차근 배우겠습니다!” 라고 대답했음에도 바로 합격 통보를 받은 건 그런 이유일 테다. 그리고 얼굴.

  제 자랑은 아니지만 파이논은 스스로가 제법 이 일에 빨리 익숙해졌다고 생각했다. 첫날에는 찬 음료 주문이 들어오면 얼음을 얼마나 퍼야 할지 몰라서 시간을 허비했는데, 지금은 얼음통을 열면서 딱 세 스쿱이면 정확히 양이 맞았다. 물론 아직도 핫 아메리카노 주문에 아이스를 내놓고는 “얼른 다시 만들어드릴게요!” 하는 일이 종종 있지만, 특별히 거세게 항의하는 손님은 없었다. 파이논이 자신의 빠른 손과 윙크 덕을 봤다고 생각하자.

  슬슬 시프트를 조금 늘려 줬으면 좋겠다고 점장으로부터 제안받은 무렵이었다. 대타로 마감 시간에 카운터를 보고 있는데, 유리문을 열고 너무나 낯이 익은 민트색 머리통이 카페인이 몹시도 필요한 얼굴을 하고 저벅저벅 걸어 들어왔다. 일생일대의 기지와 순발력을 발휘해 파이논은 근처 얼음통에 얼굴을 박았다. 다른 아르바이트생이 달려와 아낙사의 주문을 받는 걸 옆에서 듣고만 있어야 한다는 건 심적으로 괴롭고… 물리적으로 좀 차가운 일이었다.

  ‘그 메뉴는 이미 에스프레소 네 샷이 들어가잖아요. 아낙사 선생님, 아신다면서 거기에 샷 추가는 왜 하시는 건가요? 다섯 샷이에요, 다섯 샷! 잠깐만요, 물 적게 옵션은 또 왜 고르시는 거죠? 시럽도 빼신다고요? 그럼 그냥 독약이나 다름없잖아요……!’

  얼얼한 기분으로 소리 없이 외쳐봤지만 어쩌겠는가. 모습을 드러낼 수 없으니 음료가 완성되는 걸 애타는 마음으로 지켜볼 수밖에. 그래도 하나쯤은 파이논에게도 아르바이트생으로서 자랑할 만한 일이 있었다. 아낙사가 이쪽을 보지 않은 틈을 타, 주문서의 “아낙사” 뒤에 “고라스”를 몰래 추가한 것이다.

  “아낙사… 고라스 님? 커피 나왔습니다.”

  만족한 얼굴로 파이논의 사랑스러운 선생님이 <에스프레소 5샷, 물 적게, 시럽 빼고, 바닐라 크림 빼고, 얼음 없이> 한 잔을 수거해간다. 몰래 사진으로 남기고 싶을 만큼 흡족해 보이는 모습이었다.

  그리고 그날 시프트를 마지막으로 파이논은 카페 알바를 그만두었다. 점장은 어떻게든 그를 더 데리고 있고 싶어 하는 눈치였지만 파이논의 마음은 이미 굳어진 지 오래였다. 캠퍼스 근처 카페는 너무 위험하다. 이번 일은 확실히 카페인과 아낙사 선생님의 상관관계를 미처 떠올리지 못한 그의 실책이었다.

 

목표금액: 15% 달성



2. 기념품샵

  그리하여 파이논의 두 번째 선택은 번화가의 기념품샵이었다. 시급이 나쁘지 않았고, 주로 어린아이를 동반한 가족 단위 관광객을 상대로 한다는 점도 플러스 요인이었다.

  그러나 행운은 이번에도 가련한 알바생 편이 아니었다. 하필이면 많고 많은 프랜차이즈 중에, 널리고 널린 가게 중에, 파이논이 일을 시작하자마자 이 지점이 드로마스™ 기간한정 팝업 스토어 콜라보 대상으로 낙점될 거라고 누가 예상이나 했을까?

  드로마스 풍으로 꾸며진 실내와, 내일부터 드로마스 머리띠를 쓰고 근무한다는 매니저의 설명에 파이논은 눈물을 머금고 선언했다.

  “저, 그만두겠습니다.”

 

목표금액: 18% 달성



Intermission

  “카스토리스 씨, 어디 좋은 알바 없을까?”

  갑작스런 파이논의 질문에 자판을 치던 카스토리스의 손이 멈춘다. 대부분의 사람은 지금 파이논의 옆모습을 보고 우수에 찬 대학생이라는 표현을 떠올리겠지만, 카스토리스는 그보다는 칭찬이 고픈 강아지, 의기소침한 백구라는 말을 붙여주고 싶었다.

  “아르바이트라고 하면 어떤 분야를 찾으시는데요?”

  “어떤 일이든 다 괜찮아. 그냥 내가 드러나지 않는 일이면 돼.”

  “네? 정체가 드러나지 않는 아르바이트요?”

  순간 카스토리스의 머릿속에 다양한 상상의 나래가 펼쳐졌다. 파이논은 얼른 손을 휘저으며 그 상상들을 흐뜨러뜨렸다.

  “뭘 상상하는지 몰라도, 그런 건 아닐 거야. 그냥 좀… 사람들한테 알바하는 모습을 들키고 싶지 않아서. 그런 의미에서 좋은 데가 없을까 생각하는 중이었어.”

  “아아, 그런 의미셨군요. 그렇다면 구직 사이트를 같이 확인해 보는 건 어떠세요? 학생용 게시판에도 가끔 괜찮은 일이 올라온다고 들었어요.”

  “그거 괜찮은 생각이네!”

  카스토리스가 태블릿 PC를 나란히 볼 수 있도록 돌리고, 두 친구는 한참 동안 화면을 스크롤해나갔다. 

  <시장개척부가 미래의 스타를 기다립니다—근무조건 협의 결정, 비밀유지계약 필수>? 아무리 그래도 너무 수상하잖아. 

  <실험 조수를 찾습니다, 연구책임자 완・매>… 이건 관두자. 그럴 만한 이유가 있거든.

  <(급구) 드로마스 팝업 직원 모집>. 하하… 갑자기 왜 이렇게 양심이 찔리지?

  각양각색의 아르바이트가 있었지만 파이논의 조건에 딱 들어맞는 건 눈에 들어오지 않았다. 한숨을 폭 내쉬며 파이논은 테이블에 볼을 붙이고 누웠다. 잠시 맘대로 하도록 내버려둔 다음, 이만하면 충분하다 싶었을 때 카스토리스가 조용히 말을 붙였다.

  “어쩌면 저희 접근이 잘못됐을지도 몰라요.”

  “응? 무슨 뜻이야?”

  “그러니까 이런 거죠.”

  조건에 딱 맞는 아르바이트가 나타나길 바란 게 문제일지도 모른다. 차라리 발상을 바꿔서, 애초에 왜 남들 눈을 피하고 싶었는지, 그 근본적인 원인으로 돌아가 보면 어떨까?

  “지금 피하고 싶은 건 많은 사람들의 시선인가요, 아니면 어느 한 사람의 눈길인가요?”

  “한 사람이라고 하는 게 더 맞겠지.”

  “그렇다면 그 사람과 마주치지 않을 만한 일을 구하는 게 급선무네요. 예를 들어 여기 보세요, 동물병원 접수처에 공석이 있대요. 말씀하신 그 사람이 동물을 키우나요?”

  “어…….”

  아닐 것이다. 아낙사 선생님의 침대와 샤워실 바닥에 민트색 아닌 머리카락이 떨어진다고 하면 범인은 100% 파이논이었으니까. 혹시라도 반려동물이 있다면 그럴 수는 없었다.

  “그렇지 않을걸.”

  “그러면 동물병원도 좋은 생각이지 않을까요. 이런 식으로 좁혀 나가다 보면 괜찮은 아르바이트가 발견될 거예요.”

  “정말 고마워, 카스토리스 씨! 당장 동물병원에 이력서 넣고 올게!”

  “네? 그냥 예시를 든 것뿐이었는데… 아, 벌써 가버리셨네.”

  바람처럼 사라진 파란색 코트 자락을 보면서 카스토리스가 중얼거렸다. 동물병원이라. 파이논이라면 강아지 일족의 숨겨진 특별한 능력을 발휘해서 아픈 동물들과 대화를 나눌 수 있게 된다고 해도 그다지 놀라울 것 같지 않다. 갑자기 터져 나온 웃음에, 카스토리스는 입가를 가리고 쿡쿡 소리 죽여 웃었다.



3. 동물병원

  동물병원 아르바이트의 가장 큰 장점은 동물이 가득하다는 것이고, 동시에 최악의 단점은 그 동물들 대부분이 병이 있거나 질환이 의심되어 찾아온다는 것이었다. 파이논은 진료실 안에서 낑낑거리는 소리를 들으면 저도 모르게 눈물이 고일 때가 조금, 아니, 많이 있었다. 일개 접수 알바생으로서 그럴 필요가 없었지만, 밤새도록 병원에 있어야 하는 강아지나 고양이, 뱀, 고슴도치, 햄스터… 아무튼 동물 손님이 생기면 파이논은 당직을 자처하기도 했다. 가끔 손님과 환자 이름을 헷갈려서 반대로 부르는 걸 제외하면 (“블레이디 님. 다음 차례입니다!”, “…블레이디는 내가 아니라 얘 이름이야.”), 솔직히 무슨 실수를 하려야 할 수도 없었다.

  손님이 유달리 적은 어느 토요일이었다. 출근하자마자 어제 자 차트를 들춰보던 파이논은 심장이 덜컥 내려앉는 기분을 맛보았다.

 

- 주인: 아낙사고라스

- 환자명: 이름 없음(수컷 고양이, 5세 추정)

 

  “아… 아낙사?”

  “그분 혹시 알아? 여기 근처 대학에서 일하시는 교수님인데, 종종 조교랑 같이 캠퍼스 고양이들을 데리고 나타나셔. 그러고보니 너도 그 대학 다닌다고 했었지. 예방접종이랑 뭐 이것저것, 자비를 들여서 돌봐주시는 모양이더라고. 처음에 이름을 물어봤는데 아낙사고라스라고 해서 난 또 그게 고양이 이름인 줄 알고 실수했지뭐야. 아낙사야, 네 차례란다~ 하고. 그때 나를 어찌나 노려보시던지. 어휴, 너도 조심해, 신입.”

  조심하고말고요. 파이논이 또 한 번 눈물을 삼켰다. 아아, 잘 가라, 이번 직장. 그래도 동물 친구들 덕에 행복한 아르바이트 생활이었다.

 

목표금액: 51% 달성



4. 꽃집

  동물병원 일을 그만두면서 파이논은 고용주에게 “더는 괴로워하는 동물들을 두고 볼 수가 없어서”라고 변명했다. 그야 썩 좋은 기분은 아니었지만, 일을 관둘 만한 사유냐 하면 파이논은 조금 찔리는 감이 있었는데, 병원 식구라면 한 번쯤은 그의 파란 눈에 고여있던 눈물을 목격했던 터라 다행히도 누구 하나 의심하지 않았다.

  파이논이 다음에 고른 업장은 꽃집이었다. 다른 이유는 없고, 전에 일하던 동물병원에서 바로 길 건너라는 점 하나 때문에 골랐다. 그리고 꽃에 대해 잘 알면 나중에 아낙사에게 선물할 때 유용하게 쓰이지 않을까 하는 작은 계산도.

  꽃집 업무는 대충 이런 식이었다. 아침에 출근하면 먼저 앞치마를 꺼내 입고, 어닝을 내리고 화분단을 내놓는다. 오늘 물을 줘야 하는 아이들을 골라 물뿌리개를 기울이고 있으면, 지나가던 사람들이 슬금슬금 가게로 모여드는 식이었다. 화창한 태양과 물뿌리개가 그리는 작은 무지개를 배경으로 환하게 웃는 건 파이논에게는 무척 자신 있는 일이었다!

  사장님의 손끝에서 탄생하는 꽃다발은 이 분야에 정통하지 않은 파이논이 봐도 아름다웠다. 색깔 배치라던가, 소품을 적절하게 활용하는 법이라던가. 한 송이 해바라기가 처음이자 하나뿐인 깊은 사랑을 의미한다는 것도 사장님에게서 처음 배웠다. 아낙사에게 언젠가 꽃다발을 선물한다면, 물론 지금 예산으로는 턱도 없겠지만, 들판에 핀 한 송이 해바라기가 그만의 태양을 바라보는 모습의 꽃다발을 선물하고 싶다는 작은 소망이 생겼다.

 

목표금액: 68% 달성



Intermission

 

워크스페이스 그룹챗

참여자: Dr. 레이시오, 첫째, 내 이름은 아낙사고라

 

Dr. 레이시오: 요즘 그 학생이 잘 안 보이던데. 무슨 일이라도 있었나?

첫째, 내 이름은 아낙사고라: 누굴 말하는 거지?

Dr. 레이시오: 누굴 일컫는 건지 잘 알잖아.

첫째, 내 이름은 아낙사고라: 달리 할 말 없으면

Dr. 레이시오: 좋아. 그럼, 다음 주 단체 회식 얘기를 하지. 꽃다발 주문 담당이 너라는 걸 잊지 마. 

 

[System: ‘첫째, 내 이름은 아낙사고라’ 님의 닉네임이 ‘둘째, 내 말을 중간에 끊지’(으)로 변경되었습니다.]

[System: ‘둘째, 내 말을 중간에 끊지’ 님이 대화에서 나갔습니다.]



5. 레스토랑

  이판사판이라는 기분으로 파이논은 고급 레스토랑의 문을 직접 두드렸다. 그리고 갔노라, 보았노라, 면접에 합격했노라.

  그리고 기념비적인 레스토랑 근무 첫날.

  “오늘 여러분의 테이블을… 책임지게 된… 파이논입니다.”

  신들이시여, 저한테 정말 왜 이러세요?

  “백발 학생. 목소리가 좀 작은데?”

  긴 테이블에 앉아 그를 기다리고 있는 건 이제까지 몇 번이나 얼굴을 마주친 경험이 있는 교수님들이었다. 헤르타 교수님. 완・매 교수님. 칼립소 교수님. 물론 닥터 레이시오도 동석했지만 그 교수님만큼은 적어도 파이논과 최대한 눈을 마주치지 않는 친절을 베풀어주었다.

  그리고 아낙사로 말하자면…….

  “파이논. 이 음식에 어울릴만한 와인 조합은 뭐지?”

  아낙사는 주문 내내 화학 공식을 시험하는 것처럼 복잡한 질문을 던져 파이논의 머릿속을 어지럽게 만들었다. 신참 웨이터답게 파이논이 버벅거리자, 아낙사는 친히 메뉴판을 펼쳐서 정답을 가르쳐주기까지 했다. 쥐구멍이 있다면 쥐와 싸워서 점거하고 싶은 심정이다.

 

  ‘아낙사 선생님이랑 이런 레스토랑에 오고 싶었던 거지, 서빙하고 싶었던 게 아닌데.’

  휴게시간이 되자 파이논은 식사도 마다하고 식당 뒷문에 쪼그려 앉았다. 시멘트 바닥에 앉아 그는 어쩌다 자신이 이런 신세가 됐는지를 돌이켜보았다. 파이논이 생각에 잠겨 있는 동안 뒤에서 저벅저벅 다가오는 발걸음 소리가 있었다. 다른 아르바이트생이겠거니 하고 그는 고개를 돌리지 않았다.

  “파이논, 배 안 고파?”

  “잠시 내버려두세요, 지금 제 인생의 못난 결정들을 짚어보는 중이니… 아, 아낙사 선생님!”

  파이논이 잽싸게 몸을 털고 일어났다. 아낙사는 식전빵이 든 봉투를 안고, 천천히 이쪽으로 걸어 오는 중이었다. 봉투 입구를 열자 밀과 버터의 풍미가 훅 끼쳐온다. 파이논은 갑자기 배에서 꼬르륵 소리가 날 것 같았다.

  “어쩐지 그간 바빠 보이더라니.”

  “…실은 이게 다섯 번째 직장이에요.”

  어차피 다 들킨 마당에 숨기는 게 무슨 의미가 있나 싶었다. 아낙사가 내민 식전빵은 빠르게 파이논의 입속으로 사라졌다. 뱃속에 음식이 들어가자 조금 기운이 났다. 파이논은 다시 쪼그려 앉아서 아낙사에게 그간 있었던 일을 빠짐없이 공유했다. 카페에서 일하기 시작했는데 들킬까 봐 바로 그만뒀고, 기념품샵에서 드로마스 팝업을 한다고 해서 또 그만뒀고, 동물병원 차트에 선생님 이름이 있길래 관뒀고, 꽃집은 괜찮겠지 했더니 거기서도 선생님 이름으로 주문이 들어오고.

  “그렇게나 나와 만나기 싫었나보지?”

  “그런 거 아니라는 걸 아시잖아요. 선생님 몰래 돈을 모아서 한 끼 멋지게 대접할 생각이었다고요.”

  “알아.”

  “그때까지 샷 추가는 적당히 해주세요. 길에서 동물을 만질 땐 꼭 조심하시고… 와인 페어링도 공부해 올 테니까 기대하셔도 좋아요.”

  “그래, 기대하지.”

  봉투 바닥을 뒤적이더니 아낙사가 마지막 남은 식전빵 하나를 찾아서 내민다. 행복하게 우물거리는 파이논의 볼을 보면서, 아낙사는 자신의 기특한 연인의 머리를 부드럽게 쓰다듬었다.

 

목표금액: 미달성, 아니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