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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파이낙사] 중력 피로증

Pull Me Groundward

※ 3.7버전 이전에 쓰인 글입니다.

※ 앰포리어스가 해피엔딩을 맞이하고 33,550,337번째 윤회를 베이스로 실체화했다는 날조 설정입니다.




  앰포리어스의 하늘이 열리고 광력 세 번째 해, 깨달음의 나무 정원의 현인 중 한 사람인 아낙사고라스가 천외로 떠났다.

  아주 시원스러운 작별이었다고 남아있는 사람들은 이야기한다. 앰포리어스를 위해 저 황금의 후예가 해낸 모든 일들에도 불구하고, ‘시원스럽다’는 수식어 속에서 파이논은 그 학자를 향한 사람들의 막연한 공포심이랄지, 단단히 응어리져 잘 풀어지지 않는 어떤 불쾌감 같은 것을 느꼈다. 하지만 그런 부정적인 감정들을 잠시 제쳐놓고 생각해 보면 시원스러운 작별이라는 말은 아낙사에게 잘 어울리는 표현이었다. 그날 그를 배웅하는 소수의 무리에 끼어 파이논은 떠나는 아낙사의 등을 멍하니 바라보고 있었다. 어깨는 활시위처럼 뒤로 당기고 턱을 조금 치켜든 채, 짐가방 하나만을 길동무 삼아 플랫폼 위에 서 있던 그 작고 당당한 뒷모습을. 듣자 하니 미완성 원고 한 장, 휘하에 졸업하지 못하고 남아있는 학생 한 명 남겨두지 않았다고 들었다. 졸업까지 남들의 몇 배가 걸리는 못난 학생이 있었더라도, 그가 아는 「아낙사」 선생님이라면 마지막의 마지막까지 참을성 있게 지도해주셨을 테지———아니, 이 생각은 여기서 멈춰야 한다. 꼴사납게 가지 말아 달라고 매달리지 않으려면, 다시 어린아이로 돌아간 것처럼 엉엉 울면서 주저앉지 않으려면.

  (요즈음 파이논은 눈물이 한 번 시작되면 도통 멈추지 않는 곤란한 현상을 겪고 있었다. 어쩌면 사람이 일평생 흘릴 눈물의 총량이라는 게 있어서, 파이논은 그간 과거 자신들이 참아 온 만큼의 대가를 치르고 있는 걸지도 모른다. 아마도. 어쩌면.)

  그렇게 아낙사고라스는 시원스럽게 가버렸다. 못다 쓴 논문 한 편, 미처 처분하지 못한 가구나 옷가지 하나 남겨두지 않고. 파이논으로 말하자면, 자신의 것인지도 확실하지 않은 전생의 추억들과, 열세 자리 숫자로 된 서로의 연락처만이 그가 아낙사고라스와 공유하는 모든 것이었다.

  천외로의 통신이 개방된 지도 벌써 3년하고도 7개월째. 파이논의 손가락이 종종 연락처의 「아낙사고라스」 위를 서성이지만, 한 번도 통화나 대화 버튼을 누른 적은 없다. 아낙사 쪽에서 먼저 연락이 오는 일도 없었다.



  명석시에는 깨달음의 나무 정원의 초청을 받아 파이논이 특강자로 무대 위에 섰다. 처음에는 거절할 생각이었는데, 그가 거절한다면 카스토리스도 거절할 것이고, 그러면 두 사람을 추천한 히아킨이 곤란해질 것 같았다. 반짝이는 눈들이 일제히 자신을 바라보자, 파이논은 길다면 긴 인생에서 처음으로 입이 떨어지지 않는 경험을 했다. 그래도 준비한 말을 몇 마디 쏟아내자 언제 그랬냐는 듯 그의 혀가 부드럽게 돌아가기 시작했다.

  그 능청스러운 화술은 여전하군.

  귓가에서 그렇게 말하는 아낙사 선생님의 목소리가 들리는 듯하다. 그러게요, 하고 파이논은 자신의 생각 속 목소리를 향해 조용히 대꾸했다. 이게 다 「아낙사」 선생님이 잘 가르쳐 주신 덕분이죠.

  강연이 끝나자 학생들의 박수 소리가 한동안 잦아들지 않았다. 파이논은 익숙한 미소로 몇 번 고개를 숙인 뒤, 조용히 무대를 내려왔다. 주머니에서 전서의 석판을 꺼내 전원을 켜자마자 화면이 연달아 깜빡이면서, 미처 확인하지 못한 알림이 폭죽처럼 터져 나왔다.

 

부재중 전화가 있습니다.(2)

부재중 전화가 있습니다.(3)

부재중 전화가 있습니다.

[공감각 비콘으로 변환된 메시지입니다.] 행성간 이주 적응 장애 지원 센터에서 연락드렸습니다. 이 메시지를 보시면 반드시 연락 주세요.

 

  파이논의 시선이 화면 위에서 흔들린다. 짧게 훅 숨을 내쉬고 그가 낯선 숫자열로 전화를 걸었다. 신호음이 몇 번 가기도 전에 반대쪽에서 빠르게 상대가 나타났다.

  “연락 주셔서 감사합니다. 아낙사고라스 님의 보호자 되시죠?”

  “네?”

  “잠시만요, 이걸 어떻게 읽는 거지. 엘리사이, 에데스의 파이논 님 맞으시죠?”

  “……네.”

  “아낙사고라스 님이 저희 센터에 입원하셨는데요, 보호자 분께서 와주셔야 할 것 같아서 연락 드렸습니다.”

  “입원이라뇨.”

  겨우 그 한마디를 파이논은 짜내듯 내뱉었다. 상대의 말이 이어지지만 머릿속이 하얗게 비어 전혀 이해되지 않았다. 저희는 항성 좌표계 어디에 위치하고 있고, 은하 인준이 되어 있는 신분증을 꼭 지참하시고, 자세한 면회 절차는 나중에 메시지로…….

  “네, 금방 가겠습니다.”

  제 귀에도 낯선 목소리로 파이논이 대답하고 있었다. 통화가 끊어지자마자 파이논은 주머니에 석판을 넣고 달렸다. 복도 끝으로, 건물 밖으로, 이윽고 나무 정원의 복잡하게 얽힌 길로, 이제껏 수도 없이 달리고, 달리고, 또 달린 그 길의 끝을 향해 또 한 번.



  “그렇게까지 큰 일은 아닙니다,” 라는 게 아낙사를 담당한 의사의 첫마디였다.

  “중력 피로증, 광선 불균형 증후군, 거기에 환자 본인의 과로 성향까지. 전형적인 별 멀미 현상이에요. 푹 자고 잘 먹기만 하면 늦어도 한 달이면 다 낫습니다.”

  “푹 자고 잘 먹지 않는 경우는 어떤가요?” 하고 파이논이 묻자 의사는 눈썹을 하늘 높이 들어 올렸다. 주치의와의 짧은 면담은 그걸로 끝. 파이논은 보호자 서약서를 작성한 다음 아낙사 선생님이 누워 있는 병실로 향했다. 복도를 걸어갈수록 소독약 냄새가 짙어진다. 이에 저항하듯이 파이논은 갈수록 숨을 얕게 쉬었다. 병실 앞에 서서 두 번 노크하고, 대답을 기다리는 대신 슬라이드 도어 열림 버튼을 눌렀다. 스르륵 문이 열리고 선생님의 모습이 드러났다.

  병실은 환하게 불이 켜져 있었다. 아니, 방 안이 밝은 건 암막장치를 걷은 창문에서 밝은 빛이 쏟아져 들어오는 덕분이다. 그 흰 빛은 아낙사의 얇은 몸을 통과해 그를 거의 투명하게, 이 세상 사람이 아닌 것처럼 보이게 만들었다. 일부러 파이논은 발소리를 내어 침대로 다가갔다. 아낙사가 살짝 고개를 돌려, 안대를 쓰지 않은 쪽 눈으로 파이논을 돌아보았다. 푸른색과 붉은색의 띠가 부딪히는 오묘한 색의 눈동자가 속눈썹 아래에서 파이논을 올려다본다. 파이논은 제어할 수 없는 뜨거운 눈물이 자신의 볼을 타고 병실 바닥으로 투둑 떨어지는 것을 느꼈다.

  “아낙사…….”

  선생님.

  “목숨은 하나뿐이에요. 이번 생이 끝나면 이제 두 번째, 세 번째 삶이 당신을 기다리고 있진 않을 겁니다. 그러니까, 그러니까.”

  “…….”

  “제발, 자신을 소중히 여겨주세요, 선생님…….”

  “오랜만이네.”

  “네?”

  “네가 날 실수로 선생님이라고 부른 거.”

  아낙사가 팔짱을 끼었다가 고개를 까딱하면서 한쪽 손을 들어 올린다. 그가 수업 중 무슨 개념인가를 설명할 때면 늘 취하는 자세였다, 혹은 파이논의 어리석음을 꾸짖을 때라거나.

  “내 어리석고 훌륭한 제자여, 네 말을 그대로 돌려주지. 너에게도 네 목숨은 하나뿐이고, 내 시간이 유한한 것처럼 네 시간 또한 유한해. 그렇다면 엘리사이 에데스의 파이논, 넌 이 시간을 어떻게 쓸 생각이지? 계속해서 모두와 거리를 둔 채 은둔자처럼 하늘도 땅도 아닌 곳을 떠다니며 살아갈 건가, 삼천삼백오십오만 삼백 서른여섯 명의 유령들과 함께하면서?”

  아, 어떡하면 좋을까.

  눈물이 멈추지 않는 곤란한 현상이 또 벌어지고 말았다. 계속해서 눈물을 훔쳐 보지만 파이논의 시야는 뿌옇게 변하고 또 변하기를 반복했다.

  “이리 와, 파이논.”

  아낙사가 침대의 빈자리를 손으로 두드리며 말한다. 조금 망설이다가 파이논이 체중을 거의 싣지 않고 조심스럽게 침대에 다리를 붙여 앉았다.

  “천외에 나가려면 보호자를 반드시 등록해야 한다길래 멋대로 네 이름을 빌렸어, 그에 대해선 사과하지. 하지만 내가 아는 바가 맞다면 넌 내 보호자 역할을 하는 걸 은근히 좋아했던 것 같은데.”

  “잘 아시네요.”

  “그래, 「파이논」에 대해선 뭐든 알아. 하지만 너에 대해선 무지하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지. 난 내 보호자를 더 알아가고 싶은데, 너는 어떻지?”

  “저도 매우, 찬성이에요.”

  “그럼, 일단 자기 소개부터 할까.”

  내 이름은 아낙사고라스, 나를 아낙사라고 부르지 마.

  익숙한 첫 문장에 파이논이 흐르는 눈물 속에서 부드럽게 미소 지었다. 그들의 한 번뿐인 삶은 이제부터가 시작이었다.






한 달 후

 

  720호 환자가 드디어 퇴원한다는 소식에 행성간 이주 적응 장애 지원 센터의 의료 스태프들은 한동안 복잡한 감정에 사로잡혔다. 한편으로는 그가 공용 레크리에이션 공간에서 다른 환자들과 논리 씨름을 하거나, 갑자기 강의를 시작하는 모습을 더는 볼 수 없다고 생각하니 섭섭하고 아쉬운 게 사실이었다. 한 번이라도 그 명강의에 귀를 기울여 본 사람이라면 빠르게 알아차렸을 텐데, 가르치는 건 그에게 두 번째 본능처럼 익숙한 일이었고, 스포트라이트 아래에 서는 건 그의 타고난 운명이었다. 그래서인지 입원해 있는 환자들은 모두 이 720호 환자를 “교수님”, “선생님” 이라고 부르며 호칭에 걸맞는 경외심을 갖고 그를 대했다. 그리고 한 달은 이 별명이 의료진들 사이에까지 퍼지기에 충분한 시간이었다.

  다른 한편으로 이 “선생님”은 <의료 스태프 안전 수칙>을 버전 7.0으로 업그레이드하게 만든 장본인이기도 했다. 대체 뼈가 드러나게 마른 그 몸 어디에 그런 기운이 숨어있는 건지, 스태프가 검사용 채혈 도구를 가져오면 늘 정량의 두 배를 뽑아 한 병은 자신에게 공유할 것을 요청했고, 침대에 누워 있을 바엔 센터의 모든 의료기기를 한 번씩은 체험하길 원했다. <의료 스태프 안전 수칙> 버전 7.0에 따르면, 이럴 때 취해야 하는 행동은 딱 하나였다.

  720호 환자의 보호자 청년을 부르기.

  “선생님, 약속하셨잖아요. 입원해 있는 동안은 얌전히, 회복에만 전념하면서 계시겠다고요.”

  호출을 넣으면 보통 5분에서 10분 내로 보호자 청년은 달려왔다. 하얀색 머리카락을 흩날리며, 긴 다리를 보기 좋게 뻗어. 그리고 선생님의 옆자리나 문간에 서서, 비통한 마음을 감출 수 없다는 듯이 가슴에 손을 얹고, 그렁그렁한 물기가 느껴지는 말투로 호소했다. 

  “저와의 약속을 저버리신다면 전 정말 마음이 아플 거예요. 전 선생님을 믿어요, 선생님이 저를 믿듯이요. 제가 헛된 곳에 믿음을 맡기지 않았다고 다시 약속해 주실 수 있죠, 아낙사 선생님?”

  “……하.”

  “이해하셨다면 저희 같이 병실로 돌아갈까요?”

  “마음대로 해.”

  “옮겨 드릴 수도 있어요. 원하세요?”

  “그건 8,613,406번째 회차에나 먹혔던 말이야. 좀 더 연구해.”

  그렇게 아낙사 선생님은 휙 가버리고, 보호자 청년이 거대한 몸집을 구기며 그 뒤를 졸졸 따라가는 형국. 행성간 이주 적응 장애 지원 센터의 의료 스태프들에게는 이제 일상처럼 익숙해진 모습이었다.

  복도에서, 레크리에이션 룸에서, 병실에서, 체혈실에서. 어딜 가나 꼭 붙어있는 저 듀오의 귀여운 말다툼과 사랑싸움을 이제는 못 볼 거라고 생각하니 역시 아쉽다. 하지만 환자가 깨끗이 나아 센터를 떠나는 건 스태프들에게는 자랑스러운 경험이고 뿌듯한 성과다. 시원섭섭한 마음을 품은 채, 플랫폼에 모인 의료진은 이동용 간이 포드에 오르는 두 앰포리어스인의 뒷모습을 한참 동안 지켜보았다. 거의 농담처럼 느껴질 만큼 말도 안 되는 저 체격 차이와, 서로가 서로의 위성인 것처럼 떨어지려고 하지 않는 스치는 손끝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