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문 바로가기

hsr/hsr

[파이낙사] 우리 보조강사와 교수님이 그런 사이일 리 없어?!

※ 3.7버전 이후에 쓰인 글입니다.

※ 셀프 힐링을 위한 개그물





  나무 정원에서 교원을 채용할 때는 암묵적인 세 가지 금칙, 삼금칙(三禁則)을 지키게 되어 있었다.

  첫째, 출신지를 밝히지 않는다. 지역으로 차별받는 일을 미연에 방지하기 위해서였다.

  둘째, 자신의 이름을 밝히지 않는다. 앰포리어스 사람의 이름 속에는 자연스럽게 출신지가 포함되어 있거나 혹은 암시하는 경우가 많았다. 두 번째 원칙을 허용한다면 따라서 첫 번째 원칙에 어긋난다.

  셋째, 학문의 길에서 어떤 연구를 해왔는지 설명할 수는 있지만, 구체적인 학파나 스승의 이름은 밝히지 않는다. 이 또한 차별의 실마리가 될 수 있고, 학파주의를 만연하게 하는 결과가 된다.

 

  그리고 평온한 자유의 달의 어느 날, 나무 정원에 첫 기둥이 세워진 이래 최초로 이런 규칙 따윈 자유롭게 파괴해 버리는 초특급 지원자가 면접실의 문을 두드렸으니——

  “안녕하세요, 저는 엘리사이 에데스카오스라나라고 합니다. 파이논이라는 이름이 더 익숙하신 분도 계실 거예요. 이렇게 나무 정원 강사 자리에 지원할 기회를 주셔서 감사합니다. 절 기억하는 분이 계실지 모르겠지만, 나무 정원에서는 누스페르마타 학파의 학생으로 남들보다 조금 오래 신세를 졌었죠.

  아, 학창 시절을 돌이켜보니 마지막 대토론회에서 우승컵을 손에 쥐었을 때가 생각나네요. 수상자로 연단에 올라가기 전 저는 마지막으로 등을 돌려, 이날이 오기까지 무한한 인내심으로 절 지도해주신 아낙사 선생님을 돌아봤었죠. 선생님께선 눈물이 그렁그렁한 눈으로 저를 올려다보시며 이렇게 말씀하셨어요. 파이논,

  ‘침묵은 금인 법이야. 하지만 네 혀는 금보다 값진 것 같군.’

  툭.

  그건 가림막 안쪽, 면접관으로 앉아 있던 아낙사의 손에서 펜이 떨어지는 소리였다.

  펜은 허망하게도 회의용 테이블 위를 굴러가 마지막 자리에 앉은 베네라티오 학파 현인 앞에서 멈췄다. 그래, 인정한다. 아낙사는 그 마지막 대토론회에서 분명 그렇게 말한 적이 있었다. 침묵은 금이지만 파이논 네 혀는 금보다 값진 것 같다고. 그때는 아낙사 자신도 조금 감상적으로 되었다는 것을 인정한다. 하지만 만약 영원한 윤회를 살면서 단 하루만 감상적으로 되어야 한다면, 아끼는 제자가 대토론회 10연속 우승을 차지한 날에 그 기회를 쓰는 게 뭐가 어때서? 그러니 아낙사는 기뻐하는 제자를 품에 포옥 안고 “잘했어, 파이논!” 하고 외친 것에 한 점 후회도 부끄러움도 없다.

  그러나 누스페르마타 현인(유임)의 침실에 가지런히 접어놓은 드로마스 잠옷에 맹세코, 눈물을 글썽이지는 않았다!

  아낙사 선생님이 참지 못하고 가림막 바깥으로 뛰쳐나가기 일보 직전임을 아는지 모르는지, 파이논은 면접관 모두를 매료시키는 환한 미소를 지으며 자기소개를 이어나갔다.

  “——인생이란 자아를 찾는 긴 여행이죠. 저는 남들보다 조금 늦은 출발선에서 이 여행길에 올랐습니다. 그런데 문득 이런 생각이 들더군요. 지금의 제가 있는 건, 절 가르치신 모든 선생님들의 존재가 있었기에 비로소 가능한 것이었다고요.

  여러분! 제게 이 나무 정원 강사 자리를 주신다면, 이번에는 이 파이논이 선생님들께 배운 모든 것을 쏟아붓는 강사가 될 것을 약속합니다. 제가 가르치는 건 단순히 교과서 속 지식이 아니에요. 삶을 대하는 태도, 삶이 나에게 어떤 걸 던져도 굴하지 않을 마음가짐, 세상을 위한 진리를 추구하는 열정. 저는 그걸 가르칠 준비가 되어 있습니다. 그게 절 가르치신 모든 선생님들을 향한 제 경의의 표시니까요.

  들어주셔서 감사합니다. 엘리사이 에데스의 파이논이었습니다.”

  “…….”

  “…….”

  “…….”

  “……어, 음. 감사합니다, 파이논 지원자. 나가시는 문은 왼쪽입니다.”

  “좋은 결과 기다리고 있겠습니다!”

  파이논이 일어나면서 의자가 드르륵 소리를 냈다. 그가 퇴장하고 나서 수십 분이 지나도록 면접관석에서는 아무도 입을 여는 현인이 없었다. 모두들 누스페르마타 현인, 아낙사의 눈치를 살피며 조용히 파이논의 지원서에 점수를 매겼다.

 

  면접 다음 날 파이논의 채용 점수가 공개되었다. 아낙사를 제외한 모든 면접관의 점수가 만장일치 만점이란다. 그렇다면 아낙사는 몇 점이었을까? 파이논이 알게 된다면 “어떻게 그러실 수 있어요!” 하고 외칠 만한 점수, 빵점이었다. 한 사람이 0점 처리했음에도 불구하고, 나머지가 만점을 주었으니 파이논을 인력난에 시달리는 나무 정원의 보조 강사로 채용하기에 충분한 결과였다. 아낙사의 목소리는 늘 그렇듯 누스페르마타 현인 혼자만의 독특한 의견으로 처리되어 반영되지 않았다.

  그리고 파이논 강사님의 소속 학파 말인데——본인이 그렇게 부르짖던 누스페르마타 외에 달리 정답이 있을까?




/첫 출근

  “선생님, 저 학교 가기 싫어요.”

  “가야지. 오늘부턴 네가 선생인데.”

  “그러면 뭐해요, 오늘 아낙사 선생님 강의에 들어가는 보조 강사는 제가 아니잖아요…… 이제 절 위로해 주지도 않으실 건가요?”

  흥, 하는 소리가 아낙사의 입에서 절로 나온다. 그럼 내가 밤새 격려해 준 건 뭐라고 생각하는 거야? 가지런한 손끝으로 아직도 이불에서 뭉그적대고 있는 파이논의 이마를 가볍게 콩 때리자, 제자이자—이제는 직장 동료인 파이논이 현인에게 한 대 맞고도 뭐가 좋은지 배시시 웃는다. 그 모습을 보는 아낙사도 살짝 입꼬리가 올라가지 않았다고는 말하지 못하겠다. 드디어 쓸모를 찾은 특대형 드로마스 잠옷은 파이논에게 지나치게 잘 어울렸다.

  “아낙사 선생님 이불은 참 아늑하네요, 꼭 선생님 같아요. 제 임시 숙소에 있는 거랑은 차원이 다르다니까요.”

  “그렇게 마음에 들면 가져가던가. 난 상관 없어.”

  “정말 저랑 더 안 누워 계실 거예요? 저 지금 굉장히 따뜻하고, 탄탄하고, 드로마스 잠옷도 입었고——”

  “그리고 우리 둘 다 지각하게 만들려고 하고 있지. 얼른 일어나, 같이 출근하는 게 꿈이라며?”

  “!!!”

  침대에서 빨리 일어나기 대회라는 게 있다면, 지금 파이논은 우승자를 노려볼 만했다. 경이로운 속도로 파이논은 침대에서 일어나 일체형 드로마스 잠옷을 훌렁 벗어던지고, 이부자리를 정리하고, 씻으러 달려나갔다.

  “금방나올게요절기다려주세요선생님!”

  욕실에서 뭔가가 우당탕 부서지는 요란한 소리가 난다. 뒤이어 몹시도 당황한 “죄송해요, 죄송해요! 금방 고쳐놓을게요!” 하는 목소리도. 아낙사는 피식 웃었다. 오늘 명석시에 예정되어 있던 아낙사의 강의가 편리하게도 내일로 미뤄졌지만, 파이논 강사님은 아직 이 사실을 모른다. 내일 파이논의 스케쥴표에 〈누스페르마타 학파 현인의 강의〉가 적혀 있다는 것도 아낙사는 아직 그에게 알려주지 않았다.

 

  신임 보조 강사의 첫 출근날, 그는 같은 학파의 현인과 어깨를 나란히 하고 다정하게 출근하는 모습으로 학생들에게 처음 목격되었다. 소문에 따르면 그 아낙사 교수가 강사의 삐죽 솟은 뒷머리를 손수 까치발로 정리해 주고, 무려 다정하게 인사를 건네기까지 했다는데 (“내일 수업에서 봐, 파이논”), 소문이라는 게 으레 그렇듯 과장된 면이 있을 것이다.

  어쨌거나 강사 데뷔 첫날부터 파이논은 영원히 떨어지지 않을 꼬리표 같은 별명을 얻게 되었다: ‘아낙사 교수님의 흰 강아지 강사님’. 이후 나무 정원 익명 게시판에서는 아낙사 선생님과 그의 반려동물에 관한 토론이 자주 이루어지게 된다.

 

[익명] 교수님 강아지한테 간식 줘도 돼요? (댓글: 58)

[익명] 교수님이 강아지한테 손을 달라고 했어요 (댓글: 104)

[익명] 교수님이 오늘 강아지한테 물렸대요 (+사진 추가했어요) (댓글: 1,105)



/선택과목: 드로마스어 회화

  나무 정원에 갓 입학해 누스페르마타 학파에 배정된 학생들은 열이면 열, 백이면… 백 명까지 가지는 못하므로 이 표현은 적절하지 않겠다. 어쨌거나 누스페르마타 신입생이라면 누구나 한 번쯤은 이런 의문을 가져 본 적이 있었다.

  “왜 우리 학파 교과과정에 「드로마스어 회화」가 있는 거지? 다들 왜 이걸 듣고 계신 건가요?”

  신입생들이 고개를 갸웃하고 있으면, 학파 선배들은 으스대며 이렇게 답하곤 했다: “그야 드로마스는 우수하니까.” 그리고 올해부터는 새로운 대답이 추가되었다. “아낙사 교수님과 파이논 강사님이 같이 들어오는 수업이니까.”

  첫째, 그 교수와 강사가 함께 서 있는 모습은 눈이 편안하다.

  둘째,  「드로마스어 회화 I」 수업의 구성은 주로 아낙사 선생님의 강연, 파이논 강사님의 시범이 반반으로 이루어졌는데, 강사의 억양에 조금이라도 틀린 부분이 있거나 충분히 만족스럽지 못하다고 판단하면 아낙사 선생님은 갑자기 학생들로부터 등을 돌려 파이논을 지도하는 것에 온 정신을 집중하기 시작했다. 3년째 드로마스어 회화 I 수업을 재수강 중인 모 학생의 말을 빌리자면,

  “드디어 살았다. 아낙사 선생님이 우리를 드디어 놓아주셨구나.”




/학술적(?) 의견 교류

Q1. 다음은 누스페르마타 현인과 해당 학파의 보조 강사가 우애의 관에서 나눈 토론 내용이다. [보기] 중 옳은 것을 모두 고르시오.

 

강사: 저희 장보기를 공동 연구라고 가정해 볼게요. 제가 강사가 되고 나서 한 가지 배운 게 있다면, 바로 연구비는 무한하지 않다는 겁니다. 그러니 우선순위를 정해야죠.

현인: 그 말에는 동의해. 그리고 드로마스 컵은 정서적 안정이라는 이유로 충분히 포함될 수 있어.
강사: 선생님, 정서적 안정이라는 항목은 조금 전까지 저희 예산 세목에 없었잖아요. 언제 그런 게 추가된 건가요?
현인: 내가 방금 만들었어. ‘학자의 사고는 항상 유연해야 한다.’ 내 가르침을 벌써 잊었나?

강사: 휴…… 그럼 새 드로마스 잠옷은요? 이미 커플 세트로 가지고 계실 텐데요. 유연함의 정의에 ‘여분’이나 ‘중복’이 들어 있지는 않다고 생각합니다.
현인: 아니, 이건 계절에 대응하는 유연함이지. 잘 봐, 이건 겨울용이고 내가 가진 건 여름용이야. 털의 두께와 소재로 계절에 따라 몸집이 달라지는 드로마스의 특성을 표현해냈어. 이건 심미적 요소와 실용성을 모두 만족시키는, 제조업 분야의 빛나는 업적이야.
강사: 선생님 논리대로라면 봄용, 가을용 잠옷도 있어야 할 텐데요.
현인: ……흠.
강사: 선생님?
현인: 맞는 말이야. 장바구니에 그것도 포함해야겠군. 잘했어, 파이논.

강사: 아낙사 선생님!

 

[보기]

① 현인은 새 잠옷을 살 것이다.

② 현인이 새로 살 잠옷의 개수는 짝수이다.

③ 강사와 현인은 동거 중이거나 이에 준하는 관계이다.

④ 강사는 드로마스 잠옷을 반대하는 듯하지만, 사실 현인이 입은 모습이 귀여워서 크게 막을 생각은 없다. 그에게 토론은 선생님과의 사랑의 언어이다.

⑤ 현인은 강사가 “아낙사 선생님!”이라고 외칠 때의 어조, 말투, 표정을 좋아하기에, 당장 필요하지 않아도 사고 싶은 물건을 하나 더 떠올린다. 그것이 그에게 정서적 충만감을 주므로 예산에 포함할 가치가 있다.

 

정답: 모두



/방해금지모드

  오가는 사람들의 시선으로부터 자유로운 나무 정원 한구석, 파이논과 아낙사는 나무 기둥에 기대어 가벼운 낮잠에 빠져 있었다. 정확히는 잠들어 있는 건 아낙사 뿐이고, 파이논은 완전히 잠든 것도, 그렇다고 깨어 있는 것도 아닌 애매한 상태로, 품 안의 아낙사의 어깨가 숨을 쉴 때마다 올라갔다가 내려가는 걸 기적을 목격하는 마음으로 바라보는 중이었다. 아낙사의 다음 수업까지는 아직 한 각이나 시간이 남아있었고, 파이논은 몇몇 학생들의 과제를 봐주기로 한 걸 제외하면 오늘은 다른 업무가 없다.

  산들산들 파이논의 코끝을 간지럽히는 청량함은 바람결에 실려 온 것인지, 아니면 아주 가까이서 느껴지는 것인지 분간하기 어려웠다. 아낙사의 손가락이 잠들기 직전까지 읽던 책의 어느 구절 위를 움찔거리고, 파이논은 그를 한층 더 꼭 껴안아 꿈이 그의 잠을 어지럽히지 않도록 했다.

  저기 멀리서 한 무리의 학생들이 그들을 알아보고 반갑게 손을 흔들며 다가온다. 그러나 ‘강아지 강사님’의 눈길에서 무엇을 느꼈는지 몰라도, 파이논과 시선이 마주친 학생들은 그들의 한때를 방해하지 않기로 결심했다.

  다시 한번 바람이 살랑 불어오고, 파이논은 품 안의 이가 추위를 느끼지 않도록 단단한 방어막이 되어 준다. 그 무엇도 선생님의 단잠을 방해할 수 없었다. 그 무엇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