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낙사는 『내가 쓰는 대로』를 그리 좋아하지 않는다.
이렇게 말하면 사람들은 깜짝 놀라, 아주 터무니없는 의견이라도 들은 것처럼 눈을 동그랗게 떴다. 대부분의 앰포리어스 사람들은 『내가 쓰는 대로』를 사랑한다. 일일이 의견을 물어보고 다닐 필요도 없었다. 어느 도시의 어느 서점을 둘러봐도, 역사서와 문학 코너에서 부동의 1위를 차지하는 건 항상 이 고대 경전이었으니까.
(학자들은 지금, 이 순간에도 이 책을 역사적 사료에 포함할지 말지로 끊임없는 논쟁을 벌이고 있다. 서점 주인들은 그보다는 더 유연한 마인드를 가지고 있어서, 사서 고민하는 학자들보다 더 쉬운 길을 택했다. 뭐 하러 고민하는가? 실제 역사이기도 하고 문학이기도 하다고 인정하면 벌어들이는 수입이 2배인데!)
이 책의 내용을 그렇게까지 즐기지 않는 사람들에게조차 『내가 쓰는 대로』는 중고등학교 교과과정으로 누구에게나 친숙한 텍스트였다. 살면서 누구나 한 번쯤은 ‘난 12영웅 중 누구일까?’라는 인터넷 설문 조사를 해본 경험이 있을 정도로, 『내가 쓰는 대로』는 앰포리어스 사람들의 생활 깊은 곳에 속속들이 자리 잡은 콘텐츠였다.
즉, 아낙사를 처음 만나는 사람은 누구나, 한쪽으로 가지런히 묶은 그의 긴 민트색 머리카락과 가운 위에 착용한 목걸이 명찰의 아낙사Anaxa라는 이름을 보고,
“아낙사가 아니라 아낙사고라스!”
이런 반응을 보인다는 뜻이다. 진부한 표현이지만, 이 말을 들을 때마다 아낙사가 균형의 동전 한 개씩을 받았더라면 지금쯤 저승의 강을 번쩍거리는 동전으로 다 채우고도 남았으리라. 그러면 강 너머 죽음의 자매가 하나씩 주우며 즐거워했겠지. 아니면 저승의 강이 흘러넘쳐 꽃밭을 적실까 봐 전전긍긍했으려나?
청소년 시기엔 하필 민트색 머리카락을 가진 아들에게 이 이름을 붙여 준 어머니 아버지를 조금은 원망하기도 했다. 어른이 된 지금은 어떠냐고? 원망하는 마음은 사라졌지만, 작은 한숨이 새어 나오는 것까진 어찌할 방도가 없었다.
수백, 수천 번은 반복한 이 대사를, 아낙사는 오늘도 내뱉는다.
“제 이름은 아낙사입니다, 아낙사고라스가 아니라.”
아참, 깜빡 잊을 뻔했다. 이 말도 꼭 추가해야지.
“그리고 누나는 잘 지냅니다.”
이런 사정이 있기에 아낙사는 오크마 시립 미술관 개관 111주년 특별전 초대권을 손에 넣었을 때 조금 망설일 수밖에 없었다. 특별전——아마 《사랑의 서곡展》이라는 제목이었던가——의 주제가 『내가 쓰는 대로』를 바탕으로 했다고 들었기 때문이다.
아니, 아낙사는 그 책 자체를 싫어하지는 않는다. 같은 이름을 공유하는 만큼, 분열의 가지, 운명한 학자, 이성의 반신, 대배우, 또…… 아무튼 이명 한 번 화려한 그 영웅이 등장하는 전권을 대학 도서관에서 빌려다 본 적도 있었다. 딱 한 번 뿐이었지만. 읽는 내내 어떤 장면에서는 나름 공감하면서, 또 어떤 장면에서는 나라면 그렇게 하지 않았을 텐데, 하며 그럭저럭 재미있게 읽었다. 하지만 관련 전시회까지 관람하는 건 다소 심리적인 거부감이랄지, 작은 망설임이 생기는 것도 사실이었다.
바쁘다는 핑계로 (실제로 바쁘기도 했고) 차일피일 미루다 보니 어느새 달력에 표시한 초대권 만료일이 다가왔다. 올해 12월은 윤일이 있어 다른 해보다 하루가 더 길다. 『내가 쓰는 대로』에서나 쓸 법한 예스러운 표현을 빌려 쓰자면, 윤일이 있는 12월은 변화의 동전 자그레우스가 기승을 부리는 붉은 기연의 달이라고 한다. 기왕 이렇게 된 거, 아낙사는 올해의 마지막 날을 《사랑의 서곡展》 관람일로 정했다. 그렇게 정하고 연구실 동료들에게 그날 하루 자리를 비울 거라고 통보하자, 후드를 눌러쓴 동료가 알겠다는 듯 씨익 웃는다.
“12월 마지막 날에? 이거 기연의 냄새가 나는데? 흐음, 어디 좋은 사람이라도 생겼나 봐?”
“그럴 리가.”
“아, 그러셔. 하긴, 누가 네 그 차가운 심장을 뛰게 하겠어, 아낙사고라스 씨.”
“아낙사라니까, 사이퍼라.”
모니터에서 눈을 떼지 않고 아낙사가 대꾸한다. 그가 아는 모든 사람들 중에서, 그의 이름을 놀림거리로 삼는 사람 1순위를 꼽으라면 승자는 단연코 사이퍼였다. 그 자신도 이야기 속 계략의 반신과 같은 이름을 가졌으면서, 기회만 있으면 사이퍼는 아낙사의 이름을 걸고넘어졌다. 아낙사고라스 씨, 아낙사-내-이름은-아낙사고라스가-아닌-고라스-씨, 아 모씨, 낙시, 낙샤…… 배리에이션도 정말이지 무궁무진하다. 이름에 어떤 힘이라는 게 있다면, 사이퍼는 분명 계략의 반신의 입담을 물려받은 게 틀림없다고 생각될 정도였다.
미술관 1층 로비는 광력 〇,〇〇〇년의 마지막 날을 미술관에서 보내려는 사람들로 북적북적했다. 아낙사는 AI 큐레이터 (“안녕하세요! 저는 키레네라고 해요. 무엇을 도와드릴까요?”) 의 인도에 따라 특별 전시실로 발을 옮겼다.
안내 책자에 따르면, 《사랑의 서곡展》은 네 개의 테마로 구성되어 있었다.
첫째, 인내하는 사랑.
둘째, 고독한 사랑.
셋째, 마침내 이뤄질 사랑.
넷째, 영원히 기록될 사랑.
모든 작품은 『내가 쓰는 대로』속 장면들을 모티브로 하고 있었으며, 참여한 아티스트 수는 90여명, 작품 수는 정확히 111개에 이른다고 한다. 오기 전에 『내가 쓰는 대로』전체를 예습했다면 훨씬 더 좋았을 것을, 안타깝게도 아낙사의 그 책에 대한 지식은 「아낙사」 부분에 국한되어 있었다. 자연히 아낙사가 알아볼 수 있는 장면도 지극히 제한적이었다.
〈인내하는 사랑〉에서 아낙사는, 이야기 속 「아낙사」가 그 자신의 눈을 잃는 장면을 보았다.
〈고독한 사랑〉에서는, 나무 정원에서 홀로 잠든 불을 훔치는 자를 보았다.
〈마침내 이뤄질 사랑〉에서는…….
종아리가 찌르르 울린다. 아낙사는 점점 섹션마다 사람이 줄어드는 이유를 알 것도 같았다. 다들 다리가 아파서 어디론가 이탈하는 것이다, 혹은 배가 고파져서거나. 그 증거로 이 방에는 아낙사 외에 관람객이 한 명밖에 없었다. 그 유일한 손님 또한 무릎 위에 책을 올려놓고, 소파에 앉은 채로 여유롭게 관람을 즐기는 중이었다. 아낙사는 그로부터 두 자리쯤 떨어진 곳에 다리를 붙이고 앉았다. 그의 눈이 빠르게 남자가 읽는 책 표지를 곁눈질했다.
『내가 쓰는 대로』.
황급히, 아무 그림으로나 아낙사가 시선을 돌렸다. 하지만 충분히 빠르지 않았던 모양이었다. 옆자리 손님으로부터 나지막한 질문이 흘러나왔다.
“정말 훌륭한 전시에요. 그렇게 생각하지 않으세요?”
“네…….”
“이렇게 오래된 작품이 아직도 잊히지 않고, 후대의 손이 계속해서 새로운 이야기를 써 내려가고 있다는 걸 생각하면 가슴이 뭉클해져요. 그야말로 영원히 기억될 사랑이죠.”
“그 책의 팬이신가 보군요.”
“아하. 그렇다면 선생님께선 아니신 모양이네요.”
다른 말투, 다른 웃음소리였다면 아낙사를 기분 나쁘게 하고도 남을 발언이었다. 하지만 남자의 말투와 웃음소리에는 도저히 그를 미워할 수 없는 무언가가 있었다. 아낙사는 도전적으로 고개를 휙 돌려 남자와 얼굴을 마주 봤다. 엷은 미소가 그 잘생긴 얼굴을 지배하고 있었다. 무척 잘 아는 친구에게나 보여줄 법한, 또 한편으로는 처음 만난 상대를 보는 것 같기도 한 미소. 잘 빗어 넘긴 백발에서는 프로의 터치가 느껴졌다. 막연히 아낙사는 그가 모델이거나 영화배우일지도 모르겠다고 생각했다.
“이렇게 만난 것도 인연인데 통성명을 하죠. 저는 파이논이라고 합니다.”
“…….”
“진짜예요.”
“거짓말이라고 한 적 없습니다. 저는 아낙사——”
“진짜요?”
“——고라스가 아니라, 아낙사입니다.”
“누님은 잘 계시죠?”
“그건 왜 물어보시죠?”
남자, 파이논이 어깨를 으쓱한다. 그냥 물어보고 싶었어요, 그 제스쳐가 그렇게 말하고 있었다. 아낙사는 팔짱을 끼면서 얼굴을 돌렸다.
“저는 늘 책을 좋아했어요.”
아. 아직 대화가 끝난 게 아니었나?
“책 속의 등장인물들은 모두 고난을 겪죠. 웃고, 사랑하고, 즐거운 한때를 보내기도 하지만, 행복하기만 한 이야기는 아무도 읽지 않잖아요. 각자 자기에게 주어진 만큼의 고통에 괴로워하면서 앞으로 나아가요.
이야기 속 「파이논」도 마찬가지죠. 그가 가장 밑바닥에 있을 때 저는 그를 따뜻하게 바라봐주고 싶어요. 그가 무너져 내릴 것처럼 보일 땐 제 마음을 졸이면서요. 할 수만 있다면 그 등을 살짝 밀어주고 싶죠.”
“책 속의 이야기에 불과하다는 걸 알면서도?”
“그럼요…… 과연 어떻게 될까 전전긍긍하면서 지켜보다 보면, 어느새 그는 결말을 맞이해요. 그렇게 책을 덮으면 이야기는 끝이 나죠. 그리고 다시 표지를 여는 순간, 아, 또다시 모험이 시작되는 거예요. 수백 수천 수만 번을 읽어도, 제가 이미 결말을 알고 있다고 해도, 이야기가 주는 힘은 변함없어요. 정말 마법 같은 일이 아닌가요?”
파이논의 말이 멈춘 순간, 아낙사는 자신이 그의 목소리에 푹 빠져 있었다는 걸 뒤늦게 깨닫고 깜짝 놀랐다. 하지만 참 듣기 좋은 목소리 아닌가. 비록 소설에 대한 그의 열정에 백 퍼센트 공감할 수는 없어도, 무언가에 대한 순수한 사랑을 피력하고 즐거워하는 모습을 지켜보는 건 기분 좋은 일이었다.
이거 기연의 냄새가 나는데?
사이퍼의 흥분한 목소리가 아낙사의 귓가에서 들리는 듯하다.
“이런, 제가 너무 혼자 길게 떠들었네요. 실례했습니다, 아낙사고라스.”
“아낙사입니다.”
“정말 아낙사고라스가 아닌 거 확실해요?”
“제 출생증명서가 보고 싶다면 그렇게 말씀하시죠.”
“하하하, 그건 아직 너무 이른 거 같은데요. 다음에 기회가 될 때 보여달라고 할게요.”
파이논이 읏차, 하면서 자리에서 일어난다. 긴 팔다리를 쭉 펴며 기지개를 켜고, 의자에 내려놓았던 민트색 목도리도 목에 둘둘 감았다. 그가 갑자기 장난기 넘치는 소년 같은 미소를 짓더니, 자신이 읽던 『내가 쓰는 대로』를 아낙사에게 건넨다. 몇 번을 읽었는지 표지는 너덜너덜하고 강아지 귀처럼 읽던 페이지가 접혀 있다.
“생각이 있으면 읽어보세요.”
그럼 나중에 봐요, 「아낙사」.
그가 손을 흔들며 다음 전시관으로 사라진다. 아낙사는 그가 완전히 시야에서 없어질 때까지 기다렸다가, 울퉁불퉁해진 표지를 조심스럽게 손끝으로 쓰다듬었다. 한 장, 한 장을 넘기다가 아낙사는 책의 원래 주인이 남긴 메모를 맞닥뜨렸다.
XX-XXX-XXXX-XX (제 번호)
카스토리스 씨도 선생님을 다시 만나고 싶대요
추신. 북클럽은 매주 수요일이에요
또 추신. 카스토리스 씨만 만나고 싶어 한 건 아니에요
또다시 추신. 저도 만나고 싶어요, 「당신」을.
팔랑.
메모지가 떨어지고 아낙사는 이유 없는 눈물 한 방울이 볼을 따라 흐르는 것을 느낀다. 그 눈물은 이미 너덜너덜할 대로 너덜너덜해진 빛바랜 책 표지 위로 툭 떨어졌다.
마침내 이뤄진 사랑.
어째서 그 말이 갑자기 머릿속에 떠올랐는지 아낙사는 아직 이해하지 못한다. 이해하지 못한 채, 그는 떨어뜨린 메모를 주워 책 속에 소중하게 끼웠다.
'hsr > hsr' 카테고리의 다른 글
| [파이낙사] 기억 조각 모음 (0) | 2026.02.06 |
|---|---|
| [파이낙사] 엘리사이 에데스에서 온 편지 (0) | 2025.12.05 |
| [파이낙사] 우리 보조강사와 교수님이 그런 사이일 리 없어?! (0) | 2025.11.15 |
| [파이낙사] 중력 피로증 (0) | 2025.10.26 |
| [파이낙사] 제자 관찰 일지 (0) | 2025.09.10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