720번 우편함
다중생명연구소
은하 궤도
테루스 항성계
친애하는 아낙사 선생님,
너무 정중한 표현이라 놀라셨나요?
조만간 아낙사 선생님한테 또 편지를 쓸 거라고 하니까, 제가 임시로 담당하는 저학년 학급의 아이들이 작법서를 선물하더라고요. 아이들 말이, 아낙사 선생님은 어설픈 문장을 쓰는 사람을 거들떠도 보지 않을 거라나요. 그렇다면 전 걱정할 필요는 없을 것 같은데, 그렇지 않나요? 나무 정원 시절 제 작문에 주석을 달아 주신 분이 선생님이신데요. 아무튼 작법서 내용에 따르면 연장자한테 보내는 편지의 첫 문장은 이렇게 여는 법이래요. 친애하는 아낙사 선생님. 존경하는 아낙사 선생님. 그간 잘 지내셨어요?
그런데 작법서를 아무리 뒤져 봐도, 연인에게 건네는 인사말이 어때야 하는지는 알려주지 않더군요. 종이는 이미 준비됐고, 펜촉은 이미 잉크에 적셔 버렸으니, 지금부터는 책의 도움 없이 제게 익숙한 언어로 적어나가는 수밖에요.
사랑하는 아낙사.
밤하늘을 올려다볼 때마다, 선생님이 알려 주신 별자리를 손으로 그려 봐요. 챔피언의 벨트, 가죽을 뒤집어쓴 사냥꾼, 은하수를 가로지르는 물새 떼. 참, 드로마스알자리도 잊어선 안 되죠, 하하.
하지만 그 어떤 별자리도 선생님이 계신 머나먼 위성보다 아름다운 빛을 내지 못해요.
아낙사 선생님. 선생님의 밤하늘도 제 것처럼 아름다운가요?
선생님을 기다리며,
파이논
━━━
개척력으로 석 달에 한 번, 항성계 정기 우편선이 압축 항로를 타고 아낙사가 잠시 몸담은 연구소 도킹 스테이션에 정박한다. 레일을 타고 들어오는 우편선의 외피에는 차갑게 얼어붙은 별 입자가 반짝반짝 빛나고 있어서, 겨울이 긴 행성 출신인 연구원에게는 고향의 혹한을 떠올리게 하는 반가운 손님인 듯하다. 아낙사는 우편선을 구경하러 가는 동료들 사이에 끼지 않고, 단지 우편물 도착 알림이 도착하면 하던 일을 잠시 멈추고 할당된 우편함으로 향할 뿐이다. 발걸음은 너무 서두르지도, 너무 느긋하지도 않게.
720번 우편함 속에서 오늘도 한 통의 편지가 그를 기다리고 있었다. 늘 같은 봉투, 늘 같은 편지지, 늘 같은 필체였다.
봉투를 열면 그 안에는 앰포리어스의 하늘이, 엘리사이 에데스의 밀밭 한 조각이, 온 우주의 어떠한 물리법칙으로도 설명할 수 없는 미지의 원리에 입각하여 고스란히 보존되어 있다. 첫 문장 (“친애하는 아낙사 선생님”) 을 읽자마자 아낙사의 얼굴에 흔히 보여주지 않는 편안한 미소가 떠올랐다. 코끝을 맴도는 밀 향기를 맡으며, 아낙사는 숲에서 불어오는 청량한 바람과, 수확기 동안 볕에 그을렸을 누군가의 단단한 두 팔을 떠올려 본다.
파이논의 편지는 언제나 그렇듯 많은 사람의 목소리를 담고 있었다.
그가 보조 교사로 담당하는 저학년 아이들이 말썽을 부린 이야기. (“제가 선생님의 학생이었을 땐 이 정도는 아니었잖아요. 그렇죠, 아낙사 선생님?”)
아낙사가 돌아오려면 아직 1년이나 남았는데도, 아이들이 아낙사 선생님이 보고 싶다고 매일 노래를 부르고 있어서 달래느라 진땀을 빼고 있다는 이야기.
수확한 햇밀로 자가제분 빵을 만들었는데, 식사 자리에서 아버지가 “너도 이제 다 컸다”며 덜컥 눈물을 흘리는 바람에 파이논도 덩달아 울어 버렸다는 이야기. 너의 그 선생님도 한 입 드셔봤으면 참 좋았을 텐데, 하고 어머니 아버지가 입을 모아 말했다는 이야기.
“빙빙 돌려 말하는 버릇은 여전하네,” 아낙사가 편지를 접으며 중얼거린다. “그래, 나도 보고 싶어, 파이논.”
━━━
720번 우편함
다중생명연구소
은하 궤도
테루스 항성계
나의 아낙사 선생님,
보내 주신 소포와 편지 잘 받았습니다.
물질 합성기로 만든 밀이라니 정말 신기하네요. 마을 어른들께 나눠 드렸는데 모두 신기해하셨어요. 주신 책들은 학교 도서관 장서로 기능할 생각이에요, 아이들이 「인공 생명: 키메라의 존재론적 틀과 메커니즘」을 얼마나 반길지는…… 솔직히 말씀드리자면 미지수만요. 아낙사 선생님이 쓰신 글이라고 하면 그래도 조금은 인기를 얻지 않을까요? 돌아오셨을 때 대출 기록이 적다고 해서 너무 상심하지 마세요. 아마도 제 손에 늘 들려 있느라 남들이 빌려 갈 기회가 없었기 때문일 테니까요.
그런데 진정한 엘리사이 에데스의 농부로서, 여기서 선생님께 감히 한말씀 드리겠습니다. 엘리사이 에데스의 밀은 아시다시피 단순한 작물 그 이상의 의미가 있어요. 파종부터 수확까지, 모든 과정은 사람들의 생활에 밀접하게 닿아 있죠. 물질 합성기가 그 유전 구조와 맛을 복제해 낼 수는 있어도, 마을 사람들, 그리고 제게 있어 이 밀밭이 갖는 의미란……
(이어지는 2페이지 반 생략)
……조금 말이 길어졌네요. 하지만 선생님이 엘리사이 에데스의 밀밭을 위해 해 주신 모든 일들에는 진심 어린 감사를 드립니다. 천외의 종 다양성 센터에 정식으로 품종을 등록해 주신 것도, 개량 아이디어를 주신 것도, 어떻게든 천외 세계에 엘리사이 에데스의 이름을 알리려고 노력해 주신 것까지, 모두 다요.
사랑을 담아
파이논
━━━
카오스라나
엘리사이 에데스 마을
앰포리어스
은하 궤도
안녕,
이 편지가 엘리사이 에데스에 도착했을 무렵이면 이미 내가 탄 비행선이 우리의 별에 도착한 뒤겠지. 성운이 많이 끼지 않았다면 예정보다 더 빨리 도착했을지도.
돌아가는 짐을 정리하면서 깨달은 거지만, 그간 엘리사이 에데스 소인이 찍힌 편지가 제법 많이 쌓였더군. 그러고 보니 언젠가 내 쪽에서 보는 밤하늘이 아름답냐고 물어본 적이 있었지. 늦었지만 그 물음에 대한 답을 들려주자면, 그래, 내가 보는 밤하늘은 아름다워. 왜냐하면 나의 하늘을 빛내는 건 무수히 많은 별들 가운데서도 가장 밝게 빛나는 태양이니까.
그간 천외의 연구소에서 많은 걸 배웠어. 돌아가면 다시 옛 제자들을 소집할 생각이야. 네게도 들려주고 싶은 말이 많지만, 직접 만나서 하면 되니까 이만 짧게 줄이지.
엘리사이 에데스의
아낙사고라스
━━━
4년 반만의 천외 파견 근무를 마치고, 아낙사는 밤손님처럼 조용히 엘리사이 에데스의 선착장에 나타났다.
아무도 몰래 깜짝선물처럼 등장할 생각이었다면, 그건 아낙사의 천재적인 두뇌가 작은 마을의 정보력을 얕본 셈이다. 배고픈 매처럼 눈이 밝은 아이들은 이미 멀리서부터 아낙사 선생님을 알아보고 제자리에서 폴짝폴짝 뛰어오르고 있었다.
“누가 가서 파이논 형을 불러와!”
“파이논 선생님이라고 해야지!”
“파이논 선생님, 파이논 선생님!”
와아아 소리를 지르며 아이들이 밀밭으로 달려갔다. 아이들의 작은 손에 이끌려 작업복 차림의 파이논이 허둥지둥 선착장으로 달려온다. 밀짚모자 아래, 여름날의 더위보다는 흥분으로 달아오른 청년의 뺨이 발그레하다.
한 걸음, 두 걸음, … 어느새 달리기 시작한 아낙사가 그 품에 전력으로 안긴다. 소중하게 챙겨 온 짐가방이 바닥을 구르지만 아낙사는 자기 손이 손잡이를 놓은 줄도 몰랐다. 파이논은 조금도 휘청하는 기색이 없이 익숙하게 그를 받쳐 들고 몇 바퀴를 빙글빙글 돌았다.
“어서 오세요, 선생님!”
엘리사이 에데스에 또 한 번 수확의 달이 돌아왔다. 올해의 수확은 전에 없이 풍작일 것이다.
여기서부턴 잡담
이래놓고 분명히 매일매일 영상통화 했을 겁니다 자기들은 진짜 너무 아련한데 주변에서 볼 때는 거기 두 분 매일 영통하고 세 달에 한 번씩 손편지도 교환하고 4년 반동안 할 거 다 하신 것 같은데요.. 라고 한 마디 하고 싶어지는 게 포인트
항성계 이름은 지어냈습니다 테루스는 고전 그리스어로 여름의/수확(물)의 라는 뜻입니다 더 정확히는 여름, 작물을 뜻하는 θέρος의 1인칭 genitive case입니다 너무나 파낙한 단어라고 생각해서 빌려왔습니다
'hsr > hsr' 카테고리의 다른 글
| [파이낙사] 사랑의 대화 (0) | 2026.03.07 |
|---|---|
| [파이낙사] 기억 조각 모음 (0) | 2026.02.06 |
| [파이낙사] Besides, I still have you, don’t I? (0) | 2025.11.29 |
| [파이낙사] 우리 보조강사와 교수님이 그런 사이일 리 없어?! (0) | 2025.11.15 |
| [파이낙사] 중력 피로증 (0) | 2025.10.26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