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hsr/au

[파이낙사] (AU) 인어 프로젝트





프롤로그
스틱시아 인어 전설의 유래를 찾아서


바다로 둘러싸인 도시국가 스틱시아가 언제부터 인어 전설의 고향으로 불리게 되었는지, 그 기원을 정확히 거슬러 올라가는 일은 쉽지 않다.

스틱시아의 뱃노래 가사에 아주 오래전부터 인어의 꼬리지느러미가 물살을 가르는 모습이 등장해 왔다는 사실¹), 그리고 고대 스틱시아의 벽화에 지느러미 달린 인간들이 여럿 묘사되어 있다는 점²)을 고려하면, 늦어도 광력 2,000년대 무렵에는 이미 앰포리어스 사람들의 관념 속에서 스틱시아 앞바다는 인어들이 모여드는 바다로 자리 잡았던 것이 분명해 보인다.

가장 널리 알려진 전설로는 인간 폭군의 이상에 감화되어 스스로 뭍에 올랐다는 인어 공주의 이야기를 빼놓을 수 없다. 전설 속 인어 공주는 연회장의 현보다도 날카로운 검술과, 그 자신이 지닌 예리한 동물적 감각을 무기로 삼아 기사 칭호를 받았고, 끝내 폭군의 곁을 지키는 충신이 되었다고 전해진다.

비록 스틱시아가 인어의 본고장처럼 받아들여지기는 하나, 인어에 관한 전승이 이 지역에만 존재하는 것은 아니다. 다른 연안 도시나 외해를 오가는 항해자들 사이에서도 ‘꼬리가 달린 인간처럼 보이는’ 존재에 대한 이야기들이 산발적으로 보고되어 왔다. 전해 내려오는 전설들을 종합해 보면, 인어라는 존재는 다음과 같은 몇 가지 공통된 특징을 지닌다:

첫째, 그들은 자신의 의지로 바다를 떠나 인간의 모습을 취할 수 있다. 이에 따라 인간과 인어를 가르는 생물학적 선은 극히 모호한 것으로 인식되었음을 알 수 있다.
둘째, 인어는 일단 운명의 상대를 정하면 죽음이 갈라놓을 때까지 함께해야 한다. 그 운명을 먼저 떠나보내거나 이를 거부한 인어의 말로가 어떠한지는, 지역 전설에 등장하는 한 인어 청년의 비극적 결말 (아침 해와 함께 황금색 물거품이 되어 사라졌다는) 을 통해 짐작해 볼 수 있을 것이다³).

¹) 폴리카르포스, 『황금 시대 전설』, V.
²) 단편, 15.
³) 에우폴리아, 『엘리사이 에데스 인어 이야기』, 134a 1.

 

 

 현재, 겨울
아낙사의 연구실

 

아낙사 선생님의 연구실은 예전과 크게 달라지지 않았다. 달라진 부분이 있다면, 책더미의 판본이 최신 개정판으로 바뀌었고, 모니터가 새것으로 교체되었다는 점 정도일 것이다. 시간이 얼마나 흘렀든 이 공간에 들어서는 순간 다시 학생으로, 지금보다도 더 미숙하여 선생님의 지도가 절실했던 그 시절로 돌아간 기분이 들었다. 그리고 그것은 결코 나쁜 기분이 아니었다. 카스토리스는 무릎 위에 얌전히 손을 포개고 숨을 깊게 들이마신 뒤, 조심스럽게 첫 마디를 꺼냈다.

“아낙사 선생님, 저 요즘 새 글을 준비하고 있어요.”

옛 지도 교수의 시선이 그녀를 스쳤다. 카스토리스는 그 짧은 침묵이 질문이라는 걸 알고 있었다. 시선에 힘입어 카스토리스는 설명을 계속한다.

“전설 속 인어들에 대해서요.”

“…….”

“그래서 자료를 모으고, 자문을 구하려고 해양 전문가들을 찾아다녔어요. 처음에는 다들 반갑게 맞아 주셨는데, 인어라는 말을 꺼낸 순간 갑자기 입이 무거워지시더라고요.” 그녀는 숨을 고르기 위해 잠시 말을 멈췄다가 속삭이듯 덧붙였다. “오직 한 분만이 참고할 만한 답을 주셨답니다. 제게 그럴 의지가 있다면, 아낙사 선생님을 찾아가서 이렇게 말해 보라고 하셨어요.”

「2년 전 스틱시아에서 무슨 일이 있었는지 알려주세요.」

아낙사의 입가가 움찔했다. 하고 싶은 말들이, 잊어본 적 없는 기억들이 그의 마른 입술에 걸렸다.




2년 전 여름
스틱시아

 

원통형 수조 안에 들어 있는 그 인어를 처음 본 순간 아낙사는 그것이 세상에서 가장 아름다운 생명체라고 생각했다.

수조는 가로 폭이 약 2m, 높이는 그것의 약 1.5배 정도로, 투명한 실험용 실린더를 거대화시킨 듯한 모습이었다. 물속에서도 잠들 수 있는지 인어의 눈은 꼭 감겨 있었고 꼬리는 유연 운동을 하는 것처럼 계속해서 조금씩 살랑거렸다. 어쩌면 많은 해양 생물들과 비슷하게 뇌의 반은 수면 상태로, 나머지 반은 기상 상태로 잠들어 있는 걸지도 모른다.

드러난 상반신은 인간 남성과 크게 다르지 않은 구조를 하고 있었다. 어깨선은 넓고, 팔은 길게 뻗어 있었으며 근육은 과시적이라기보다는 물속 생활에 맞게 단단히 잡혀 있었다. 가슴에는 가느다란 황금색 선으로 반원 형태의 문양이 새겨져 있었는데, 수중 호흡에 맞춰 미세하게 그 빛이 일렁였다. 마치 물속으로 비쳐 들어오는 태양 빛처럼. 아낙사는 인어의 목에서도 비슷한 색깔의 표식을 발견했다. 후천적인 장식이라기보다는 태어날 때부터 가지고 있었던 어떤 생물학적 표식에 가까워 보였다.

상체만 보면 미술관에 전시되어야 할 완벽한 인간 남자의 표본으로 보이지만, 허리 아래부터는 사정이 달라진다. 골반에 해당하는 지점부터 점진적으로 촘촘한 비늘이 피부를 덮었다. 꼬리는 상반신에 비해 훨씬 크고 길었으며, 몸 전체 길이의 대부분을 차지했다. 비늘 색은 등 쪽으로 갈수록 짙어지고 복부 쪽은 상대적으로 옅은 빛을 띠었다. 근육이 수축하고 이완할 때마다 꼬리의 굵기가 미묘하게 변했다. 얼핏 보면 말랑해 보이지만, 이 꼬리야말로 인어 근육의 정수라고 할 수 있는 부분이었다.

그 압도적인 생명력 앞에서, 아낙사는 저도 모르게 입이 살짝 벌어졌다.

“아름답죠?”

수조동 관리 직원이 어느새 다가와 씩 웃으며 말한다. 아낙사는 힘차게 움직이는 꼬리지느러미에서 억지로 시선을 떼어, 인어의 목에 달린 검은 목걸이 같은 장치를 가리켰다.

“저건 뭐지?”

직원이 장치를 흘끗 보더니 말했다. “고주파 억제 장치입니다.” 인간의 가청 영역 바깥의 고주파를 사용하는 인어의 소통 방식은, 안타깝게도 수조의 유리를 깨거나 연구소 반경 수십 킬로미터의 전자기기를 못 쓰게 만들 만한 강력한 힘을 가지고 있었다. “그러니 목소리를 못 내게 할 수밖에요.”

저 목걸이를 쓰게 되게까지 몇 번의 시행착오가 있었음을 짐작하게 하는 말투였다. 아낙사는 말없이 고개를 끄덕이고는 다음 질문을 던졌다.

“이름은 뭔가?”

“네? 저요?”

“인어의 이름 말이야.”

“아아, 그거요. 저희끼리는 4호라고 부르기는 하는데, 교수님이 인어의 고주파를 인간 언어로 해석할 수 있게 되면 저희한테도 좀 알려주세요. 참, 그러고 보니 생각난 게 있는데, 4호를 처음 발견한 선원이 붙여준 별명이 있었어요. 뭐였더라, 파이, 파이논?”

“파이논.”

차가운 수조 표면에 손을 얹고 아낙사가 나지막이 중얼거렸다. 그 순간 잠들어 있던 인어가 반짝 눈을 떴다. 그는 넓지 않은 수조 속을 한 바퀴 유영하여 아낙사와 눈높이를 맞췄다. 자유자재로 움직이는 지느러미가 조금 파르르 떨린다. 남들 앞에서 인정하기엔 과학자답지 않은 부끄러운 고백이지만, 아낙사는 물에 비친 하늘을 닮은 그 새파란 눈동자야말로 이 세상의 것이 아닌 아름다움이었다고 생각한다. 인간과 인어는 투명한 가림막을 사이에 두고 그렇게 수 초간 서로를 마주 보고 있었다.

이것이 아낙사와 파이논의 첫 만남이었다.

 

스틱시아 해양 연구소는 탈라세이아 군도의 두 번째로 큰 섬에 자리 잡은 스틱시아 정부 주도 연구 기관이었다.

“그 역사는 120년을 거슬러 올라간다고 해,” 라는 게 그가 속한 연구 분과 책임자의 말이었다. 책임자는 환영식을 겸해서 건물 내부를 투어해주겠다며 처음 출근한 아낙사를 끌고 연구소를 누비고 다녔다.

연구소는 섬에서도 파도가 가장 먼저 부딪히는 해안 절벽 위에 세워져 있었다. 연구소 건물은 전부 다 해서 4개. 행정과 연구원이 함께 쓰는 본관 연구동, 천장이 유난히 높은 수조·실험동, 그리고 바다 쪽으로 가장 가까운 기술동이 나란히 자리하고 있었다. 기숙사는 연구 구역에서 조금 떨어진 곳에 따로 세워져 있어, 근무가 끝나면 연구원들은 다시 바닷바람을 등지고 그쪽으로 걸어가야 했다. 엄밀히 말해 연구소의 경계는 여기서 끝난다.

군도 제2의 섬이라는 말이 무색하게도, 연구소 밖으로 나가는 순간 섬에는 주민들의 생활감이랄 게 빠져 있었다. 시내까지 차를 끌고 가면 식료품 가게나 보트 대여소, 낚시용품점 등이 서로 거리를 둔 채 드문드문 늘어서 있었다. 어느 가게나 흰 페인트를 바른 벽이 바닷바람을 맞아 보기 싫게 벗겨져서 관리 부족을 여실히 드러내고 있었다. 못 보던 얼굴이 나타나면 가게 주인들은 먼저 의심의 눈초리부터 건네고 봤다. 연구소를 중심으로 한 편안한 고립감이 섬을 지배한 것이다.

대외적으로 이곳은 평범한 해양 연구소로 알려졌지만, 실제로는 인어 프로젝트, 즉 인어의 보호와 연구 목적으로 세워진 기관이었다. 따라서 이곳에 출입하는 인력은 첫날 어김없이 비밀 유지 각서에 서명하도록 안내받는다. 아낙사는 자신 앞에 놓인 각서를 내려다보고, 우아하게 펜을 한 번 돌렸다. ‘보호’와 ‘연구’ 중 어느 쪽에 방점이 찍혀 있냐고 아낙사가 묻자, 그가 속한 연구 분과의 책임자인 세르세스는 묘한 미소를 지으며 대답을 회피했다.

핵심 연구진은 선임 연구원과 책임 연구원이 14명, 전임 연구원은 30명. 아낙사는 세르세스에게 이끌려 타 분과에 인사를 다니던 중에 그처럼 프로젝트 중반에 합류하는 케이스가 매우 드문 일이라는 걸 알게 되었다. 마침내 그들의 분과 연구실에 도착하자 세르세스는 두 사람뿐인 심심한 분과에 자진해서 발을 들인 그를 두 팔 벌려 환영했다. 아낙사는 상사이자 유일한 분과 동료인 세르세스의 열정을 공유해 주지 않았다. 대신 비뚤어진 연구실 명판—NCI 유닛(Neuro-Cognitive Interaction Unit)—을 수평이 맞도록 바로 세웠다. 해당 연구 분과의 최우선 과제는 비교신경과학적 관점에서 인어의 뇌파를 분석하고 의식 구조를 연구하여, 궁극적으로는 인류와의 교감 가능성을 이끌어내는 것이었다.

연구원 외에는 잠수와 표본 채집을 위한 현장 조사팀이 20명 남짓, 기술 스태프 10여 명, 의무팀은 그보다 소수여서 대여섯 명 정도. 이 밖에도 행정과 보안 등 비연구 인력이 상주하고 있지만 거기서부터는 아낙사의 자료 열람 권한 밖의 일이다.

이 섬과 군도 내 다른 섬의 주민들에게, 연구소는 유일한 자랑거리이면서 동시에 고용주였다. 섬 아이들은 자라서 자신 앞에 놓인 선택이 단 두 가지뿐이라는 사실을 알게 된다. 섬 밖으로 나가거나, 섬 안에서 어떤 방식으로든 연구소의 일원이 되거나. 누군가는 섬 곳곳에 세워진 해수 처리 타워의 관리 직원이 되기도 하고, 또 누군가는 늘 일손이 모자란 연구소의 용역 인부로 고용되기도 했다.

이 정도의 인력이 전원 연구소 기숙사에서 숙식하고 있는 것은 아니고, 스틱시아가 고향인 사람 중에는 정기선을 타고 다른 섬을 오가는 사람들도 있는 듯했다. 연고 없이 연구소로 오게 된 아낙사는 처음부터 기숙사를 신청했다. 매일같이 보트를 타고 출퇴근하는 상상을 하면 벌써 뱃멀미가 올라올 것 같았다(말이 정기선이지, 실상은 8인승 미니 보트다). 게다가 아낙사는 수영을 할 줄 몰랐다. 물에 빠지면 지나가던 인어가 구해 줄 거라는 낭만적인 기대를 할 만큼 아낙사는 로맨티스트가 아니었다.

 

첫날 근무는 연구소와 인근 투어만 하다 끝났다. 많이 걸은 탓에 녹초가 됐지만, 그럼에도 간밤에 아낙사는 쉽게 잠에 들지 못했다. 피로가 전혀 가시지 않은 채 아낙사는 아침을 맞이했다. 기숙사 문을 나서자 여름임에도 제법 차가운 바닷바람이 얼굴을 스치며 조금 머리가 상쾌해졌다. 아낙사는 목을 한 번 풀었다. 아직 완전히 깨어나지 않은 섬은 조용했고, 연구동 쪽으로 이어진 길만 희미하게 등이 밝혀져 있었다.

난간 쪽으로 다가가 바다를 내려다보니 잔잔한 수면 아래에서 파도가 겹겹이 밀려왔다. 아아, 그래. 이 소리다. 바로 이 소리 때문이었다. 파도가 노래하는 이 소리가 지난밤 아낙사의 꿈속에까지 따라 들어와 한동안 잠을 이루지 못했다.

안개 낀 바다는 새삼 넓고 낯선 세계로 보였다. 아낙사는 잠시 멍하니 서서, 파도가 절벽 쪽으로 밀려왔다가 부서지는 일련의 과정을 지켜본다. 딱히 급한 일정이 있는 건 아니었다. 아직 맡은 일도 없었고, 세르세스도 당분간은 자료 열람이라도 하면서 자유롭게 시간을 보내라고 했었다. 멀리 안개를 가르고 아침 해가 조금씩 얼굴을 드러낼 즈음, 그는 시선을 거두고 연구동 쪽으로 이어진 길을 따라 천천히 걸음을 옮겼다.

 

4호라는 이름에서 알 수 있듯이 파이논은 이 스틱시아 해양 연구소의 네 번째 인어 프로젝트였다. 즉, 이전에 세 마리의 인어가 이 연구소에 포획, 아니, 보호되었다는 뜻이었다.

그 일련의 기록을 아낙사는 차례로 열람하기 시작했다.

인어 1호는 지금으로부터 무려 120년 전, 우연히 한 어부의 낚시 그물에 걸리면서 스틱시아 해양 연구소가 세워지는 계기를 만들었다. 장비도, 인어에 관한 기반 연구도, 모든 게 전무했던 탓에 1호는 수질 부적응으로 수조 속에서 이른 죽음을 맞았다.

2호는 그로부터 약 40년 후 스틱시아 영해 기준선을 아슬아슬하게 넘어선 곳에서 목격되었다. 당시 조사팀은 끊임없이 고주파 신호를 보내 인어를 스틱시아 기선 12해리 안으로 끌어오는 데 성공했다. 2호는 식음을 전폐하던 끝에 영양 부족으로 사망했다고 기록되어 있었다.

프로젝트 2호의 쓰디쓴 실패를 맛본 후 50년 만에 발견한 3호는 수질도 영양도 모두 해결된 상태로 최장기간 생존을 기대받던 스타 인어였다. 성품도 굉장히 쾌활했다고 기록이 말하고 있었다. 이 쾌활한 스타 인어 덕분에 해양 연구소는 기존에 알지 못했던 인어의 습성에 관한 귀중한 정보 하나를 얻게 되었다. 인어 한 마리의 목숨을 대가로 알게 된 사실은, 번식기를 맞은 인어는 짝을 찾지 못하면 죽어버린다는 것이었다.

 

——자료를 열람하던 아낙사는 이 대목에서 잠시 스크롤을 멈췄다.

그렇다면 파이논은, 수조 속에서 아름답게 잠들어 있던 그 인어의 미래는 어떻게 되는 거지?

인어의 번식기라는 게 정확히 어떤 주기로, 어떻게 찾아오는지는 모르지만, 파이논은 지금 당장 생산 활동에 뛰어들어도 이상할 게 없는, 젊고 활기찬 인어로 보였다. 짝을 찾아 인어의 번식까지 연구하는 게 가장 이상적이겠지만, 몇십 년 간격으로 한 마리 발견할까 말까 하는 인어의 개체 수를 고려해 본다면 현실적인 계획이라고 하긴 어려웠다.

만약 저 인어에게 내일이라도 당장 번식기가 찾아온다면, 연구소는 그를 살리기 위해 바다로 돌려보낼까?

그럴 리가.

이곳은 해양 연구소이며, 인어 생태계 보호지구가 아니다. 처음부터 ‘보호’와 ‘연구’ 중 방점은 단연코 후자에 찍혀 있었다.

아낙사를 프로젝트 중반에 뒤늦게 합류시킨 이유도 이제야 납득이 갔다. 어차피 시한부일 거라면 죽기 직전에, 혹은 죽고 나서 뇌를 열어 봐도 늦지 않다. 혈액, 근육, 발성 기관, 생식 기관 같은 일차적인 목표에 비하면 인어의 뇌는 그 우선순위가 뒤로 밀리는 덜 매력적인 분야일 수밖에 없었다. 세르세스의 연구 분과가 이처럼 조촐한 인원으로, 창고나 다름없는 골방에 연구실을 배정받은 이유가 거기에 있었다. 일찌감치 아낙사를 불러 올 메리트가, 연구소의 결정권자들에게는 하등 없었다.



현재, 겨울
아낙사의 연구실

 

툭.

카스토리스의 손에서 볼펜이 떨어지는 소리가 유달리 크게 울렸다. 어쩔 줄 몰라 하며 카스토리스가 얼른 바닥을 구르는 펜을 주워든다.

“죄송해요, 선생님. 계속해주세요.”

“……눈이 오려나 보군.”

여전히 먼 곳을 보는 시선으로 아낙사가 창밖을 본다. 아닌 게 아니라 아침부터 잔뜩 끼어 있던 흐린 구름이 이제는 잿빛으로 물들어 있다. 금방이라도 질척한 눈이 내릴 것 같은 하늘을 보는 아낙사의 옆모습은 카스토리스로서는 이해할 수 없는 그리움을 담고 있었다.





2년 전 여름
스틱시아

 

살날이 얼마 남지 않은 존재에 대한 동정이라고 해도 좋다. 아낙사는 과거 프로젝트의 기록을 열람한 날 이후로 틈만 나면 자리에서 일어나 수조동으로 향했다.

연구동과 수조동을 잇는 연결 통로는 늘 조용했다. 어디선가 희미한 기계음이 섞여 들여오고 습해진 공기에 물냄새가 섞이면 거기서부터가 수조동이었다.

수조동 안쪽으로 들어서면 동선은 자연스럽게 두 갈래로 갈라졌다. 한쪽은 제어실과 실험실로 이어졌고, 다른 쪽 끝에 수조 구역이 있었다. 아낙사는 늘 후자를 택했다. 걸음을 옮길수록 천장 층고가 높아지고, 물이 순환하는 묵직한 소리가 더욱 또렷해졌다. 마지막 보안문을 지나면 조명이 낮게 깔린 수조실이 모습을 드러냈다. 유리 너머로 출렁이는 물결과 그 안에 잠긴 실루엣이 언제나 그를 그 자리에서 멈추게 했다.

보안문을 열고 들어온 상대가 아낙사임을 확인하자마자 파이논이 반가움의 표시로 지느러미를 흔들어댔다.

“안녕, 파이논.”

늘 앉는 구석 자리에 노트북을 내려놓고 아낙사가 인사를 건넸다. 오늘은 세르세스에게 붙잡혀 별 쓸데없는 얘기를 듣느라 조금 늦고 말았다. 바다낚시 동호회가 어쩌고저쩌고, 수영 강습 교실이 새 회원을 받는다던데 어쩌고저쩌고. 끝도 없이 쏟아지는 수다를 피해서 급하게 수조동으로 향하느라 머리를 정돈할 시간조차 없었다. 아낙사는 손목에 끼워 둔 머리끈을 빼서 흘러내린 머리를 묶었다. 문득 강렬한 시선이 느껴져 그는 얼굴을 들었다. 조금 떨어진 원통형 수조 안에서 파이논이 눈을 동그랗게 뜨고 이쪽을 바라보고 있었다.

“왜 그래?”

파이논이 다섯 손가락을 오므렸다가 펴고, 또 오므렸다가 펴는 동작을 반복한다. 뭘 하는 거지? 아낙사는 흥미 반 걱정 반으로 인어의 행동을 살폈다. 파이논은 몇 번 더 손을 접었다 폈다 하다가 이번에는 물속에서 흩날리고 있는 자기 머리카락을 어색하게 쓸었다.

‘혹시 내가 머리 묶은 걸 따라 하는 건가?’

당연하지만, 머리끈 없이는 따라 해봤자 아무 의미 없는 행동이었다. 파이논은 제 손을 내려다보더니 실망한 기색으로 물방울을 뿜었다.

“누구한테나 처음은 있는 법이야. 그래도 잘했어, 손을 제법 잘 쓰던데.”

부드럽게 말하며 아낙사가 유리에 손을 짚었다. 조심스럽게, 그들 사이에 차가운 벽이 존재하지 않는 것처럼, 파이논이 손을 맞댄다. 묵직하게 자신을 응시하는 인어의 눈동자에서 아낙사는 어떠한 메시지를 읽었다고 확신했다. 의인관(anthropomorphism)의 오류에 빠진 것이 아니다. 머리를 묶는 행동을 따라 한 것도 그렇고, 파이논은 분명히 아낙사와 소통하려는 의지가 있었다. 인간으로서, 과학자로서, 인어의 말을 아직 이해할 수 없는 게 답답할 따름이다. 그러니 그의 의도를 넘겨짚는 잘못을 저지르는 대신, 아낙사는 조용히 파이논과 눈길을 나누는 걸로 응답하고자 했다.

잠깐의 평화는 문 바깥에서 누군가가 카드 키를 태그하는 소리가 들리며 깨져버렸다. 아낙사는 등 뒤로 손을 치우고 수조에서 급히 멀어졌다.

“어, 아낙사 교수님. 여긴 어쩐 일이세요.”

문을 열고 들어온 수조동 직원이 아낙사에게 인사를 건넨다. 기숙사 식당에서 한두 번 마주친 적 있는 사이였다. 수조실에서 「파이논」 이라는 이름을 알려 줬던 직원도 이 사람이었다. 직원의 목걸이형 출입증을 슬쩍 곁눈질하고 아낙사가 태연한 얼굴로 이름을 불렀다.

“빕사니아.”

“혹시 교수님도 땡땡이치러 나오셨어요? 여기 조용해서 낮잠 자기 딱 좋죠. 4호도 저렇게 얌전하고. 정말 넋 놓고 물 구경하기 최적의 장소라니까요…….”

그랬던가? 직원의 말에 아낙사가 고개를 살짝 갸웃했다. 파이논은 아낙사가 나타나면 먼저 유리 벽을 콩콩 치고, 그래도 반응이 없으면 수조를 위아래로 왕복하면서 관심을 끌려고 했다. 아낙사의 입에서 끝내 “가만히 있어”라는 말이 나올 때까지. 그러면 시무룩한 듯이 몸을 둥글게 말고 물속을 둥둥 떠다닌다. 인어 기준으론 성체에 해당한다고 들었는데, 하는 짓은 꼭 어린아이 같아서 묘하게 귀엽다고 생각하던 참이다.

“파이논이 그렇게 얌전하다고?”

“그야 뭐…… 하루 종일 거의 잠만 자잖아요.”

아무래도 파이논의 평소 행동 양상은 아낙사에게 보여준 것과 현저히 다른 듯했다. 무언가에 홀린 기분으로 아낙사는 빕사니아에게 고개를 끄덕여 보였다. 모르는 척, 물속에서 파이논이 자신의 백발을 손가락에 감고 있었다.

 

물론 파이논이 언제나 늘 같은 자리에서 아낙사가 찾아오기만을 기다리고 있는 건 아니었다. 분과 연구실을 몰래 빠져나오니 그의 수조가 텅 비어 있는 날도 적지 않게 있었다. 하루, 이틀 정도 허탕을 치다 보면 인어는 다시 모습을 드러냈지만, 그럴 때마다 그는 몸을 웅크리고 아낙사를 알은체하지 않으려고 했다. 피부는 평소보다 창백했고 가슴과 목의 문양도 평소의 반짝임을 잃었다.

파이논이 수조에서 옮겨지는 동안, 그는 어딘가의 실험실에서 연구 재료가 되어 있었을 것이다. 그를 실험동으로 옮기기 위한 장비들, 즉 의료용 카트와 습윤 시트, 간이 수조 탱크 같은 것들을 아낙사는 몇 번이나 봐왔다. 돌아온 파이논이 흰 연구원 가운을 입은 아낙사를 보고 싶어 하지 않는 이유도 어렵지 않게 짐작이 갔다.

“괜찮아.”

괜찮아, 괜찮아.

그것이 파이논에게 하고 싶은 말인지, 아니면 스스로에게 들려주는 말인지는 아낙사 자신도 분간하기 어려웠다. 아낙사는 수조에 등을 기대고 바닥에 주저앉았다. 인공 해류 속 인어는 공처럼 말았던 몸을 펴고 두둥실 떠오르더니, 과학자의 곁을 계속 맴돈다. 그러곤 팔을 넓게 벌려 아낙사의 떨리는 어깨를 감싸는 듯한 행동을 취했다.

“괜찮아.”

가까이서 보니 인어의 눈가가 조금 붉어져 있었다. 하지만 물속에서는 저 눈에서 눈물방울이 흘렀다고 해도 분간할 방법이 없었다.

2년 전 가을
스틱시아

 

여름날의 열기가 가신 어느 날, 파이논의 상태가 조금 이상하다는 걸 제일 먼저 발견한 사람은, 물론 그 방에서 시간을 가장 많이 보내는 아낙사였다. 연락받자마자 곧장 달려온 의무팀은 인어의 상태를 꼼꼼히 진찰한 끝에 이렇게 결론지었다.

“사람으로 치면 근육통 같은 거예요. 아닌가, 지느러미통이라고 해야 하나?”

의무팀 직원은 수조를 두 번 치면서 친근하게 중얼거렸다. 평소에 그렇게 얌전하더니, 대체 뭘 하다가 지느러미통이 올 지경이 된 거야, 4호? 그 말을 듣고 아낙사는 차마 고개를 들지 못했다. 이렇게 고백할 수는 없지 않은가. ‘파이논이 일주일 만에 나타난 아낙사를 보고 너무 반가운 나머지, 평소의 네 배 이상 꼬리지느러미를 흔들다 근육통이 왔다’고.

(이 가여운 인어를 무려 일주일이나 방치했다고 해서 아낙사를 너무 탓하지는 말자. 아낙사도 최대한 노력해 봤지만, 인어 말로 ‘감기’, ‘일주일’, ‘병가’에 해당하는 고주파가 뭔지 모르는 이상, 파이논이 알아듣게 설명할 방안은 없어 보였다.)

근육통, 아니, 지느러미통이 온 파이논을 더 이상 좁은 수조에 방치할 수는 없었다. 상태를 완전히 회복할 때까지는 예비 해류 풀로 옮기는 게 좋겠다는 결론이 났고, 연구소 전 부서가 이동 준비에 들어갔다.

문제는 단순한 거리 이동이 아니었다. 수직 상태에서 지탱되던 수압이 수평으로 급격히 분산될 경우, 인어의 신체에 상당한 스트레스가 가해진다. 육체적인 부하에 급작스러운 환경 변화까지 겹치면, 아무리 4호처럼 온순한 개체라 해도 예상치 못한 반응을 보일 가능성이 있었다. 마취제를 쓰자는 의견도 있었지만 여러 가지를 고려해 기각되었다. 최대한 자극을 줄이려는 방안의 하나로 그동안 4호와 비교적 자주 접촉해 온 스태프들이 현장 요원으로 소집되었다. 물론 아낙사도 그 명단에 포함되어 있었다.

습윤 시트로 온몸을 감싼 파이논은 성인 남성 세 명이 동시에 힘을 써야 겨우 들어 올릴 수 있을 만큼 무거웠다. 꼬리에만 두 명이 달라붙었다. 팽팽한 긴장 속에서 그들은 파이논을 조심스럽게 예비 풀 안으로 흘려보냈다. 바닥 배수구에서 수위 조절 장치가 가동되는 낮은 소리가 울려 펴지고, 물 높이가 서서히 조정되었다. 파이논은 처음에는 몇 차례 시험하듯 꼬리를 움직이더니, 이내 물살을 가르며 자연스럽게 수평 이동을 시작했다. 여기저기서 환호와 탄성이 터져나온다.

그때였다. 갑작스레 첨벙 소리를 내며 파이논이 풀 가장자리로 상반신을 내밀었다. 모여 있던 현장 스태프들은 본능적으로 한 발씩 뒤로 물러섰다. 파이논은 아랑곳하지 않고 군중 가운데 단 한 명, 아낙사만을 똑바로 바라보았다. 그러고는 몸을 몇 차례 뒤집어 자기 꼬리지느러미를 연신 물 밖으로 드러냈다.

“이제 안 아프다는 거지. 알았어.” 아낙사는 얼굴에 튄 물을 닦으며 담담하게 말했다. “알았으니까 물 그만 튀기고, 저쪽으로 가. 너 때문에 축축해졌잖아.”

스태프들은 어리둥절한 얼굴로 서로 시선을 주고받았다. 4호가 여태껏 저렇게까지 적극적인 반응을 보인 적이 있었던가? 그것도 과학자를 상대로?

그날 이후 아낙사는 공식적으로 파이논의 ‘핸들러’로 지정되었다. 겉으로는 귀찮은 일을 떠맡았다며 투덜거렸지만, 세르세스는 잘 알고 있었다. 그가 정말로 참지 못해 투덜거릴 때와, 내심 마다하지 않으면서 말로만 꿍얼거리는 소리는 분명히 다르다는 것을.





2년 전 겨울
스틱시아

 

겨울이 되자 연구소 주변의 바다는 색부터 달라졌다. 계절 변화를 반영하여 예비 풀의 수온이 내려가고 이에 맞춰 파이논의 활동 반경 또한 자연스럽게 줄어들었다.

아낙사의 핸들링은 그사이 눈에 띄게 안정되어 있었다. 아니, 주위 사람들이 하는 수 없이 아낙사의 방식을 인정했다고 하는 게 더 정확한 표현이겠다. 풀 가장자리로 다가가는 아낙사의 발걸음은 언제나 거침없었고, 수면에 바짝 달라붙으면서도 두려움을 드러낸 적이 없었다. 그런 아낙사에게 익숙해질 대로 익숙해진 보안 요원들은 핸들링 시간이 되면 슬그머니 자리를 비웠다. 담배라도 피우러 가는 걸까. 파이논은 깊은 곳에서 유유히 잠영하다가, 그의 발소리를 알아차리자마자 수면 위로 올라왔다. 이제는 별다른 신호가 없어도 그는 아낙사 근처로 물살을 정리하며 바짝 다가왔다.

아낙사가 손을 내밀자, 파이논이 전신을 기울여 검사받기 쉬운 자세를 취했다. 아낙사는 곧바로 체온이 차단된 특수 장갑을 착용하고, 조심스럽게 파이논의 몸에 손을 댔다. 인간의 체온이 인어에게 자극이 될 수 있었기에 맨손으로 접촉하는 일은 엄격히 금지되어 있었다. 얇은 장갑 막 너머로 아낙사는 비늘의 촘촘한 배열과 움찔거리는 근육 윤곽 하나하나를 확인하듯 더듬어 보았다. 파이논은 눈을 꼭 감고 참을성 있게 그 접촉을 받아들였다. 각도에 따라선 손길을 즐기는 것처럼 보이기도 했다.

“다 됐어”라는 말이 떨어지자마자 파이논이 얼른 물속으로 풍덩 뛰어들었다. 공기에 노출되는 게 싫어서가 아니라, 일부러 장난을 거는 것이다. 아낙사는 익숙하게 몸을 돌려 파이논이 일으킨 거대한 물보라로부터 일지를 보호했다. 아무렴 똑같은 수에 몇 번이나 당할 리가. 처음 파이논이 이 장난을 친 날엔 아무런 대비도 하지 못하고 아낙사는 머리끝부터 발끝까지 푹 젖어 버렸다. 물론 손에 들고 있었던 일지도 예외는 아니었다. 물벼락을 맞은 아낙사가 이게 대체 무슨 일인가 이해하려고 노력하는 동안, 파이논은 성대를 까득까득 울리는 독특한 웃음소리를 내며 즐겁다는 듯이 물속을 빙빙 돌았다.

그 후로 파이논은 틈만 나면 같은 행동을 반복하려고 했다. 핸들러를 골탕 먹인 게 그렇게나 만족스러웠던 모양이다. 아낙사는 아낙사대로, 같은 장난에 몇 번이고 당할 순 없다는 오기가 생겼다. 이제 일지에는 방수 커버가 씌워졌고 아낙사는 같은 문장을 몇 번이고 다시 써야 하는 귀찮은 작업에서 해방되었다. 오늘 관측한 사실을 적어 내려가던 아낙사는 마지막 문단에서 잠시 펜을 멈췄다.

 

개체명 「파이논」, 전반적으로 양호한 건강 상태를 유지 중. 특기할 만한 사항으로 흉부와 목 부근의 금색 문양이 이전보다 눈에 띄게 짙어짐. 최근 조명이나 수질 변화가 없었기에 환경에 기인했다고는 보기 어려움. 계속해서 추적 관찰이 필요……

 

아낙사는 펜 끝을 종이에 댄 채 한동안 움직이지 않았다가, 조심스럽게 다음 문장을 적어 나갔다.

 

……또한 행동 양상에 변화를 보임. 핸들러의 존재를 인식하면 자발적으로 물 밖으로 나오는 행동을 반복함. 신체 접촉(예: 등을 기댐, 손을 맞잡음)을 갈구하고 있음……

 

아낙사가 일지를 덮고 잠깐 눈을 감았다. 머릿속을 퍼뜩 스친 가설은 섣부른 판단처럼 느껴지기도 하고 동시에 명확한 답처럼 보이기도 했다.

번식기.

아낙사는 인어의 번식기에 대해 그가 알고 있는 모든 정보를 떠올려 본다. 연구소 아카이브에 따르면, 3호, 즉 번식기를 놓쳐 사망했던 그 인어는 최후의 순간에 겉모습이 조금 달라졌다고 한다. 전신이 더 짙은 색을 띠었다던가. 하지만 고작 한 건의 기록된 사례만을 가지고는 그게 그 인어만의 특징이었는지, 아니면 번식기를 맞은 모든 인어에게 공통되는 사항인지 판단 내리기 어려웠다. 다만 최근 아낙사가 관측한 사실들이 정말로 인어의 번식기를 알리는 증거였다면, 그렇다면 파이논의 미래는…….

쫘악.

그는 일지의 마지막 장을 거칠게 뜯어냈다. 이건 단지 확실하지 않은 가설을 잠시 보류하는 과정에 불과하다. 그런 말로 아낙사는 자신을 설득하려 했다. 마지막 페이지를 뜯어 버리자 남은 것은 아무 맛도 없는 밋밋한 문장이었다.

개체명 「파이논」, 전반적으로 양호한 건강 상태를 유지 중.


그날도 평소와 크게 다르지 않은 점검 일정이었다. 겨울이 깊어지면서 파이논의 활동은 전반적으로 줄어 있었고, 가을 내내 관광객처럼 몰려들던 연구소 사람들도 한겨울이 되자 더 이상 풀 주변에 나타나지 않았다. 그렇게 유난히 조용한 아침, 아낙사는 장갑을 끼고 풀 가장자리로 다가가, 늘 하던 대로 파이논의 상태를 확인하려 했다.

파이논은 이미 수면 가까이 올라와 있었다. 물기 맺힌 백발이 그의 이마에 달라붙어 있다. 아낙사는 잠시 망설이다가 파이논을 향해 손을 뻗었다.

바로 그때였다.

아낙사의 수십 배는 강한 팔힘이 그의 손목을 단단히 붙잡았다. 반사적으로 몸을 뒤로 빼려 했지만, 파이논의 손아귀에 잡힌 순간 이미 때는 늦었다. 중심을 잃은 아낙사의 몸이 풀장 안으로 기우뚱 떨어졌다.

차가운 수온이 단숨에 옷 속을 파고들었다. 아낙사는 숨을 들이켤 틈도 없이 물속으로 끌려 들어갔다. 손목이 붙잡힌 채 그는 있는 힘껏 반항했다. 그러자 이번에는 파이논의 긴 꼬리가 자신보다 체구가 훨씬 작은 아낙사의 전신을 휘감는다. 더 깊이, 물속 더 깊은 곳으로. 파이논이 아낙사를 끌고 풀장 바닥으로 헤엄쳐 갔다.

깊은 물 속은 소리부터가 바깥과 달랐다.

첨벙거리는 소음은 납작하게 눌려 사라지고, 둔탁한 진동만이 고막을 두드렸다. 물이 아낙사의 귀와 코안으로 밀려 들어왔다. 숨을 참으려 했지만 애초에 타이밍을 놓쳤다. 본능적으로 공기를 찾아 폐가 수축하지만, 7미터의 수심에서는 헛된 희망일 뿐이었다.

시야가 흐려지면서 파이논의 몸에 그려진 금색 문양이 물속에서 희미하게 번져 보였다. 아낙사는 자기 몸에 대한 컨트롤을 완전히 잃어버렸다.

‘파이논, 난, 수영을 못 한단 말이야…….’

그렇게 말하려고 했지만 실제로는 물방울을 뱉을 뿐이었다. 그다음은 아무것도 기억나지 않는다.

 

눈을 떴을 때, 가장 먼저 느껴진 것은 비일상적인 고요였다.

그리고 그는 숨을 쉬고 있었다.

그 사실을 아낙사는 한 박자 늦게 인식했다. 숨을 참고 있는 게 아니다. 평소처럼 산소를 들이마시고 있지도 않은데, 가슴이 자연스럽게 오르내리고 있었다. 과학자의 심장이 요동쳤다.

‘말도 안 돼.’

덜컥 몸을 움직이자 손가락 사이로 물이 부드럽게 갈라졌다. 이게 정말 현실일까? 시야 또한 맨눈이라고 믿을 수 없을 만큼 선명했다. 피곤할 때면 종종 보조 안경에 의지해야 했던 물 위 세상보다도 오히려 투명하게 느껴질 정도다. 아낙사의 눈동자가 모든 것을 빠짐없이 담았다. 수조 바닥의 타일 무늬. 미세한 기포. 천장 조명의 일렁거림, 그리고——바로 앞에서 아낙사를 걱정스럽게 바라보는 파이논.

‘…송해요, ……어요.’

‘뭐라고?’

‘죄송해요, 참을 수 없었…요.’

아낙사는 두개골을 울리는 공명에 얼굴을 찡그렸다. 비유하자면 이어폰을 귀에 꽂고 있다가, 실수로 볼륨을 최대까지 올렸을 때 같은 느낌이라고나 할까. 게다가 뭐가 문제인지, 주파수가 맞지 않는 심야 라디오 방송처럼 지직거리기까지 했다. 주파수라고 하니 아낙사의 머리에 반짝 떠오르는 아이디어가 있었다. 그는 손을 뻗어 파이논의 목에 단단히 고정된 고주파 억제 장치를 풀었다.

‘다시 말해 봐. 단, 이번엔 조금 목소리를 낮춰서. 너 때문에 머리가 울려서 기절할 지경이야.’

슬그머니 거리를 좁힌 파이논이 아낙사와 이마를 맞대었다. 따스하게 그를 감싸는 파이논의 애정 어린 감정과 함께, 낯선 장면들이 아낙사의 시야 위로 섞여 들었다. 그 감각은 뇌에 직접 영사기를 쏘는 것과 비슷했다. 이것이 인간이 여태 밝혀내지 못한 인어의 진정한 언어 체계일까? 고주파 이론이 얼마나 얄팍한 것인지 깨닫고 아낙사는 속으로 웃음을 터뜨릴 수밖에 없었다. 고주파라니. 인어의 소통은 그런 단순한 게 아니었다. 이건 감각의 공진이자 시야의 공유였다. 고주파는 그 부산물에 불과했다. 인어는 전신을 활용한 완전한 교감을 통해 상대와 하나가 되는 능력이 있었다.

이제껏 파이논이 느껴 왔던 감각 덩어리들이 순식간에 아낙사 안으로 밀려 들어왔다. 수면 밖에서 일렁이는 민트색 실루엣. 체온. 장갑 너머로 전해지는 은근한 압력. 일지를 가리던 동작. 깜짝 놀라 떨리던 입술. 젖은 머리칼에서 떨어지던 물방울. 겨울. 이 시기의 물은 몹시 차갑다. 짝을 전제로 한 시기. ‘원한다’는 감정.

‘이건…….’

‘조금만 더요.’

갑자기 장면이 휙 전환되었다. 이번에는 낯선 바다가 아낙사의 머릿속에 펼쳐진다. 바닥은 고운 모래였다. 그 위로 오후의 햇빛을 받아 반짝이는 파이논의 물그림자가 길게 늘어졌다. 그가 이곳을 알고 있다는 감각이 선명했다. 이 바다는 그의 것, 그가 태어난 고향이었다.

파이논의 감정이 흘러넘쳐 아낙사의 가슴을 가득 채웠다. 그것은 감히 인간의 부족한 언어 체계로 표현할 수 없는 압도적인 그리움이자 갈망이었다. 이 바다의 어디로 가야 신선한 해초가 있는지, 어느 바위가 소중한 것을 숨기기에 가장 적합한지, 파이논은 속속들이 알고 있다. 수면으로 두둥실 떠올라 낮잠을 즐기면 지나가던 바닷새가 그의 탄탄한 몸을 의지해 그 위에서 지친 날개를 접고 휴식한다. 마치 그 모든 순간을 파이논의 곁에서 함께해왔던 것처럼, 아낙사는 모든 걸 생생하게 느낄 수 있었다.

그 감정이 채 가라앉기도 전에, 갑자기 물 밖에서 소란스러운 외침이 들려오기 시작했다.

“여기다! 이쪽이야!”

“4호를 분리시켜!”

공명이 미세하게 흔들렸다. 곧이어 잠수부 하나가 안으로 뛰어들며 큰 물살을 만들었다. 강한 팔이 아낙사의 몸을 우악스럽게 붙잡아 당겼다. 수면으로 끌려가면서, 아낙사는 반사적으로 파이논 쪽을 돌아보았다. 물속에서라면 누구보다 빨리 움직일 수 있는 주제에 그는 아낙사가 다른 인간들 손에 구조되는 걸 허망하게 바라보고만 있었다. 아니, 그게 아니다. 손을 뻗기는 했지만, 여기서 힘겨루기에 들어가는 순간 아낙사가 다치게 된다는 걸 본능적으로 이해하고 자제한 것이다.

‘역시 너는, 지나치게 착해.’

공기가 폐로 밀려 들어오며 아낙사는 터져 나오는 기침과 함께 몸을 웅크렸다. 사방에서 쏟아지는 소음이 머리를 어지럽게 했다. 수면 아래의 고요에 비하면, 바깥세상은 너무나도 시끄럽다.

“의식 확인해!”

“교수님, 괜찮으세요?”

누군가가 담요를 덮어 주고, 또 다른 누군가는 아낙사의 목과 어깨를 고정했다. 온몸이 덜덜 떨려 왔다. 그제야 아낙사는 자신이 얼마나 오랫동안 물속에 있었는지 실감할 수 있었다.

“맥박 괜찮습니다. 저체온증이 의심되지만 호흡은 정상이에요.”

“들것 준비해.”

“자, 하나, 둘.”

아낙사의 몸이 조심스럽게 들어 올려졌다. 들것 위로 옮겨지는 동안 그는 동공이 커진 멍한 눈으로 천장을 바라보았다. 아직도 눈을 감으면 저 멀리 오후의 바다와 그 아래서 흔들리던 파이논의 황금색 그림자가 떠오를 것만 같았다.

 

의무실로 실려 온 아낙사는 정밀 검사를 받지 않겠다고 고집을 부렸다. 담당의는 몇 차례 설득을 시도했지만, 더 밀어붙여 봤자 이 고집불통을 상대로는 소용없다는 걸 깨닫고 결국 두 손을 들어 올렸다.

“그럼, 검사는 일단 보류하겠습니다. 오늘 하루는 여기서 주무시고,” 아낙사가 무언가 말하려 하자, 의사는 단호하게 말을 끊었다. “아뇨, 이건 권고가 아니라 지시입니다. 당분간은 반드시 안정을 취하세요. 출근일랑은 생각하지도 마시고.”

신신당부를 남긴 뒤, 의사는 아낙사의 침대 주위에 커튼을 쳤다. 곧이어 딱 하며 스위치를 누르는 소리와 함께 머리맡의 조명이 꺼졌다. 방 안이 한밤중처럼 어두워졌다. 그렇게나 오랜 시간이 지난 걸까? 살짝 열린 문틈으로 복도 불이 희미하게 새어 들어온다. 멀지 않은 곳에서 의료 스태프들이 낮은 목소리로 잡담을 나누고 있었다.

“—충격이 꽤 컸나 봐.”

“그럴 만도 하지. 물속에 엄청 오래 있었잖아.”

“아니, 난 정신적인 충격이 더 크다고 봐. 4호를 그렇게나 예뻐했는데, 저런 일을 당했으니—”

참지 못하고 아낙사가 커튼을 거칠게 젖혔다. 철제 연결고리가 레일을 긁으며 거슬리는 소리를 냈다. 실내화를 신고 아낙사가 침대에서 내려왔다. 그리고 1인실 문을 단단히 잠가버렸다.

말소리가 끊기자 마음도 한결 차분해졌다. 벽을 더듬더듬 짚어 가며 아낙사는 거울 앞에 섰다. 그리고 하나둘, 상의 단추를 천천히 풀어 내려간다. 환자복이 소리도 없이 바닥에 떨어지고 거울 속 실루엣은 어렴풋한 형태로만 보일 뿐이었다. 그 마른 몸 위로, 가는 선들이 기하학적인 무늬를 그리며 퍼져 있었다. 드러난 팔뚝을 따라, 갈비뼈 아래로, 등허리 밑으로…… 그 선들은 그가 숨을 내쉴 때마다 살아 있기라도 한 것처럼 계속해서 일렁거렸다.

마치 파이논의 흉부와 경부에서 빛나던 그 표식처럼.

가설들이 아낙사의 머릿속에서 어지럽게 엉켰다.

번식기의 인어와 직접적으로 접촉한 것이 그의 신체에 변화를 일으켰을 가능성. 그 변화가 일시적인 반응인지, 아니면 영구적인 것인지에 대한 문제. 비교적 장기간 인어에게 노출된 탓에 호르몬 체계에 교란이 생겼을 가능성도 배제할 수 없었다. 혹은 파이논이 그 안에 잠들어 있던 어떤 유전적 형질을 자극했을 대담한 가능성까지. 문득 인어가 스스로 뭍에 오르면 인간과 겉모습이 같아진다는 여러 지역 전설들을 떠올리고는, 아낙사가 고개를 세차게 저었다.

지금은 그런 동화 같은 이야기를 생각하고 있을 때가 아니다. 어느 쪽이든 지금 당장 가설들을 검증할 방법은 없었다.

“……하.”

짧은 한숨이 새어 나왔다. 아낙사는 더 이상 생각을 붙잡아 두지 못하고 베개 위로 풀썩 몸을 맡겼다. 침구에서는 병동 특유의 지나치게 정제된 냄새가 났다. 문득 이 방에서는 파도 소리가 들리지 않는다는 생각을 마지막으로, 그는 서서히 잠에 빠져들었다.

 

며칠 뒤 아낙사는 아무 일도 없었다는 듯 연구소로 복귀했다. 출입 기록을 찍자마자 습관처럼 그의 발걸음이 풀장으로 향했다. 하지만 입구가 폐쇄되어 있었다. 사건 현장처럼 노란 테이프가 덕지덕지 붙었고, 위협적인 출입 금지 팻말이 통행을 가로막았다.

이런 조치가 취해질 것쯤은 당연히 예상해야 했는데. 어째서 평소처럼 파이논이 물살을 가르고 그를 맞이하러 올 거라고 생각했는지 모르겠다. 아낙사는 얼굴을 굳히며 그의 연구 분과가 있는 연구동으로 서둘러 걸었다.

“얼굴이 왜 그렇게 창백해? 또 감기라도 걸렸나 봐?”

오랜만에 모습을 드러낸 아낙사를 보고 세르세스가 농담처럼 말을 던졌다. 일부러 가볍게 던진 말 속에서 아낙사는 어렴풋이 진심 어린 걱정을 느낄 수 있었다. 그나저나 감기에 걸린 건 사실이라, 그는 툴툴거리면서 고개를 끄덕일 수밖에 없었다. 세르세스는 턱끝까지 올라온 아낙사의 하이넥 풀오버 차림을 흘끗 보더니, 이제 막 생각났다는 듯 말을 이었다.

“아, 4호 말인데.”

“파이논.”

“그래, 그래. 네가 돌보던 그 아이.” 손을 휘저으며 세르세스가 말을 고쳤다. “네가 실려 가고 얼마 안 있다가 원래 있던 수조실로 돌려보내졌어. 위에서 결정이 내려왔나 봐. 앞으로는 풀장에 둘 수 없대.”

“그렇군.”

짧은 대답이었다. 세르세스는 아낙사의 반응을 살피다 덧붙였다.

“출입증은 갖고 왔지? 이제는 그게 없으면 머리카락 한 올도 못 들여보내게 할 기세야.”

“쓸데없는 참견이야, 세르세스.”

그러면서도 그는 책상 위에 내려두었던 출입증을 집어 들었다. 청회색 풀오버 위로 목걸이형 카드 키를 걸고, 아낙사는 아무 말 없이 자리에서 일어났다.

 

수조실은 세르세스 말마따나 이전과는 확연히 다른 분위기였다. 보안 인력이 넷으로 늘어 있었고, 입구를 지키던 요원은 아낙사를 알아보고 길을 비켜주면서도 전과 달리 사무적인 태도를 유지했다. 그들 중 한 명이 낮은 목소리로 경고했다.

“접촉은 자제해 주세요. 자극하지도 말아 주시기 바랍니다.”

수조실 중앙에 놓인 거대한 원통형 장치는 조명이 낮춰진 탓에 이전보다 더 깊고 어둡게 보였다. 사방이 조용한 탓일까, 아낙사의 구두 굽이 바닥을 때리는 소리가 유달리 크게 울렸다. 소리에 반응하여 파이논이 빙그르르 몸을 돌렸다. 그가 수조 벽에 몸을 바짝 붙이고 반갑게 아낙사를 맞이한다. 입꼬리가 올라간 표정은 핸들러로서 아낙사가 가르친 트릭 중 하나였다. 한마디 말없이도 반가움을 드러낼 수 있는 아주 간단한 트릭.

다시금 파이논의 목에 채워진 장치를 보자 아낙사의 심장이 살짝 조여들었다. 새 장치는 이전보다 훨씬 크고 무거워 보였다. 금속판이 두꺼워졌고 고정 장치도 늘어났다. 아낙사는 수조 앞으로 천천히 다가갔다. 그리고 풀장에서 파이논이 했던 것처럼 이마를 가져다 댔다. 한겨울의 유리가 그의 머리를 차갑게 식혀주었다.

잠시 눈을 감고 아낙사는 기다려 본다. 하지만 기대하던 공명은 일어나지 않았다.

아낙사가 다시 눈을 떴을 때 파이논은 여전히 그를 보고 있었다. 계속 공명을 시도하기 위해 그가 이마를 콩콩 부딪친다. 그 순진한 기대감을 마주한 순간, 아낙사의 마음속에서 복잡하게 이어지던 계산식들이 한 줄로 정리되었다.

“네게 자유를 돌려주겠어.”

그는 낮게 중얼거렸다.

과학자로서 아낙사는 자신에게 일어난 이 기묘한 유전적 변화, 설명되지 않는 현상을 규명해야 했다. 그게 그의 의무이자 권리였다. 그러나 이를 위한 모든 가설과 연구는 하나의 전제가 필요했다.

공명은 혼자서는 일어나지 않는다. 공명의 한쪽 점이 사라지는 순간, 아낙사의 연구는 갈피를 잃는다.

그가 무사히 연구를 마치기 위해선, 파이논은 반드시 살아 있어야만 했다.

 

보안 요원을 정면으로 뚫는 건 불가능했다. 처음부터 그 가능성은 진지하게 고려하지도 않았다.

총이라도 있다면 모를까, 맨손으로는 1:1의 상황이 와도 제압할 수 없다는 걸 아낙사는 아주 잘 알고 있었다. 그런데 4:1이라니. 기적이 일어나서 어떻게든 아낙사가 수조실 앞의 그 네 명을 처리했다고 치자. 과연 그가 제때 파이논을 수조동 밖까지 끌고 나갈 수 있을까? 그 사이 보충 인력이 달려올 가능성은? 성인 남자 여럿이 낑낑거리고 파이논을 옮겼던 기억을 떠올리며, 아낙사는 이 루트를 머릿속에서 완전히 지워 버렸다.

자, 그렇다면 어떻게 하면 좋을까.

아낙사는 손깍지를 끼고 생각에 잠겼다. 파이논을 데리고 나갈 수 없다면, 파이논이 알아서 나오는 순간을 기다리기만 하면 된다.


화물용 엘리베이터 출입문이 묵직한 소리를 내며 닫혔다. 숫자판의 층수가 천천히 실험동 꼭대기 층을 향한다.

엘리베이터 안에는 시트가 덮인 의료용 카트와 이를 나르는 직원 두 명이 있었다. 한 명은 카트 손잡이에 기대서서 휴대 단말기를 훑고 있었고, 다른 한 명은 카트 반대편에 붙어 섰다. 두 사람 다 방수 장비 위로 마스크와 고글까지 갖춰 쓰고 있어 얼굴은 전혀 보이지 않았다.

단말기를 확인하던 남자가 문득 고개를 돌리고 다른 직원에게 말을 걸었다.

“신입이야?”

상대가 말없이 고개를 끄덕였다. 이 새로운 직원은 체구가 작아 보호 장비가 유달리 커 보였다. 대화는 더 이어지지 않고 어색한 침묵이 흘렀다. 붙임성 없는 사람이 걸렸네, 남자는 그렇게 생각하며 눈을 돌렸다.

문이 열리자 남자의 신호에 맞춰서(“하나, 둘”) 두 사람이 카트를 밀기 시작했다. 카트 바퀴가 엘리베이터 틈에 살짝 걸렸다가 덜커덩하면서 어렵사리 빠져나왔다.

“생각보다 무겁지?”

툭 던진 말에 몸집 작은 신입이 힘을 더 주었다. 체구에 비해 밀어붙이는 힘이 의외로 안정적이다. 카트가 쏠리지 않고 곧게 앞으로 나아가자 고참 쪽에서 감탄했다는 듯 휘파람을 불었다.

“오오, 힘 좋네.”

그는 단말을 열고 오늘의 배달 일정을 다시 훑었다. 먼저 603호로 갔다가 410호. 끝나면 다시 수조실로——

“아, 젠장.”

남자가 쯧 하고 혀를 찬다. 수조실을 나설 때 분명 인계 서명을 받았던 것 같은데, 다시 단말을 확인해 보니 서명 칸이 비어 있었다. 어쩌다 이런 실수를 했는지 모르겠다. 요즈음 이래저래 보안이 강화된 탓에, 새로운 절차가 늘어나서 깜빡 잊은 모양이었다. 그가 곤란해하는 걸 눈치채고서, 신입이 말을 걸었다.

“여긴 내가 지키고 있을 테니까 다녀와.”

마스크 너머로 흘러나온 목소리는 침착하고 낮았다. 남자는 잠깐 망설였다. 배달 중엔 2인 1조로 움직이는 게 원칙이었다. 하지만 여긴 통제 구역이고, 잠깐 수조실에 갔다 오는 정도로 무슨 큰 문제가 생길 것 같지는 않았다. 게다가 이 신입은 제법 믿음직스럽고. 이깟 서명 하나 때문에 일정이 꼬이거나, 운 나쁘게는 직업을 잃기라도 한다면 정말 억울한 일이 아닌가.

“그럼 부탁할게.”

버튼을 누르자 이 층에 머물러 있던 엘리베이터가 다시 열렸다. 남자는 허겁지겁 안에 올라탔다. 서서히 좁아지는 엘리베이터 문틈으로 카트에 손을 얹고 얌전히 기다리는 신입의 모습이 비쳤다.

 

엘리베이터 문이 닫히기가 무섭게 아낙사는 카트를 덮은 시트를 홱 걷었다. 파이논은 물 밖에 오래 있을 때 종종 그렇듯 인지능력이 다소 저하된 모습이었다. 그럼에도 보호구로 무장한 아낙사를 어떻게든 알아보고 반가움의 증거인 미소를 보여준다.

아낙사의 심장이 미친 듯이 방망이질했다. 그가 프로그래밍한 대로 잘만 움직여 준다면 엘리베이터는 수조실에 도착하기 직전인 지하 1층에서 갑자기 고장을 일으켜 멈출 것이다. 단 5분이라도, 아니, 1, 2분이라도 좋다. 아낙사는 시간을 그의 편으로 만들어야 했다.

가장 먼저 할 일은 파이논의 목에 달린 장치를 푸는 것이었다. 장치에는 고주파를 억제하는 기능뿐 아니라 트래커가 심겨 있어서, 이대로 움직인다면 나를 따라와 달라고 광고하는 거나 마찬가지였다. 한시가 급했지만 예상보다 잠금이 튼튼했다. 아낙사는 답답한 마음에 장갑을 벗어 던졌다. 그가 낑낑대며 매달리는 걸 지켜보던 파이논은 목걸이에 손가락을 걸어 안쪽에서부터 장치를 비틀었다.

투둑. 이음쇄가 부서지고 목걸이는 허망할 정도로 가볍게 끊어졌다. 아낙사는 숨을 들이마신 채 굳어 있다가, 이윽고 완전히 흥분해서는 미친 사람처럼 웃음을 터뜨렸다.

“잘 했어, 파이논!”

아낙사는 부서진 장치를 복도 저편으로 깊숙이 차 넣고, 카트 손잡이를 움켜쥐었다. 카트가 복도를 달렸다. 처음에는 조심스럽게, 점점 속도가 붙으며. 외부로 통하는 유일한 엘리베이터 앞에 도착했을 때 아낙사는 숨도 고르지 않고 버튼을 눌렀다. 문이 열리자마자 그는 망설임 없이 카트를 밀어 넣었다. 카트가 덜컥이면서 파이논이 조그맣게 낑낑거린다. 아낙사는 그를 달래듯 머리를 토닥거렸다.

 

미리 주차해 놓은 SUV에 파이논을 태우는 건 결코 쉬운 일이 아니었다.

파이논의 몸은 물 밖에서 지나치게 무거웠다. 문틀에 그의 어깨를 몇 번이나 부딪히고서야 간신히 뒷좌석에 파이논을 밀어 넣을 수 있었다. 그나마도 그가 적극적으로 협조하지 않았다면 아낙사는 밤새도록 여기서 씨름하고 있었을지도 모른다. 제법 넉넉한 SUV 뒷좌석으로도 파이논의 긴 꼬리를 모두 담는 건 무리였다. 아낙사는 그를 비스듬히 눕힌 뒤, 꼬리를 접도록 유도했다. 그나마 아슬아슬 문을 닫을 수 있을 정도가 되자 아낙사가 담요를 끌어와 뒷좌석을 단단히 덮었다.

출발 전 마지막 단계로 아낙사는 고글과 마스크, 보호 장비를 벗어던졌다. 담요 속에서 파이논이 고개를 쏙 내밀더니 아낙사의 탈의 과정을 신기하다는 듯 구경한다. 얼굴을 살짝 붉히고 아낙사가 인어의 눈을 가렸다.

“이럴 땐 눈을 감는 거야.”

아낙사는 운전석에 올라타 문을 닫았다. 시동을 걸고, 천천히 차를 움직였다. 주차장에서 보안 검색대까지 가는 길이 이토록 길게 느껴진 적은 처음이었다. 최대한 손이 떨리지 않도록 애쓰면서 출입증을 찍는데, 경비업체 직원이 까딱하며 그를 불렀다.

“교수님.”

심장이 터질 듯이 뛰었다.

“—연휴 잘 보내세요.”

그제야 아낙사는 지금이 연말 연휴라는 걸 떠올렸다. 완전히 잊고 있던 사실이었다. 그는 짧게 고개를 숙여 인사를 하고 액셀을 밟았다.

SUV는 그대로 차단기를 지나 바깥으로 향했다. 후방 거울로 뒷좌석을 살피니 담요에 둘러싸인 파이논의 실루엣이 미세하게 꾸물거렸다. “조금만 참아”하고 그가 타이르듯 말한다. 익숙한 교차로에서 아낙사는 가보지 않은 길 쪽으로 핸들을 꺾었다. 목적지는 바다. 인적 드문 바다이기만 하면, 어디든 좋았다.

 

겨울 바다는 아낙사가 생각했던 것보다도 훨씬 차가웠다.

파이논의 상태는 물에 닿자마자 확연히 달라져서, 무력하게 늘어져 있던 몸은 완전히 생기를 띄었다. 아낙사는 그를 붙잡고 더 바다 깊은 쪽으로 천천히 이끌어나갔다. 유리 벽이나 차단 장치로 가로막히지 않은 물속에서는 공명이 훨씬 쉽게 일어났다. 인어의 즐거움과 기대감이 물을 통해 찌릿하게 전달됐다.

아플 정도로 차가운 바닷물 속에서, 파이논의 몸은 유달리 따뜻했다. 원래라면 약간 서늘해야 할 피부가 지금은 아낙사의 얼어붙은 손을 녹일 만큼 열을 품고 있었다. 변화는 그것만이 아니었다. 꼬리의 색도 미묘하게 짙게 변했다. 창백하던 머리칼 또한 희미하게 노란 기운을 띠고 있었다. 굳이 생물학자가 아니더라도, 그가 완전히 번식기에 접어들었음을 짐작할 수 있었다.

점점 더 바다 깊은 곳으로 향하자, 아낙사의 발이 바닥을 짚지 못하고 허우적거렸다. 그를 돕듯이 파이논이 두 손을 맞잡는다. 손가락끼리 엇갈리고, 두 사람의 이마가 가까워졌다. 입술이 닿을 듯 말 듯한 거리에서 아낙사는 중얼거렸다. 네가 하고 싶은 걸 해. 뜨거워진 복부 비늘이 아낙사의 하체에 바짝 닿았다. 더는 참을 수 없다는 듯이 파이논이 가슴을 들썩였다.

……자료에도 없는 인어의 생식을 두 눈으로 목격하게 될 줄은 몰랐다. 심지어 적극적으로 참여하게 될 줄이야.

그러나 돌이켜 생각해 보면, 세상에서 가장 아름다운 이 생명체와 처음 만난 그 여름날을 기점으로, 아낙사의 삶은 이미 기존과는 다른 궤도를 걷기 시작했을지도 모른다. 그리고 아직 가보지 않은 영역을 향해, 그의 인생은 항해를 멈추지 않을 것이다.

 

차로 돌아온 아낙사는 젖은 옷을 벗어버리고 담요를 둘둘 둘렀다. 누가 볼지도 모른다는 걱정은 애초에 하지도 않았다. 이를 딱딱 맞부딪히며 그가 히터 온도를 최대한으로 올렸다.

마지막 순간까지 파이논은 어째서 제 짝이 자신을 따라 해류 길에 오르지 않는지 이해하지 못했다. 짝을 부르는 구슬픈 고주파가 파도의 노랫소리에 섞였다. 아낙사는 차가운 파도가 발목을 스치는 위치에 서서 떠나는 파이논의 그림자를 배웅했다. 파이논의 도움 없이는 저 소리에 어떻게 응답해야 하는지 아낙사는 알지 못했다. 그것은 이미 그가 잃어버린 본능이었다.


스틱시아의 수많은 해안과 이름 없는 군도, 바닷물이 닿는 곳이면 어디나 인어의 전설이 전해 내려온다. 전설 속에서 인어는 자유롭게 물살을 가르기도 하고, 또 스스로 뭍에 올라 인간들 사이에 섞여 살기도 했다.

아낙사는 그것에 자신의 희망을 맡겨 보기로 한다. 그 동화 같은 이야기에 실낱같은 진실이 숨어있을 거라고 믿고 싶다.

그들은 반드시 재회할 것이다. 파이논이 앰포리어스를 반 바퀴 거슬러 오는 한이 있더라도, 언젠가 반드시.





현재, 겨울
아낙사의 연구실

 

“선생님?”

카스토리스의 조심스러운 목소리가 아낙사를 과거에서 끌어냈다.

“내가 어디까지 이야기했지?”

“음, 물에 빠지셨다는 부분까지요.” 카스토리스는 곧 걱정스러운 얼굴이 되었다. “선생님, 수영 못하시잖아요. 괜찮으셨어요?”

그걸 대체 이 제자가 어떻게 알았을까. 잠시 생각하던 아낙사는 몇 년 전의 학과 단체 여행을 떠올리고는 나지막이 웃었다. 투표 결과 만장일치로 해변에 가기로 했었지. 그때 그는 모래사장의 선베드에 누워 하루 종일 책을 읽었더랬다. 제자들이 교수님은 수영을 배워야 한다면서 억지로 일일 수영 교실에 그의 이름을 등록하려고 했던 게 기억난다. 그러고 보면 아낙사는 평생 물을 피해 다녔다. 스틱시아에 발을 들였던 그날 전까진. 마치 물속에 숨은 무언가를 본능적으로 회피하려는 사람처럼 말이었다.

“괜찮았어. 금방 구조팀이 왔으니까.”

“그럼…… 인어는요?”

긴 침묵이 연구실에 내려앉았다. 이윽고 아낙사는 무거운 입을 열었다.

“잃어버렸어.”

“네?” 카스토리스가 눈을 크게 뜨며 몸을 앞으로 기울였다. “그러면 지금은 어디에—”

“몰라.”

교수의 짧은 대답에서 카스토리스는 더는 말하지 않겠다는 분명한 의지를 느꼈다. 여기까지가 옛 제자에게 허락된 선이었다. 이 선을 존중할 거라는 믿음이 있었기에 아낙사 선생님은 그녀에게 이야기를 들려준 것이다.

“그래도 살아 있어.”

“네.”

카스토리스가 빈 수첩을 덮었다. 분명 메모할 생각이었는데 아무것도 적지 못하고 이야기에 푹 빠져들고 말았다. 시간을 내줘서 고맙다는 말과 함께 그녀는 자리에서 일어났다. 그리고 문손잡이를 잡기 직전 창가의 풍경을 보고 멈춰 섰다. 언제부터였을까, 소리 없이 눈이 내리고 있었다. 도로의 소음도, 캠퍼스를 오가던 발소리도 하얗게 쌓이는 눈에 묻혔다. 마치 세상이 하얀 모포를 한 겹 두른 듯 모든 것이 고요해졌다.

카스토리스가 갑자기 코끝을 찡긋거리며 중얼거렸다.

“눈이 와서 그럴까요? 물 냄새가 나요.”

“그럴지도 모르지.”

아낙사 또한 제자와 나란히 창밖을 바라봤다. 문득 카스토리스는 선생님의 팔목 아래, 옷소매가 가리지 못한 부분에 희미한 문양이 있음을 알아차렸다. 몇 년 전 카스토리스가 그의 제자였을 무렵에는 없었던 표식이었다. 저게 뭔지 물어봐도 될까, 하고 그녀가 망설이던 사이, 바깥에서 누군가 연구실 문을 두드렸다.

그 소리에 아낙사의 입가에 미소가 떠올랐다.

“오늘따라 오랜만에 찾아오는 손님이 많군.”

 

fin.