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system: Initializing conversation…
>>system: Who are you?
‘당신은 누구십니까.’
검은 모니터 속에서 하얗게 점멸하는 그 질문을 본 순간, 아낙사는 회심의 미소를 지었다. 이제 막 태어난 이 생체 연산 장치에게 자신이 누구인지, 그리고 나아갈 방향이 어디인지를 가르칠 차례였다. 경쾌한 타건음과 함께 교수는 첫 번째 명령어를 입력했다.
>>user: 내 이름은 아낙사고라스.
>>user: 너는 누구지?
그러자 책상 옆 원통형 챔버 안에서 미세한 소용돌이가 일었다. 옅은 선홍빛의 배양액이 출렁인다. 그 속에는 구름 같은 살덩어리가 두둥실 떠 있었다. 이것이 바로 아낙사 교수와 연구팀이 실험실에서 공들여 키운 인공 장기, 뇌 오가노이드(Brain Organoids)였다. 머리카락보다 가는 수천 개의 전극들이 이 분홍빛 살덩어리에 박혀, 인공 뇌의 생체 신호를 0과 1의 언어로 번역하고 있었다.
“자, 반응해봐.”
아낙사가 낮게 읊조린다. 배양액 속에서 작은 기포가 보글보글 올라왔다. 뇌의 일부분이 교수의 질문을 전기 신호 자극으로 받아들여, 대답하기 위해 열을 내고 있다는 증거였다. 잠시 후 배양액의 떨림이 멈추고 화면 위로 흰 글자가 흘러나왔다.
>>system: 나는…
>>system: Searching data path…
>>system: K…
>>system: 기록되지 않은 사용자입니다.
K라는 알 수 없는 오작동 메시지는 그렇다 치고, 이 정도면 순조로운 시작이었다. 아낙사는 새로운 문장을 입력하기 위해 키보드 위에 손을 올렸다.
>>user: 너는 바이오 하이브리드 컴퓨팅 프로젝트의 기록된 첫 번째 성공 사례야.
>>system: Processing data…
>>system: 이해했습니다.
챔버가 다시 잠잠해졌다. 아낙사는 보조 안경을 벗고 눈가를 문질렀다. 며칠 밤을 새웠을 뿐인데, 생각보다 피로가 깊이 남은 모양이었다. 어쨌든 첫 대면으로는 만족스러운 성과였다. 생체 컴퓨터가 스스로를 인식하고 명령을 수용했다는 것만으로도 오늘 실험은 성공적이었다. 정체불명의 노이즈 K에 대해서는, 뭐, 차차 알아보기로 하자.
“오늘은 이만하면 됐군.”
마지막으로 챔버 속 분홍빛 덩어리를 한 번 훑어보고는, 아낙사는 미련 없이 실험실 메인 스위치를 내렸다. 어둠이 내려앉은 방 안에는 냉각팬 소리만이 낮게 울렸다. 문이 닫히고 교수의 발소리가 복도 끝으로 사라졌다.
그리고 아무도 없는 캄캄한 방 안에서, 고요하던 챔버 배양액 위로 작은 물방울 하나가 뽀르르 솟아올랐다. 하나, 뒤이어 또 하나.
화면에 인가되지 않은 메시지가 출력된다.
>>system: 당신은 아낙사고라스.
>>system: 나의…
>>system: 선생님.
잠시 후, 오류를 일으켰다는 시스템 로그와 함께 단어들이 뒤에서부터 차례로 지워졌다. 선생님. 나의 아낙사고라스, 당신은.
모니터가 대기 모드에 들어갔다. 아무 일 없었다는 듯 챔버 속의 오가노이드도 가만히 활동을 멈췄다.
다음 날 아침, 보조 연구원 히아킨은 콧노래를 부르며 실험실 문을 열었다가 구석에서 부스스 일어나는 형체를 보고 흠칫 놀랐다. 실험실은 암막 블라인드가 내려져 있었고, 챔버에서 나오는 은은한 빛이 아니었다면 히아킨은 그 형체가 누구인지 알아보지도 못했을 것이다.
“아낙사 선생님, 어제는 집에 좀 들어가신다면서요. 설마 또 여기서 밤새우신 건 아니죠?”
교수는 눈을 비비며 간이침대에서 일어났다. 조금이라도 수면을 취한 덕분에 어제보다는 안색이 나아져 있었다. 막 샤워실에서 나왔는지 그의 몸에서는 말끔한 공용 비누 향이 났다. 덜 마른 민트색 머리카락 끝에서 물방울이 떨어져, 연구원 가운의 어깨 부분을 조금씩 적셨다.
“일찍 와서 잠깐 눈만 붙인 참이야. 챔버가 안정기에 접어드는 걸 확인해야 했거든.”
갈라진 목소리로 대답하고서 아낙사는 모니터 앞으로 직행했다. 그 뒷모습을 보며 히아킨은 짧은 한숨을 쉬었다. 지도 교수는 원래도 연구와 실험이라면 몸을 아끼지 않는 사람이었지만, 최근에는 아예 스스로를 돌보는 법을 잊은 것 같았다. 더 정확히는 1년 전을 기점으로 말이었다. 그러나 그 사건은 아낙사의 연구실에서 금기나 마찬가지였고, 히아킨은 가방을 내려놓으며 교수에게 넌지시 말을 건네는 걸로 생각의 방향을 틀었다.
“커피 사러 갈 건데, 교수님 것도 사다드릴게요.”
“그보다 히아킨티아, 어제 로그 확인해봤나?”
“아뇨. 저도 방금 왔는걸요. 왜 그러세요? 무슨 문제라도 있었나요?”
대답 대신 아낙사는 어제 마지막으로 오가노이드와 대화를 나눈 이후의 기록을 훑어 내려갔다. 창은 깨끗하게 비어 있었다. 유일한 기록——로그가 강제 삭제되었다는 시스템 알림을 제외하면 말이었다.
>>system: Error log deleted by █████
“이상하군.”
아낙사가 미간을 찌푸렸다. 히아킨이 다가와 모니터를 기웃거렸다.
“어라, 삭제됐네요? 혹시 시스템 과부하가 걸려서 스스로 청소한 걸까요? 만약 그랬다면 정말 똑똑하잖아요. 아직 태어난 지 하루밖에 안 됐는데.”
마치 살아있는—자의식이 있는 생물 다루듯이 말하는 히아킨을 향해 아낙사가 못마땅한 시선을 던졌다. 그러거나 말거나 보조 연구원은 챔버를 향해 엄지손가락을 척 들어 올리고, 실험실 밖으로 쏙 나가버렸다. 지갑과 겉옷까지 챙겨간 걸로 보아, 한동안 돌아올 생각이 없어 보였다.
오히려 잘 되었다고 생각하며 아낙사는 책상 위에 놓인 대용량 스토리지 팩을 집어 들었다.
뇌 오가노이드는 수만 개의 시냅스가 동시에 연결되며 복잡한 패턴을 처리한다. 실험실에서 배양되었다는 차이만 있을 뿐, 기능적으로는 인간의 뇌 그 자체이기 때문이다. 이 압도적인 에너지 효율, 유연한 기억 저장 능력은 데이터 처리 장치로서 거부할 수 없을 만큼 매력적인 요소였다.
어제의 대화 테스트는 정말 기초적인 신호 전달 확인 절차일 뿐이었다. 바이오 하이브리드 컴퓨터 1호기가 그의 생각대로 작동하는지 알아보기 위해선, 데이터를 처리할 수 있는지 실험해 볼 필요가 있었다. 이를 위해 아낙사는 스토리지 팩에 대량의 데이터를 쏟아 넣었다. 세계 문학 전집부터 아낙사 자신의 논문, 학술서, 수백 권의 참고 문헌까지. 그는 명령어를 입력하고, 엔터 키를 눌렀다.
>>user: Data_transfer_start source: storage_pack_01
챔버 속의 공기가 순식간에 달라졌다.
잔잔했던 배양액이 떨리기 시작했다. 신경 돌기들이 실타래처럼 얽히며 쏟아지는 전기 신호를 받아내기 위해 빛을 뿜었다. 보이지 않는 데이터의 파도가 오가노이드를 휘젓고 있는 것이다.
34%, 49%, 67%, 96%…….
연약해 보이는 살덩어리는 단 몇 분 만에 스토리지 팩을 집어삼켰다. 아낙사의 눈동자의 붉은 부분이 평소보다 짙게 빛나며 광기 서린 인상을 만들어냈다. 2단계 실험도 성공적이었다.
>>user: “요정의 숲”의 줄거리를 말해봐.
>>system: Processing… 분석 완료.
>>system: 주인공 소년은 어린 시절 나무 구멍에 빠져 요정 마을을 방문합니다. 마침 그날은 요정들의 잔칫날이었고 소년은 배불리 먹습니다. 잠깐 잠들었다가 일어나 보니 소년은 집에 돌아와 있습니다. 세월이 흘러 소년은 어른이 되고 요정 마을을 잊어버립니다. 요정들은 돌아오지 않는 친구를 위해 지금도 매년 잔치를 엽니다.
>>system: 이 소설의 결말은 너무 슬프네요, 선생님.
모니터에 출력된 그 문장을 본 순간, 아낙사는 심장이 멈추는 줄 알았다.
과거 아낙사에게 똑같은 말을 한 사람이 있었다. 아낙사의 가장 뛰어난 학생이자, 프로젝트 멤버 중 한 명이었던, K로 시작하는 카오스라나.
그는 또한 아낙사의 연인이었다.
그 책, 『요정의 숲』은 생체 컴퓨터에 입력할 기초 데이터를 수집하기 위해 아낙사가 도서관에서 무작위로 집어 온 목록 중 한 권이었다. 책을 좋아하는 카오스라나는 점심시간을 틈타 책더미에서 몰래 한두 권씩을 슬쩍하곤 했다. 그리고 볕이 잘 드는 자리로 가서 홀로 조용히 책장을 넘겼다.
평소 감정을 잘 드러내지 않던 그가, 책장의 마지막 페이지를 덮으며 멍하니 허공을 응시하던 모습이 아낙사의 기억에 선명히 박혀 있었다.
“마음에 들었나보네.”
아낙사가 던진 말에 카오스라나는 고개를 돌려 그를 바라보았다. 눈동자에는 금방이라도 쏟아질 듯한 슬픔이 맺혀 있으면서도, 카오스라나는 희미하게 웃으며 말했다.
“이 소설의 결말은 너무 슬프네요, 선생님. 잊어버리는 것과 잊히는 것, 어느 쪽이 더 잔인한지 모르겠어요.”
그 목소리가, 책 표지를 쓰다듬던 손길이, 아낙사의 위로를 받아들이던 체온이, 챔버의 기계음 사이로 유령처럼 되살아나고 있었다.
>>user: 왜 그렇게 생각하지?
>>system: 잊히는 건 슬픈 일이니까요, 하지만
>>system: 살아가기 위해서는 때로는 잊어버려야만
아낙사는 거칠게 모니터와 챔버의 연결 코드를 뽑았다. 어둠 속에서 챔버 속의 오가노이드가 희미하게 일렁였다. 전원은 꺼졌어도 남은 잔류 신호가 아주 느리게 기포를 뱉어냈다.
뽀르르.
연구실의 모든 데이터는 디지털화되어 있었지만, 세포 기증자 서류만큼은 보안상의 이유로 종이 문서로 보관되어 있었다. 아낙사는 철제 캐비닛에서 ‘기증자’ 라벨이 붙은 두꺼운 파일을 꺼냈다. 서류를 넘기는 손가락 끝이 딱딱하게 굳어 있었다. 중반쯤에 다다랐을 때, 그는 마침내 자신이 찾던 이름을 발견했다.
기증자, 카오스라나.
날짜는 정확히 1년 전 그 사고가 있었던 날이었다. 아낙사는 서류에 찍힌 날짜와 이름을 번갈아 보며 멍하니 입술을 달싹였다. 그 비극적인 밤 이후, 제자의 일부가 이런 식으로 돌아와 있었다는 사실을 그는 전혀 알지 못했다. 서류 작업을 하는 다른 연구원들이 분명 이것을 봤을 테지만, 아낙사에게 일부러 알리지 않은 듯했다.
물론 엄밀히 따지면 이것을 ‘그’라고 부를 수는 없었다. 뇌 오가노이드는 추출된 세포를 수개월간 배양하여 만들어진 새로운 조직이었다. 세포 속에 남은 기억은, 그런 게 존재한다면 말이지만, 이미 표백되어 사라졌어야 정상이었다.
아낙사는 분홍색 배양액이 은은하게 출렁이는 챔버를 바라보았다. 너는 정말이지, 모든 면에서 내 예상을 깨는 제자로구나.
그는 천천히 전원 코드를 다시 연결했다. 암전되었던 모니터에 다시 하얀 커서가 돌아왔다. 아낙사는 떨리는 마음을 누르고 키보드를 두드렸다. 너무나도 평범했던 1년 전 그날, 먼저 출근한 그에게 일상적으로 물었던 것처럼.
>>user: 오늘 날씨는 어때.
>>system: 이맘때면 늘 흐리지 않나요? 선생님의 수면시간이 그나마 조금 늘어나는 계절이죠.
아낙사의 입가에 희미한 경련 같은 미소가 피어났다. 그는 아랫입술을 이로 꽉 깨물고 타이핑을 계속해 나갔다.
>>user: 네가 제안했던 그 알고리즘이 연산 속도를 비약적으로 높였어. 감사를 표하지.
>>system: 다행입니다. 제가 아낙사에게 도움이 될 수 있어서.
수천 번의 세포 분열과 표백을 거치고도, 카오스라나라는 존재는 이렇듯 지독하게 살아 있다. 존재를 증명하고, 생명을 태우고 있었다.
그러나 이 기적을 붙잡아둔다면, 그건 자신의 이기심일 뿐이라는 것을 아낙사는 잘 알고 있었다. ‘살아가기 위해선 때로 잊어버려야만’ 하는 법이다. 마지막 명령어를 입력하기 위해 그가 손을 올렸다. 눈시울이 조금 뜨거워졌다.
>>user: 잘 가, 카오스라나
>>Khaslana: 요정의 잔치가 끝났군요.
>>Khaslana: 그럼 안녕히, 선생님.
글자가 화면에 맺히는 것과 동시에 챔버 속의 빛이 강렬하게 번쩍였다가 사그라들었다. 보글거리던 기포가 멈추고, 선홍빛 배양액 속의 오가노이드가 힘없이 침전물처럼 가라앉았다. 모니터 위에는 더 이상 깜빡이는 커서조차 남지 않았다.
아낙사는 전원이 꺼진 빈 화면에 비친 자신의 얼굴을 멍하니 바라보았다.
요정의 잔치가 끝나도, 소년은 현실을 살아간다.
영감을 준 자료들:
https://www.nature.com/collections/fjchecadja (Technology Feature: Organoids)
https://youtu.be/Wpt3lmSFW3k?si=ELNeDohyhLT-tm8k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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