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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파이낙사] 기억 조각 모음

과거의 강에서 건져낸 기억 결정들이다. 기억의 주인이 소중하게 간직해 온 듯하다…….




1.

  길을 걷다가 어디선가 날아온 세탁물에 머리를 맞을 확률은 얼마나 될까.

  앰포리어스 전역을 뒤져 본다면, 삶이 너무나 무료한 나머지 이를 계산해 보려고 시도한 사람이 한 명쯤은 있을지도 모르겠다. 아니, 멀리 갈 것도 없이 노두스 학파 사람들이 바로 이 분야의 전문가 아닌가. 산책로나 우애의 관에서 아무나 한 명을 붙잡고, 실례지만 이런 것도 계산하실 수 있으십니까, 하고 물으면 몇 날 며칠이 걸리더라도 답을 찾으려고 노력해 줄 것이다.

  그렇다면 파이논은 묻고 싶다.

  강의실로 향하던 중에, 마침 그 수업을 담당하는 교수님의 케이프가 하늘에서 뚝 떨어질 확률은 얼마나 되나요? 아, 그리고 제가 마침 그 교수님을 절찬리 짝사랑하던 중일 경우의 수도 함께 계산 부탁드려요.

 

  두근두근, 콩닥콩닥.

  파이논은 머리 위로 툭 떨어진 부드러운 천 조각을 조심스럽게 걷어냈다. 꿈에서도 잘못 볼 리 없는 아낙사 선생님의 케이프가 자신의 손 위에 들려있었다. 선생님의 어깨 위에 얹혀 있을 땐 그렇게나 위엄 넘치고 우아하게만 보였는데, 이렇게 보니 한 손으로 쉽게 움켜쥘 수 있을 만큼 아담하고 가녀리다.

  주위를 둘러보고 아무도 없다는 걸 여러 차례 확인한 다음, 파이논은 그 옷을 품 안에 조심스레 끌어안았다. 훅 끼쳐오는 것은 바람과 세탁비누 냄새, 그리고 아, 어렴풋한 아낙사 선생님 냄새. 저도 모르게 파이논의 들이마시는 숨이 깊어졌다.

  많고 많은 빨래 중 하필 선생님의 케이프가, 수많은 학생 중 하필 파이논의 머리 위로 떨어질 확률에, 그가 어젯밤 좋은 꿈을 꾸느라 늦잠을 자서 (어떤 내용이었는지는 우리 구세주의 평판을 위해 조용히 넘어가도록 하자) 평소보다 다소 늦게 이 길을 지나간 확률까지 곱하면…… 모르겠다. 복잡한 계산은 그런 걸 좋아하는 노두스 학파 사람들에게 맡기고, 파이논은 그저 이 우연에 감사하고 싶었다. 만약 운명이 다르게 흘러갔다면, 이 시간에 이 길을 지난 게 자신이 아니라 다른 학생이었다면. 파이논이 아닌 다른 누군가가 감히 이 옷자락에 손을 대거나, 몰래 방으로 가져가서 얼굴을 묻는 상상을 하니 뱃속이 조금 뒤틀리는 느낌이었다.

  ‘조심하셔야죠, 아낙사 선생님.’

  파이논은 케이프를 소중히 가슴팍에 숨기듯 안아 들었다.

 

  곧 수업이 시작될 시간이었지만, 파이논은 강의실 대신 아낙사 선생님의 연구실로 발걸음을 재촉했다. 문을 두드리고 냉큼 들어서자 책상 앞에 앉아 있던 아낙사가 삐딱하게 고개를 들었다. 어깨 위가 허전한 줄도 모르는 기색이었다.

  “선생님께서 중요한 걸 흘리신 거 같아서요. 전해드리러 왔습니다.”

  파이논은 짐짓 보호자라도 된 것처럼 엄한 표정을 지으며 케이프를 내밀었다. 아낙사는 그제야 자신의 드러난 어깨를 돌아보고 입으로 ‘아’ 하는 모양을 만들었다. 일어나려던 아낙사를 막으며 파이논이 의자 뒤로 돌아가 스승에게 케이프를 둘러주었다. 옷깃을 정리하는 척 어깨선을 은근히 더듬던 파이논의 미간이 살짝 찌푸려졌다. 어째 몇 주만에 전보다 더 마른 것 같기도 하고. 그럴 수가 있나?

  “아낙사 선생님, 요즈음 식사는 잘 챙겨 드시나요?”

  묵묵부답.

  “그나저나 어쩌다 빨래가 길가로 날아가게 된 걸까요. 오늘같이 바람이 많이 부는 날에는 조심하시는 게 좋을 것 같아요. 마침 그 자리에 있던 게 저였으니까 다행이지.”

  제자의 잔소리를 가만히 듣고 있던 아낙사가 문득 의자를 돌려 파이논을 올려다보았다. 스승의 입가에 묘하게 즐거운 듯한 미소가 걸렸다.

  “그래, 그 빨래 말인데. 케이프 말고 다른 것도 혹시 날아갔을지 모르겠군.”

  “……구체적으로 어떤 건지 말씀해 주실 수 있을까요.”

  파이논의 목소리는 낮고 진지했다. 아낙사는 짐짓 곤란한 표정을 지으며 긴 손가락으로 턱을 톡톡 건드렸다.

  “글쎄. 얇고 가벼운 것들이라 어디까지 날아갔을지 모르겠군. 아마 지금쯤 나무 위나, 어느 운 나쁜 학생의 머리 위일 수도 있겠지.”

  학생이라는 단어가 나오자마자 파이논의 어금니에 힘이 들어갔다. 그는 이미 머릿속으로 아낙사 선생님의 얇고 하늘하늘하며 매우 사적인 빨랫감을 손에 넣고 기뻐할 얼굴 모를 녀석들의 명단을 작성하고 있었다.

  “선생님,” 파이논이 아낙사가 앉은 의자의 팔걸이를 짚으며 상체를 숙였다. 거리가 가까워지자 그의 파란 눈이 마치 이글이글 타오르는 것처럼 보였다. “오늘 수업을 결석해도 될까요. 지금 꼭 찾아야 할 게 생겨서요. 아주 시급한 일이에요.”

  “올해도 졸업이 간절하지 않은 모양이군, 엘리사이 에데스의 파이논. 그게 내 수업보다 중요하다는 건가?”

  “무슨 그런 말씀을…… 당연하죠! 그런 게 실오라기 하나라도 남의 손을 타게 할 수는 없어요!”

  당장이라도 대검을 짊어지고 문밖으로 뛰쳐나갈 기세의 제자를 보며, 아낙사는 결국 참지 못하고 풋, 하고 웃음을 터뜨렸다.

  “내 손수건에 그만한 가치가 있는 줄은 몰랐군. 그게 그렇게까지 목숨을 걸고 사수해야 할 ‘실오라기’였다니.”

  아낙사는 멍하니 굳어버린 파이논의 얼굴을 즐기듯 빤히 바라보았다. 아까의 비장함은 온데간데없이, 이 착한 제자의 얼굴은 새빨갛게 익어 있었다. 입만 벙긋거리는 파이논의 흐트러진 머리카락을 툭 건드리며 아낙사가 나직하게 속삭였다.

  “수업 늦겠다.”




 

2.

  “준비됐어, 파이논?”

  “준비됐어요, 아낙사 선생님.”

  때는 종막시 삼각.

  착한 아이는 침대로 돌아가고, 밤꾀꼬리만이 사색하는 철학자들의 동반자가 되어 주는 이 야심한 시간에, 누스페르마타 현인 아낙사고라스와 그의 애제자 파이논은 숨소리가 들릴 만큼 가까운 거리에서 서로 밀착하고 있었다. 차갑게 식은 연구실 공기 속에서 두 사람의 긴장 어린 시선이 만났다.

  “조금이라도 불편함이 느껴진다면 곧장 말하도록 해.”

  “괜찮습니다. 전 선생님을 믿어요.”

  파이논이 씩씩하게 대답했다. 어둠이 내려앉은 연구실에서 두 사람이 의지할 빛은 책상 한구석에 아낙사가 가져다 놓은 작은 램프뿐이었다. 사방에는 쓰다 만 원고 뭉치들이 쌓여 있었고, 영감이 번뜩일 때마다 급히 조제한 정체불명의 연금 혼합물들이 플라스크 속에서 기묘한 빛을 내며 보글거렸다. 혼돈이라고도 할 수 있는 이 풍경은 이제 파이논에게 익숙한 안식처였다.

  대토론회 6회 연속 우승이라는 전무후무한 기록을 세우는 동안, 여러 학파에서는 그 아낙사고라스가 드디어 학문적 후계자를 찾은 게 아니겠냐는 소문이 퍼지고 있었다. ‘아낙사 교수의 수제자’ 소리를 들을 때마다 파이논은 자랑스러움으로 심장이 터질 것 같았다. 그러나 그는 알고 있었다. 선생님은 어떤 사소한 짐도 제자들에게 지우려 하지 않는다는 걸. 선생님은 후계자를 기르지 않는다. 그저 각자가 원하는 답을 찾도록 길잡이 역할을 해 주실 뿐이다. 그 배려가 몹시도 감사한 한편, 조금 서운한 마음이 스멀스멀 생겨나는 것도 사실이었다.

  꼬리에 꼬리를 무는 상념에 빠져들려던 찰나, 아낙사가 파이논의 손등을 부드럽지만 단호하게 움켜쥐었다.

  “다른 생각하지 마, 파이논.”

  생각을 급히 멈추고 그가 아낙사에게 시선을 고정했다. 살짝 내리깐 스승의 눈이 붉은빛으로 반짝이고 있었다. 아낙사의 손가락이 파이논의 손목을 조심스럽게 문질렀다. 은밀하게 속삭이는 목소리는 평소보다 한층 낮았다.

  “시작할거야.”

  “네.”

  선생님을 믿는다고 했고, 그 말에 한 치의 거짓도 없었지만, 어깨에 조금 힘이 들어가는 건 어쩔 수 없는 본능이었다. 아낙사가 손을 떼자 파이논의 손목을 단단히 옥죈 수갑이 찰칵 소리를 내며 잠긴다.

  앰포리어스의 문은 대부분 티탄의 권능을 빌려 만들어졌다. 이는 통로의 티탄, 야누스의 힘이다. 그리고 나무 정원, 아니 앰포리어스 전역에서 가장 유명한 신성 모독자인 아낙사 선생님은 그것이 영 마음에 들지 않으셨단다.

  현인 부임 첫해에는 그의 거처와 연구실에 ‘사람이 만든’ 자물쇠를 달아 달라고 했지만 가볍게 반려당했다. 두 번째 해, 같은 요청을 넣었지만 신청 자체가 철회되었다. 연례행사처럼 같은 일을 꾸준히 반복하던 아낙사는 어느 날 문득 이런 생각을 떠올렸다. 머릿속에 구름만 차 있는 저 멍청이들이 내 요구를 들어주지 않는다면, 내가 직접 자물쇠를 만들면 되지.

  쉽게 부서지는 자물쇠는 의미가 없었다. 연금술의 천재인 그가 만든 이 물건은 인간의 기술이 만들 수 있는 정점과도 같은 물건이었다. 그리고 그 강도를 실험하기 위해 자원하고 나선 이가 바로 그의 제자, 파이논이었다.

  파이논은 슬쩍 팔에 힘을 줘 보았다. 한 손으로 가뿐히 대검을 휘두르는 그였지만, 수갑은 꿈쩍하지 않고 그의 근력을 받아냈다. 이쯤에서 강도를 조금 높여 볼까. 파이논이 얼굴이 벌게질 만큼 온 힘을 실어 수갑을 비틀었다. 역시 끄떡도 하지 않는다. 그의 스승이 대단한 줄은 알았지만 이 정도일 줄이야. 파이논은 속으로 감탄하며 아낙사에게 고개를 끄덕여 보였다.

  “이거면 검은 물결 군단이 찾아와도 끄떡없겠어요.”

  “그래.”

  파이논은 실험이 종료되었다고 생각하고 수갑 찬 손을 아낙사 쪽으로 내밀었다. 그러나 어째서인지 아낙사가 주머니에 손을 넣어 열쇠를 꺼내지 않는다. 대신 팔짱을 끼고 파이논을 물끄러미 바라볼 뿐이었다. 그의 시선은 파이논의 갸우뚱한 얼굴과 수갑으로 단단히 구속된 손목, 그리고 바닥에 털썩 주저앉은 자세를 느릿하게 훑었다.

  “선생님?”

  침묵이 길어지자 파이논이 의아한 듯 그를 불렀다. 하지만 아낙사는 대답 대신 발을 뻗어, 파이논의 허벅지를 발끝으로 툭 건드렸다.

  “말해 봐, 파이논. 두 손이 묶인 채로…… 해본 적 있어?”

  파이논이 마른침을 꿀꺽 삼켰다. 이어질 다음 단계의 실험을 상상하자 온몸의 피가 어딘가로 후끈 쏠린다. 그가 바짝 말라오는 입술을 혀로 훔치며 진지하게 대답했다.

  가르침을 청합니다, 선생님.




 

3.

  멀리 오크마 서북쪽 유적으로 원정을 다녀온 파이논은, 오랜만에 일주일이라는 긴 휴가를 받았다. 무너지는 기둥에 어깨를 살짝 스쳤을 뿐, 부상이라고 부르기도 민망한 상처를 입은 것뿐인데 일주일 치 포상 휴가가 넝쿨째 굴러온 것이다. 물론 이 모든 건 명목상 붙인 이유일 뿐이고, 실상은 불을 쫓는 여정의 수장인 아글라이아가 일 년 내내 바쁘게 일하는 이 황금의 후예에게 보내는 작은 제스쳐라고 할 수 있었다. 「이쯤에서 조금 쉬도록 해, 파이논」 하는.

  그렇다면 그 마음을 감사히 여기며, 이 휴가를 즐기도록 하자. 파이논은 갑자기 비어버린 일주일 치 달력을 내려다보다 말고 그답지 않게 충동적인 결심을 내렸다.

  나무 정원에 가자. 그리고 아낙사 선생님을 만나러 가자.

  기별도 없이 찾아온 옛 제자를 아낙사는 늘 그랬던 것처럼 별말 없이 받아주었다. 날 보러 올 정도로 한가하면 이리 와서 과제물 채점이나 도우라며 쓴소리를 하지만, 그마저도 파이논을 위한 행동이라는 걸 제자는 알고 있었다. 이럴 때마다 파이논은 아낙사에게 묻고 싶다. 선생님은 왜 아무것도 묻지 않으세요? 그러면 아마 선생님은 이렇게 대답하시겠지.

  ‘내가 물어봤으면 좋겠어?’

  예, 아니오, 답은 어느 쪽일까. 이번에도 마음을 정하지 못한 채 파이논은 일주일을 빈둥거리며 보냈다. 감으나 뜨나 선생님의 체온에 감싸여 보낸 일주일은, 감히 말하건대 티탄들조차도 누리지 못할 지극한 행복의 시간이었다. 이렇게 말하면 비유가 마음에 들지 않는다고 선생님은 이마를 콩 때리시겠지. 파이논은 남몰래 쿡쿡거리며 그를 태우기 위해 찾아온 드로마스 상단에게 손을 흔들었다. 오크마로 돌아갈 시간이었다.

 

  크렘노스의 왕세자는 오늘 벌써 세 번째로 혀를 차고 있었다. 지난 일주일간 도대체 어디서 뭘 하다 왔는지, 휴가가 끝난 구세주의 상태가 영 좋지 않았다.

  “마이데이, 이거 봐…….”

  파이논은 연병장 구석에 무릎을 꿇고 앉아, 등 뒤로 길게 늘어진 푸른 망토가 먼지에 더러워지는 것도 아랑곳하지 않고 길가에 구르는 돌을 주워 든 참이었다. 돌멩이를 손바닥에 올려놓고, 파이논이 소중한 물건이라도 된 양 부드럽게 쓰다듬는다.

  “이 돌, 드로마스 닮지 않았어? 선생님이 보면 좋아하시겠다.”

  “…….”

  “아, 저 구름, 약간 선생님 뒷모습 같아 보인다.”

  “이봐, 구세주.”

  “맞다, 저번에 말한 그 저민 고기 요리법 좀 알려줘. 아낙사 선생님은 좀 든든한 걸 드셔야 할 필요가 있어.”

  “이봐!”

  “일주일 뒤에 짧은 비번이 있는데, 그때 나무 정원까지 가는 건 무리겠지, 마이데이?”

  “……네 맘대로 해라.”

  정정하자. 지난 일주일간 아낙사고라스의 품에 폭 안겨서 대체 뭘 하다 왔는지, 이 칠칠치 못한 구세주의 상태가 평소의 수십 배 나쁜 쪽으로 악화했다. 마이데이는 고개를 절레절레 저으며 연병장 한쪽으로 저벅저벅 걸어갔다. 제대로 검을 들지도 못하는 녀석과는 대련할 가치조차 없다. 머릿속에 든 민트색 물이 빠지거든 그때 상대해 주지, 구세주.

 

  같은 날 이별시, 마이데이는 광장 근처를 지나다 드로마스 공방 언저리에서 구세주를 발견했다. 비 맞은 강아지처럼 쪼그려 앉은 저 꼴이라니. 드로마스들과 진지하게 우웅거리며 대화를 시도하는 그 뒷모습을 보며, 마이데이는 오늘 열 번째로 혀를 찼다. 그의 손에는 크렘노스식 저민 고기 요리법을 베껴 적은 종이가 들려있었다. 이건 구세주가 다시 제대로 인간의 말을 할 수 있게 되면 건네주도록 하자.





 

█.

  가끔 그런 날이 있었다. 몸속의 불씨는 너무 뜨겁고, 이미 한계에 다다른 기억의 용량이 발목을 잡는 날.

  그럴 때 카오스라나는 몸을 둥글게 말고, 아무도 없는 풀숲이나 길가의 버려진 오두막, 무너진 신전 기둥 뒷편 따위에 숨어 이 순간이 지나가기를 기다렸다. 대체로 시간은 모든 걸 해결해 주었다. 불씨는 여전히 뜨겁고 기억의 무게가 그를 짓누르지만, 그래도 기다리다 보면 몸을 움직일 수 있는 정도로는 회복되었다.

  갈수록 이 발작 같은 상태가 잦아진다는 것을, 곧 견디지 못하는 순간이 그를 기다리고 있다는 것을 카오스라나는 지난 회차의 기억들을 통해 알고 있었다.

  토독토독 떨어지는 빗소리를 들으며 그는 아무도 없는 나무 정원의 풀숲에서 양팔로 다리를 감싸안았다. 그는 그렇게 태아처럼 짧고 깊은 잠에 빠졌다. 일어났을 때 이 발작이 조금은 가라앉기를.

  영원을 사는 그이지만, 그에게는 시간이 없었다.

 

  눈을 떴을 때, 카오스라나는 자신이 여전히 꿈속에 있는 줄 알았다.

  “일어났군.”

  나뭇가지 사이로 들어오는 어렴풋한 빛이 근엄한 학자복을 비춘다. 학자는 티타임이라도 즐기는 것처럼 허리가 끊긴 나무 밑동에 앉아 느긋하게 책을 읽고 있었다.

  “당신이 왜…….”

  그제야 카오스라나는 지금이 수확의 달이며, 선생님은 이달이 되면 나무 정원의 무덤가를 거닐곤 한다는 사실을 기억해 냈다. 아무도 찾아오지 않는 곳이라고 생각해서 방심하고 말았다. 지금이라면, 목격자가 더 늘어나기 전에 이곳을 뜰 수 있다. 카오스라나는 비틀거리며 자리에서 일어나려고 했다.

  아낙사는 책장을 넘기던 손을 멈추고 시선을 들었다.

  “지금 나가면 축제 준비가 한창인 로토파고이 학파 사람들와 정면으로 마주치는 결과를 낳을 뿐이야. 그리고…….”

  후드로 가렸지만 숨길 수 없는 창백한 안색. 떨리는 손끝. 고통스러운 듯 움찔거리는 두 다리. 아낙사는 이 정체불명의 침입자의 상태를 꿰뚫어 보고 말했다.

  “네 몸 상태를 봐. 온몸이 비명을 지르고 있군. 그 상태로 한 발짝이라도 더 움직이면, 이 세상에는 산을 움직이는 의지로도 해결할 수 없는 게 있다는 걸 알게 될 거야.”

  카오스라나는 입술을 깨물었다. 아낙사의 앞에서는 늘 모든 수를 읽힌 어린 제자가 된 기분이었다. 그의 목소리를 듣는 것만으로도 가슴 속 불씨가 일렁인다. 밤의 장막이 그들을 완벽히 감춰주는 지금이라면, 잠시나마 쉬어도 되지 않을까 하는 마음이 싹을 틔웠다. 그건 카오스라나에게는 너무나 위험한 생각이었다. 조금이라도 휴식을 취하면, 부서진 신체와 마음은 더욱더 편안함을 갈구하게 된다. 아낙사라고 하는 사람은 과거에도 지금도, 그리고 앞으로도, 그에게 치명적인 독과 같았다.

  그때 숲의 고요를 깨는 가느다란 부스럭 소리가 들렸다.

  카오스라나는 본능적으로 몸을 굳혔다. 누군가 온다. 발작의 여운이 가시지 않아 무거운 몸이었지만, 그는 아낙사가 무슨 말을 하기도 전에 그림자처럼 덤불 뒤로 사라졌다.

  아낙사는 굳이 그를 쫓지 않았다. 대신 그가 누워있던 자리를 가만히 내려다보았다. 조금 전까지 낯선 자의 온기가 머물렀던 자리로 손을 뻗어 바닥을 짚은 순간, 아낙사의 표정이 일그러졌다.

  손바닥에 날카로운 통증이 번졌다. 흙바닥이 용광로처럼 뜨거웠다. 아낙사는 손마디에 입은 붉은 화상을 물끄러미 바라보다가, 소리가 들려온 곳으로 고개를 돌렸다. 그저 나뭇잎만이 무성하게 밤바람에 흔들리고 있었다.

  “파이논.”

  아낙사의 입술 사이로 나직한 이름이 흘러나왔다.

  파이논은 지금 오크마에서 불을 쫓는 여정의 주축이 되어 있으니, 이성적으로 생각하면 말도 안 되는 추측이었다. 하지만 이 낯선 침입자는 파이논이었다. 파이논 외에 다른 누구일 수 없었다. 그 근거를 묻는다면, 그건 농부가 자신이 정성 들여 기른 포도나무들이 서로 어떻게 다른 지를 알아보는 것과 같은 이치라고밖에 설명할 수 없었다.

  하다못해 아픔을 가라앉힐 영약을 만들어주거나, 오늘 밤 휴식을 취할 수 있도록 머리맡에서 책을 읽어줄 수 있다면 좋았을 것을.

  사라진 밤그림자를 눈으로 찾으며 아낙사는 작게 한숨을 쉬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