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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파이낙사] (AU) 33,550,336 포인트보다 사랑해요

 




  피크 타임이 지난 오후 3시의 카페.

  꼬리에 꼬리를 물고 들어오던 인근 직장인들의 발길이 어느새 뚝 끊어지고, 끝없이 돌아갈 것만 같던 에스프레소 머신도 이제는 숨을 돌릴 타이밍이었다. 매장에는 경쾌한 음악이 손님들이 빠져나간 자리를 채웠다. 유일하게 주인이 있는 테이블은 창가 근처의 2인석뿐이었다.

  나란히 앉은 두 남자의 앞에는 서로의 취향을 드러내는 음료가 놓여 있었다. 보기만 해도 코끝이 찡해지는 엑스트라 스트롱 민트 피지오와, 초코 휘핑을 추가한 트리플 민트초코 스무디.

  어색한 공기 속에서 파이논은 조심스레 스푼을 들어 휘핑크림을 한 입 크게 떠먹었다. 아, 달다. 풍부한 단맛 아래로 미세한 민트 향이 청량함을 약속하고 있었다. 아주 살짝 긴장이 풀리려던 순간, 파이논의 앞으로 하늘색 봉투 하나가 쓱 내밀어졌다.

  “돌려줄게.”

  아낙사의 덤덤한 목소리가 그렇게 선언했다. 파이논은 제 앞에 놓인 봉투를 빤히 바라봤다. 굳이 만져보지 않아도 내용물이 제법 묵직하다는 걸 한눈에 알 수 있었다. 아마도 저 안에 들어있는 건, 33,550,336 포인트에 해당하는 돈. 균형의 동전으로 환산하면 얼마이려나.

  파이논이 남몰래 예언의 힘을 가졌다거나, 종이 속을 꿰뚫어 보는 초능력을 보유한 게 아니다. 33,550,336 포인트는 간밤에 파이논이 스트리머 SkeMma720의 방송에 쓴 돈의 총액이었다.

  파이논으로부터 아무 반응이 없자, SkeMma720, 즉 아낙사는 작게 한숨을 쉬며 이번에는 아예 봉투를 상대의 손에 들려주었다. 이 돈을 내가 갖는 건 옳지 않아. 조곤조곤한 말투로 그렇게 전하자 파이논이 고개를 툭 떨궜다. 봉투에 그려진 드로마스 캐릭터 얼굴이 환하게 웃으며 파이논을 마주 보고 있었다.

  어쩐지 패배감이 느껴져, 파이논의 어깨가 축 늘어졌다.

  아아, 대체 어쩌다가 이렇게 되어 버린 걸까?






  자기 소개를 하는 자리에서 파이논은 늘 자신을 이렇게 표현했다. 저로 말할 것 같으면, 어디에나 있는 그냥 평범한 대학생이에요. 아, 그리고 졸업 학년입니다.

  아르바이트로는 3학년 두 번째 학기에 우연히 발을 들인 모델 일을 어찌저찌 이어 오고 있다. 하지만 제법 벌이가 좋은 아르바이트 수준에 머물러 있을 뿐, 커리어 방향성에 대해선 여전히 고민 중인 단계다. 에이전시에서는 모델 파이논의 활동을 확장하고 싶어 하는 눈치지만, 대학생 파이논은 당장 눈앞에 닥친 졸업부터 생각하고 싶다.

  진학을 위해 고향을 떠나온 지라 1, 2학년 때는 대학 기숙사 신세, 3학년이 되고부터는 친한 친구와 합심하여 하우스메이트로 지내고 있다. 알고 보니 그 집이 친구 소유일 뿐 아니라, 그 자식이 자기 명의의 집을 두 채나 가진 도련님이라는 걸 알게 되었을 때는 배신당했다는 생각에 말다툼을 하기도 했지만, 그것도 벌써 지난 일이다. 월세는 반의반 값, 요리를 제외한 모든 집안일은 파이논이 담당한다는 조건으로 파이논은 하우스메이트 마이데이의 방 세 개, 욕실 두 개짜리 집에 얹혀사는 중이었다. 참고로 집안일 목록에서 요리가 빠진 이유는 마이데이가 일 년 내내 파이논이 만든 요리를 먹고 사느니 프로틴 파우더만으로 연명하겠다고 폭언한 탓이다. 파이논은 입을 삐죽 내밀었다. 내 요리가 어디가  뭐 어때서? 엄마 아빠는 맛있다고만 했는데!

  각설하고, 다시 파이논의 커리어 이야기로 돌아가 보자면, 얼마 전 에이전시에서 그에게 소통 창구용 소셜 미디어를 만드는 게 어떻겠냐는 제안이 들어왔다. 지금까지 그의 경력은 독립 매거진, 온라인 룩북, 피팅 모델 등에 국한되어 있었다. 일거리가 떨어진 적은 없다지만, 누리망 인지도가 업계 인지도와 동음이의어인 세상이었다. 그 말을 듣고 파이논은 새삼스럽게 자신의 소셜 미디어 피드를 훑어보았다. 맛있는 음식(파이논이 만든!). 친구들과의 공부 모임. 깨끗하게 닦은 애차(자전거). 특별히 강도 높인 운동 루틴 후 땀에 쩔어 있는 모습. 음, 과연 이런 걸 보고 싶어하는 사람이 있기나 할까? 혹시나 싶어 하우스메이트의 의견을 넌지시 물어봤을 때, 돌아온 대답은 전혀 긍정적이지 않았다.

  “하. 넌 차라리 일상을 숨기는 게 잘 먹힐 거다.”

  그건 또 무슨 뜻이냐며 되물어봤지만, 마이데이는 아주 길고 비판적인 시선을 던질 뿐이었다. 그게 오히려 파이논의 승부욕 버튼을 누르는 계기가 되었다.

  그날 밤, 제 방 침대에 누운 파이논의 가슴은 소셜 미디어 마스터가 되겠다는 열정으로 뜨겁게 불타고 있었다. 심호흡하고 파이논은 추천 피드를 열었다. 청정수에 가깝던 알고리즘 탓에 그의 피드에는 세상 무해한 게시물들, 그러니까 요즈음 유행하는 음식이라거나 귀여운 동물 영상 같은 것들로 가득했다.

  그렇게 끝도 없이 스크롤을 내리던 중, 파이논의 시선을 사로잡는 이질적인 클립이 있었다.

  「시청자한테 일침 놓는 스트리머」

  화면의 절반을 가린 그 큼지막한 캡션을 파이논이 더듬더듬 따라 읽었다. 휴대폰 화면의 푸르스름한 빛이 어둠 속에서 그의 얼굴을 비췄다. 파이논의 망설임을 눈치챘는지, 호버링되던 영상이 자동 재생을 시작했다.

  그닥 좋지 않은 화질의 영상 속 스트리머는 마우스를 잠시 멈추더니, 카메라를 향해 고개를 까딱했다. 헤드셋 너머로 삐죽 튀어나온 민트색 머리카락이 살랑살랑 흔들렸다. 480p의 저화질 속에서도 흔치 않은 미인이라는 걸 알 수 있었다. 무심한 눈길로, 그가 채팅창의 한 구절을 읽어 내렸다.

  ‘음, ‘어차피 게임인데 다들 과몰입한다’라.’

  스트리머가 등받이에 몸을 깊숙이 묻으며 이번에는 정면으로 렌즈를 응시했다. 초점이 없는 듯하면서도 묘하게 상대를 꿰뚫어 보는 서늘한 눈빛이었다.

  ‘아무것에도 몰입해 보지 못한 사람은 크게 두 부류로 나뉘지. 아직 그럴 만한 대상을 발견하지 못한 사람, 그리고 몰입할 용기가 없는 사람.’

  잠시 정적이 흐르는가 싶더니 그가 다시 마우스를 잡고 게임을 시작했다. 채팅창이 미친 듯이 올라가지만 화질이 나빠 그 내용까지는 읽을 수 없었다.

  클립은 거기서 끝났다.

  피드의 다음 영상이 이어지고, 스트리머의 미친 반응속도라는 제목의 또 다른 클립이 흘러나오지만, 파이논의 의식은 이미 화면에서 멀어져 있었다.

  ‘몰입할 용기가 없는 사람.’

  처음 보는 스트리머의 그 말이 파이논의 귓가를 웅웅거리며 맴돌았다. 그는 어둠 속에서 자신의 손바닥을 내려다보았다. 빈둥거리며 살아온 인생은 아니었다. 아직 ‘인생’이라는 거창한 말로 표현할 만큼의 세월을 살아왔다고 하기도 뭐했다. 그저 미지근하게 열심히, 뭘 하든 요령 좋고 운 좋게 살아 왔을 뿐이라는 생각이 머리를 스쳤다.

  나는 무언가에 진심으로 몰입해 본 적이 있을까, 나 자신을 잊을 정도로?

  파이논의 손가락이 더듬더듬 이전 영상으로 되돌아가는 버튼을 눌렀다. 댓글을 샅샅이 뒤져 가며 이 클립의 출처가 SkeMma720이라는 스트리머의 개인 채널이라는 걸 알아냈다. 채널에 접속하자 모바일 브라우저보다는 애플리케이션 환경을 추천한다는 친절한 안내 팝업이 파이논을 이끌었다.

  앱 다운로드, 완료. 추천 채널은 가볍게 스킵. 팔로우할 채널…… SkeMma720, 확인.

  NeiKos496님, 가입이 완료되었습니다!



  그렇게 해서, 파이논은 난생처음 온라인 스트리밍 플랫폼이라는 미지의 세계에 발을 들이게 되었다.

  며칠간은 튀는 행동을 하고 싶지 않다는 생각에 다른 사람들 눈치를 살폈다. 그러다 어느 정도 채팅창의 규칙에 익숙해졌다고 생각했을 무렵, 파이논은 떨리는 첫 메시지를 살포시 보내 보았다.

  – 안녕하세요~

  짧은 한마디였지만, SkeMma720이 화면을 보고 ‘그래, 안녕’ 이라고 화답했을 때 그의 심장은 갓 태어난 아기새처럼 콩닥콩닥 뛰었다. 아, 라이브 알림 오기 전에 미리 접속해 있길 잘했다.

  ‘아낙사가 나한테 대답해줬어!’

  SkeMma720의 본명이 아낙사고라스라는 사실은 비밀이 아니었다. 누가 몰래 캐낸 정보도 아니었다. 프로필에 당당히 본명과 나이를 기재해 둔 건 다름 아닌 아낙사 본인이었다. ‘종합 게임 스트리머’라는 자기소개답게 그는 장르를 가리지 않았다. 하지만 그의 진가는 추리 게임이나 스토리 게임을 플레이할 때 드러난다고 파이논은 생각했다. 그의 결말 고찰과 해석은 가히 수준급이라, 파이논은 가끔 자신이 게임 스트리밍이 아니라 인문학 강연이라도 듣고 있는 게 아닌가 하는 착각에 빠지곤 했다.

  하지만 파이논이 가장 고대하는 시간은 따로 있었다. 바로 보이스 더빙이 없는 게임을 플레이할 때였다. 그럴 때면 아낙사는 귀찮은 기색도 없이 화면에 뜨는 대사창을 배역에 맞춰 직접 읽어주곤 했다. 파이논의 심장을 강펀치로 때리고 간 건, 비극적인 서사의 연애 시뮬레이션을 플레이하던 날 아낙사가 눈을 내리깔고 내뱉은 다음의 대사였다.

  “……좋아해요, 선배.”

  정신을 차려 보니 파이논은 채팅창의 수많은 사람들과 마찬가지로, 그 장면의 녹화 클립을 저장해 둔 상태였다.



  사건은 파이논의 방송 입문 한 달차에 벌어졌다.

  어느새 자신감이 붙어 채팅에도 활발히 참여하던 파이논은, 다른 시청자와 싸움이 붙었다. 정확히는 파이논 혼자 열이 붙은 것에 가까웠지만.

  TimaTima라는 아이디의 유저가 음성 도네이션으로 메시지를 남긴 게 시작이었다.

  – 우리 귀염둥이 사샤 화이팅~

  앞서 밝힌 대로 아낙사의 본명은 비밀이 아니었지만, 이 방의 시청자라면 지켜야 하는 암묵적인 규칙은 있었다. 그 규칙인즉슨, 무슨 일이 있어도 아낙사고라스를 아낙사라고 부르지 말 것. 용감히 시도한 수백 명의 시청자가 날카로운 밴을 당한 이후로, 누구도 감히 그의 이름을 줄여 부르지 않았다. 그런데 그런 그에게 귀염둥이? 사샤라고?

  참지 못하고, 파이논이 마찬가지로 음성 도네이션을 보냈다.

  – SkeMma720 님은 그렇게 부르는 거 싫어하실걸요.

  채팅창에 잠시 정적이 내려앉았다. 그러다 온갖 형태의 ‘ㅋㅋㅋㅋㅋ’, 응원봉을 흔드는 드로마스 이모티콘 등이 도배되며 채팅창이 빠르게 올라가기 시작했다. 파이논은 다른 시청자들의 반응을 이해하지 못하고 고개를 갸웃했다. 싸우지 말라는 말과 함께 아낙사가 끼어들려던 찰나, TimaTima의 새로운 음성 도네이션이 날아들었다.

  – 걸린 시비는 받아주는 게 인지상정이지!

  그리고——

  그날 밤 파이논은 아낙사의 채널에 도네이션으로 33,550,336 포인트를 쏟아부었다. 흥분한 나머지, 파이논은 팝콘을 와그작 씹는 분위기의 채팅창 사이에 끼어 있던 이 두 줄의 메시지를 미처 보지 못했다.

  – 근데 NeiKos 저분 진짜 Tima님이 누구신지 모르시는 거?

  – 쉿, 말하지 맙시다. NeiKos496님 우시겠어요.






  아. 망했다.

  키보드 대토론회가 벌어진 다음 날 아침, 파이논은 텅 비어버린 통장 잔고를 보고 머리를 부여잡았다.

  이번 달 월세야 어떻게든 집주인을 설득해서 다음 달로 미루면 된다지만(친구 좋다는 게 뭔가), 식비로 빼놓은 돈을 전부 채팅에 쏟아부었다는 게 문제였다. 마이데이 몰래 음식을 뺏어먹을까? 아니, 음식 얘기만 나오면 갑자기 눈을 번뜩이는 그 녀석이 눈치채지 못할 리가 없다. 차라리 사실대로 말할까? 아니면 이번 학기 학점을 포기하는 한이 있더라도 알바를 늘릴까?

  그때였다.

  방송 알림 외에는 거의 울리는 일이 없던 스트리밍 앱에서 메시지 팝업이 파이논을 부르고 있었다.

  ‘SkeMma720 님이 메시지를 보냈습니다! (친구로 등록되지 않은 사용자입니다. 주의하세요)’

  인간이 빛의 속도에 닿는다는 게 이런 걸 일컫는 게 아닐까 싶은 움직임으로, 파이논은 휴대폰 잠금을 풀었다.

 

시간 괜찮다면 오늘 잠깐 만났으면 하는데
(SkeMma720님이 타이핑 중입니다…)

저 오늘 완전 한가해요.

 

  어디든 갈게요, 라고 타이핑하던 파이논은 흠칫 제정신을 차리고 손가락을 멈췄다. 백스페이스를 연타한 뒤 그는 그나마 멀쩡해 보이는 문장으로 고쳐 메시지를 보냈다.

 

어디서 볼까요? 어디든 괜찮아요. 제가 맞출게요.




 

 그리고 다시 오후 3시의 카페로. 

  손대지 않은 아낙사의 유리컵에서 물방울이 또르르 흘러내렸다. 파이논에게 건넨 하늘색 봉투는 그의 손에서 다시 테이블 위로 위치를 바꾼 상태였다. 그야 팔로우하던 스트리머가 다짜고짜 나타나 돈 봉투를 쥐여 준다면 수상함을 넘어 사기꾼처럼 보이겠지, 부연 설명이 필요했음을 깨닫고 아낙사는 입을 열었다.

  “네가 어제 싸우던 사람, 내 누나야.”

  “……TimaTima 님이요?”

  “그래. 디오티마 누나. 아마 너 빼고 다 알고 있었을걸, 가끔 방송에 응원하러 오거든.”

  파이논의 눈앞이 잠시 깜깜해졌다. 동경하는 스트리머의 방송에서 채팅으로 배틀을 뜬 것도 모자라, 그 상대가 그 스트리머의 친누나였다니. 어디 파이논 사이즈의 성인 남성을 구겨넣을 만한 쥐구멍 없나? 이 카페의 단골들에게는 미안한 말이지만, 위생관념이 다소 결여된 직원들이 재직하고 있으면 좋겠다. 그래야 쥐구멍을 찾아서 파이논이 그 속에 숨을 수 있을 테니까.

  “누님께서 평소 귀염둥이라고 부르세요?”

  참지 못하고 그렇게 묻자, 반대쪽에 앉은 상대의 볼이 옅은 핑크색으로 물든다. 그가 음료를 들고 목을 축였다. 웅얼거리며, 아낙사가 유리컵 속에서 대꾸한다.

  “맨날 그러는 건 아니야.”

  “그럼 가끔은 그런다는 소리——”

  “크흠. 누나가 이 돈을 너한테 돌려주라고 하더군. 조금 놀리려던 게 너무 분위기가 과열됐다면서. 안 그래도 그럴 생각이었어. 그래서 고객센터에 환불을 요청했는데, 원칙적으로는 환불 불가고, 그마저도 결제한 본인이 아니면 접수조차 안 된다잖아. 그래서 직접 인출해서 가져온 거야. 수수료 값도 포함해서 정확히 계산했으니 원한다면 바로 확인해 보던가.”

  “필요 없어요.”

  “잘 생각해. 아직 대학생인 것 같은데, 아니야? 이러면 곤란하지 않겠어?”

  당장 이달 식비가 송두리째 사라졌으니 곤란한 건 사실이었다. 매일 버터 없이 하우스메이트가 사둔 식빵을 씹거나, 모델 에이전시에서 미팅 때마다 내주는 과자를 훔쳐 와야 할 판이었으니까. 하지만 저런 말을 면전에서 들으니 어쩐지 마음속에서 고집이 자라났다. 무슨 일이 있어도 이 돈을 받지 않겠다는 이상한 고집 말이다. 그와 동시에, 동경하는 아낙사를 난처하게 만들고 싶지 않다는 마음도 있었다.

  “그렇게까지 말씀하시니 돌려받겠습니다.”

  파이논이 하늘색 봉투에 손을 뻗었다. 잘 생각했다며 아낙사가 고개를 끄덕이는데, 파이논이 다시 입을 열었다.

  “단, 한 가지 조건이 있어요.”

  이 돈을 다 쓰는 동안 저랑 만나주세요.






  아낙사의 방송은 매주 월요일이 휴방이고, 나머지 요일은 밤 9시부터 새벽까지 이어지는 일정이었다. 충실한 시청자로서 이 스케쥴을 꿰고 있던 파이논은 첫 데이트 날짜를 고민 없이 월요일 저녁으로 제안했다. 장소는 파인 다이닝.

  약속 장소에 나타난 아낙사는 방송에서 보던 편안한 패션이 아니었다. 허리 라인을 벨트로 강조한 스트라이프 재킷과 몸에 꼭 맞는 짙은 색 슬랙스 차림이 그의 날렵한 체형을 돋보이게 했다. 파이논은 저도 모르게 자꾸만 시선이 옆으로 새는 것을 막느라 애를 먹어야 했다.

  “예약이 힘든 곳이라고 들었는데.”

  웨이터가 안내한 자리에 앉으며 아낙사가 넌지시 운을 떼자, 파이논은 다 방법이 있다는 듯 자신만만하게 미소 지었다. 사실은 마이데이에게 손발이 닳도록 빌어 얻어낸 연줄이었지만 말이다.

  마이데이 이야기가 나오니 말인데, 결국 파이논은 며칠 전 모든 걸 솔직히 털어놓았다. 한 달 치 식비를 인터넷 방송 도네이션에 죄다 부어버리고, 우여곡절 끝에 돈을 돌려받긴 했지만 이번에는 그 돈을 스트리머와 데이트하는 데 전부 쓰겠다고 말이다. 당연히 놀림감이 될 줄 알았는데 마이데이는 의외로 덤덤하게 고개를 끄덕일 뿐이었다. 의아해진 나머지, 파이논이 장난스럽게 그의 두꺼운 팔을 퍽 때렸다.

  “뭐야, 왜 안 놀려?”

  “후회하나?”

  진지한 눈빛으로 친구가 물었다. 후회하냐고? 아낙사의 누님 되시는 분에게 키보드 배틀을 걸었다는 사실이 후회막심하기는 하지만, 시간을 되돌린다고 해도 같은 선택지를 고를 것이다. 그 덕분에 아낙사와 직접 만날 수 있었으니까. 파이논은 망설임 없이 고개를 저었다. 그러자 “그럼 됐어”라는 짧은 대답과 함께 상황은 종료되었다. 마이데이는 파이논이 부탁한 파인 다이닝 예약도 군말 없이 받아주었다.

  두 사람의 식사는 물 흐르듯 매끄럽게 이어졌다. 솔직히 말하자면 파이논에게는 감질나는 양이긴 했다. 그러나 음식 수준이 훌륭하다는 걸 모를 정도로 파이논이 무지하진 않았고, 아낙사가 와인 페어링을 포함해 능숙하게 주문을 주도한 덕분에 분위기는 시종일관 화기애애했다. 노련한 웨이터가 두 사람의 대화를 방해하지 않을 정도로만 그들의 테이블에 들를 정도로. 이윽고 식사가 끝나 갈 무렵, 아낙사는 자연스럽게 제 쪽에 놓인 계산서를 집어 들려 했다. 그러자 파이논이 거의 테이블을 건너갈 기세로 그의 손을 붙잡았다.

  “이건 제가 내는 데이트라니까요.”

  붙잡힌 손목은 아프다기보다는 뜨거웠다. 아낙사가 계산서를 놓자 파이논이 그제야 안심하며 환하게 웃는다. 약간은 어색한 정장 셔츠 차림 뒤로 흰 털이 부숭부숭한 강아지 꼬리가 붕붕 흔들리는 게 보이는 것만 같았다.

 

정산내역: 지출금액 -5,032,550 포인트
(잔여 28,517,786 포인트)

 


 

  두 번째 데이트는 오크마에서 차로 3시간 걸리는 거대한 테마파크로 정했다.

  솔직하게 고백하자면, 파이논이 이 장소를 고른 이유는 단 하나였다. 아낙사가 어쩔 줄 몰라 하는 모습이 보고 싶었다. 스트리머 아낙사는 방송 중 시청자가 미션으로 ‘어미에 -냥 붙이기(10분 제한)’, ‘애교 부리기’ 같은 것을 걸면, 경멸이 가득 담긴 눈빛으로 가차 없이 취소 버튼을 누르는 사람이었다. 그런 아낙사가 사방이 귀여운 것으로 가득 찬 놀이공원에서 당황한 채 뚝딱거리는 모습이 보고 싶었다.

  결론부터 말하자면, 뛰는 자 위에 나는 자 있고, 키메라 위에 드로마스 있다고 하던가. 파이논의 깜찍한 계략은 대실패였다.

  아낙사는 입구를 지나자마자 안내판도 보지 않고 가까운 기프트샵으로 성큼성큼 걸어 들어갔다. 그러더니 진열대에서 키메라 머리띠와 드로마스 모자를 하나씩 덥석 집어 계산대 앞에 섰다. 뒤따라오는 파이논에게 그가 손을 쓱 내밀었다.

  “계산 안 해?”

  멍하니 있던 파이논이 허겁지겁 카드를 내밀었다. 영수증을 받아 파이논의 겉옷 주머니에 넣고, 아낙사는 자연스럽게 파이논의 백발 위로 키메라 머리띠를 씌워주었다. 두 사람의 키 차이 때문에 아낙사는 살짝 까치발을 들어야 했다.

  “잘 어울리네.”

  화끈거리는 얼굴을 감추려 파이논이 고개를 푹 숙였다. 그동안 아낙사는 제 몫의 드로마스 모자를 부끄러워하는 기색도 없이 눌러썼다. 드로마스 아낙사가 이끄는 대로, 파이논은 얌전한 키메라처럼 그 뒤를 쫄래쫄래 따라다녔다.

  진정한 놀이동산 전문가처럼, 아낙사는 시간대별로 사람들이 많이 몰리지 않는 어트랙션을 쏙쏙 골라 파이논을 데려갔다. 그중 파이논의 기억에 가장 강렬하게 남은 것은 네 번째인 수직 낙하 어트랙션이었다. 파이논은 운행 중 찍힌 자신들의 사진을 보고 눈물이 나도록 웃었다.

  “이렇게 웃기게 사진 찍힌 거 처음이에요. 이거 너무 마음에 드네요!”

  아낙사는 미간을 찌푸리며 기가 찬다는 듯 헛웃음을 흘렸다. 얼마나 잘생겼으면 (그야 잘생긴 건 사실이지만) 고작 이 정도가 인생 최악의 웃기는 사진이란 말이지? 파이논이 눈치채지 못하게 아낙사는 인화된 사진을 재빨리 지갑 안쪽, 신분증 뒤편에 끼워 넣었다. 맘속으로 투덜거리는 것과는 다르게 아낙사의 귀끝은 민트색 머리카락 사이로 옅게 붉어져 있었다.

  파이논은 나중에 안 사실이지만, 아낙사는 그 테마파크의 평생 회원증을 보유한 VVIP 고객이었다. 파이논은 테마파크에 평생 회원증이라는 게 존재한다는 걸 아낙사 덕에 처음 알았다.

 

정산내역: 지출금액 -8,806,963 포인트
(잔여 19,710,823 포인트) 




 

  세 번째 데이트는 현대미술 전시회였다.

  난해한 조형물들 사이에서 파이논은 목줄을 잃어버린 대형견 같은 표정으로 서 있었다. 그 눈길을 놓치지 않고 아낙사가 파이논의 옆구리를 툭 치며 소곤소곤 말을 걸었다.

  “이런 전시가 있는 줄은 어떻게 알았지? 보아하니 네 취미는 아닌 것 같고.”

  파이논은 뒷머리를 긁적이며 어물거렸다.

  “그게, 누님께서 알려주셨어요.”

  아낙사의 걸음이 멈췄다. 그가 추상화에서 눈을 떼고 파이논을 흘끔 올려다보았다.

  “……너 누나랑 연락해?”

  당황한 파이논이 지난번 일로 사과드리려다 친해진 것뿐이라며 손사래를 쳤지만, 아낙사는 미묘한 표정으로 파이논을 물끄러미 바라볼 뿐이었다. 그때부터는 어쩐지 분위기가 어색해졌다. 4층 테마전까지 둘러본 뒤, 파이논은 눈에 띄게 피곤해하는 아낙사를 택시에 태워 집으로 돌려보냈다.

 

정산내역: 지출금액 -3,355,033 포인트
(잔여 16,355,790 포인트)

 




  네 번째 데이트는 아낙사가 직접 지목한 장소인 드로마스 콜라보 카페에서 만나기로 했다.

  기대감 때문이었을까, 아낙사는 약속 시간보다 한참 먼저 도착하고 말았다. 하는 수 없이 그는 맞은편 카페로 들어가 적당히 책이라도 읽으며 시간을 보내기로 했다. 두 챕터만큼의 시간이 흐르고, 아낙사가 고개를 들자 어느새 창밖 풍경에 파이논이 첨가되어 있었다. 그는 아낙사를 기다리며 긴 대기석에 덩그러니 앉아 있었다.

  오늘 그는 채도가 낮은 푸른 색 외투에 흰색 바지를 매치한 차림이었다. 첫 데이트 때의 그 꽉 막힌 정장보다는 확실히 이런 자연스러운 옷차림이 훨씬 잘 어울린다고, 아낙사는 커피잔을 만지작거리며 생각했다.

  멀찍이서 구경하는 파이논의 모습은 꽤 흥미로웠다. 그는 기다리는 동안 가만히 있질 못했다. 옆자리에 앉은 초등학생 형제에게 먼저 말을 걸더니 주머니를 뒤적여 사탕을 나눠 먹고, 이번에는 가방에서 과자를 꺼내 반을 뚝 잘라 오물오물 씹어 삼켰다. 나머지 반쪽은 근처 중년 여성에게 건넨다. 아낙사는 그의 들뜬 목소리가 귓가에 들리는 것만 같았다. 이거 드실래요? 맛있어요! 창밖을 빤히 바라보던 아낙사의 머릿속을 문득 스치는 단어가 있었다.

  ‘귀엽네.’

  스스로의 독백에 놀라 아낙사는 숨을 삼켰다.

  그때, 쭈뼛거리는 태도의 행인 한 명이 대기석의 파이논에게 가까이 다가왔다. 둘은 짤막한 대화를 나누고, 파이논은 살짝 뺨을 붉히며 멋쩍은 듯 목덜미를 긁적였다. 상대가 종이 한 장을 내밀자 파이논이 신중하게 무언가를 써 내려가는 모습이 보였다.

  갑자기 아낙사는 불쾌한 감정이 넘실 쏟아지는 걸 느꼈다.

  이렇게 멀리서 바라보고 있으면, 파이논이 얼마나 남에게 쉽게 호의를 사는지, 또 얼마나 쉽게 남에게 호의를 나눠주는지 느낄 수 있었다. 아낙사로서는 다시 태어나지 않는 한 배울 수 없는 기질이었다. 손목시계가 아직 약속 시간 5분 전을 가리키지만, 아낙사는 책을 덮고 자리에서 일어났다. 잔 속의 커피를 그는 절반도 비우지 못했다.

  “오셨네요!”

  길을 건너는 아낙사를 알아보고 파이논이 반갑게 손을 내저었지만, 아낙사는 그 반가운 제스쳐에 화답할 기분이 아니었다. 조금 전 그 사람은 누구고, 또 무슨 대화를 나눴냐고 묻고 싶었다. 하지만 자신에게 그럴 자격이 없다는 생각이 발목을 잡았다.

  그날의 데이트는 지난 전시회 때보다도 분위기가 최악이었다. 그렇게나 고대하던 드로마스 카페였지만 아낙사는 도무지 식욕이 돋지 않았다. 그는 입을 꾹 다문 채 기계적으로 음식 사진만 찍어댔다. 옆자리의 파이논이 눈치를 보는 게 느껴질수록, 아낙사의 마음은 엎치락뒤치락 요동쳤다. 결국 포크를 내려놓고 아낙사가 충동적으로 선언했다.

  “콜라보 상품 전부 다 살 거야. 주문해줘.”

  파이논은 잠시 눈이 휘둥그레졌다가 고개를 끄덕이고 점원을 불렀다. ‘여기서부터 저기까지 다 주세요’ 하고 그가 부끄러운 듯 유치한 드라마 같은 대사를 읊는다. 점원들도 깜짝 놀란 기색이었지만 이 잘생긴 손님이 농담하는 게 아니라는 걸 깨닫자 빠르게 움직이기 시작했다. 주위에서는 대체 누가 저만큼 드로마스를 사랑하냐며 웅성거리는 소리가 들려왔다.

  카페를 나서는 아낙사는 무거울 정도로 두 팔 가득 쇼핑백을 들고 있었다. 파이논이 걱정스러운 얼굴로 택시 타는 곳까지 데려다주겠다고 손을 뻗었지만, 아낙사는 그 손을 가뿐하게 외면했다.

  “혼자 갈 수 있어.”

  아낙사는 끝내 뒤를 돌아보지 않았다. 돌아본다면 축 처진 강아지 귀를 한 파이논이 그를 바라보고 있을 것 같아서였다.

 

정산내역: 지출금액 -16,288,767 포인트
(잔여 67,023 포인트)

 


 

  남은 포인트, 67,023.

  고전 서사시에 ‘스틱시아 강을 건넌다’고 하는, 돌이킬 수 없는 지점(the Point of No Return)을 뜻하는 표현이 있던가. 파이논은 수중에 남은 돈을 내려다보며 지금이 그 순간이라고 생각했다.

  고작 67,023 포인트로 뭘 할 수 있지? 이걸론 마트에서 봉지 과자 하나도 사 먹을까 말까였다. 사탕 하나 정도는 살 수 있을지도. 어떡하지, 어떡한다. 조금 더 계획하고 써야 했는데. 아니, 그보단 드로마스 카페에서 생각보다 지출이 너무 컸다. 하지만 아낙사가 갖고 싶다는데 거절할 수도 없지 않은가. 그날을 떠올리면 파이논은 심장이 덜컥 내려앉는 기분이었다. 피로한 듯이 자꾸 눈을 비비는 아낙사, 미니 당근 하나도 다 해치우지 못하고 숟가락으로 음식을 뒤적거리던 아낙사, 결국 눈가가 빨개진 채로 택시 승강장까지 비틀거리며 걸어가던 아낙사. 파이논은 그 후로 아낙사가 연락을 차단한다고 해도 이해할 수 있었다, 마음은 무너지겠지만.

  결국 네 번이나 기회를 줬음에도, 파이논은 아낙사의 마음을 얻지 못한 게 분명해 보였다. 그는 휴대폰을 침대 위에 엎어 놓고, 대자로 몸을 뻗었다. 남은 67,023 포인트는 어떻게 해야 한담.

  옆구리에서 진동이 느껴졌다. 한 번, 그리고 이어서 또 한 번. 파이논은 한숨을 쉬며 더듬더듬 화면을 켰다.

 

우리 집에서 만날래?
내일 1시 반. 점심 먹지 말고 와

 

  아래로는 주소 정보를 담은 메시지가 이어졌다. 세상에. 파이논이 침대 위에서 탭댄스라도 출 기세로 방방 뛰었다. 벽 너머 시험공부가 한창이던 마이데이가 사자후 같은 고함을 지르지만 (“조용히 좀 해!!”), 천상의 티탄들의 멜로디가 흐르기 시작한 파이논의 귀에는 들리지 않는다.

 


 

  다음 날, 파이논은 두근거리는 마음으로 아낙사가 알려준 주소 앞에 섰다.

  수중에 남은 돈, 고작 67,023 포인트. 파이논은 이 돈을 어떻게 쓸지 고민하다가 결국 마트에 들러 사탕을 샀다. 촌스러운 리본 장미로 감싸진 사탕이었다. 여러 가지 맛 중에서 페퍼민트 맛만이 인기가 없었는지 1+1 행사 중이었다. 두 개를 집어 들고 파이논이 계산대에 섰다. 하나는 아낙사 거, 하나는 누님 거. 알뜰하게 쓰고 이제 남은 포인트는 거의 없었다.

  초인종을 누르자 안쪽에서 ‘네’ 하고 답하는 아낙사의 목소리가 들렸다. 문이 열리고 나타난 아낙사는 의외의 모습이었다. 그는 부드러운 크림색 브이넥 니트에 진청색 바지를 입고 있었다. 실내화는 지난번에 산 드로마스 콜라보 카페 상품이었다. 앞치마가 드로마스 무늬가 아니라는 게 역으로 신선했다. 늘 손가락을 화려하게 장식하던 반지들도 보이지 않았다. 머리는 체크무늬 스크런치 하나로 대충 묶어 내려서, 어쩐지 평소보다 말랑하고——가정적으로 보였다.

  “누님은요?”

  사탕을 내밀며 파이논이 물었다. 아낙사는 짧게 고마움을 표하고 사탕을 주머니에 넣었다.

  “회사. 나와 달리 9시부터 5시까지 일하는 평범한 직장인이거든.”

  아낙사가 미리 준비한 실내화는 파이논의 발 사이즈에 맞지 않았다. 그가 멋쩍게 웃으며 흰 양말을 신은 발을 부끄러운 듯이 꼼지락거린다. 아낙사는 식탁으로 향하다 말고 문득 생각난 듯 물었다.

  “그러고 보니 너 오늘 수업은?”

  “오늘 공강이에요.”

  사실은 자체 휴강이었지만, 파이논은 뻔뻔하게 대답했다. 하지만 아낙사가 눈을 가늘게 뜨고 ‘정말로?’ 라며 쏘아붙이자 결국 사실대로 실토할 수밖에 없었다.

  “실은 수업이 있긴 한데…… 괜찮아요! 교양이니까요. 한 번 빠진다고 큰 문제는 없을 거예요, 음, 아마도.”

  “졸업 학년이라고 하지 않았어?”

  “그걸 기억하셨네요.”

  지나가듯 했던 말을 아낙사가 기억해 준 게 기뻤다. 파이논은 활짝 웃는다. 졸업 학점이 모자라 신청한 교양 수업 <생명이란 무엇인가>는 철학적인 제목과 달리 생물학 비중이 높은 과목이었다. 그쪽 전공 지식은 제로 베이스라고 해도 좋을 파이논에게는 교양치고는 버거운 게 사실이었다. 파이논이 투덜거리는 소리를 듣던 아낙사는 피식 웃음을 터뜨렸다.

  “칼립소 교수지? 그 수업이 아직도 열리나 보네.”

  “그걸 어떻게 아세요?”

  알고 보니 아낙사는 같은 대학 졸업생이란다. 파이논이 눈을 반짝이며 언제 졸업했냐고 물었지만, 아낙사는 끝내 알려주지 않겠다고 고집을 부렸다. 스트리밍 채널 프로필에 나이가 뻔히 적혀 있는데도.

  식탁에 마주 앉아 아낙사가 만든 간단한 식사를 마친 뒤 (놀랍게도 먹을 만했지만, 파이논은 굳이 이런 감상을 공유하지는 않았다), 두 사람은 직접 내린 커피를 마시며 대학 이야기를 나눴다. 캠퍼스에서 제일 오래된 건물 이야기. 도서관 증축 계획 이야기. 아낙사의 석사 졸업 논문을 찾아봐야겠다고 파이논이 말하자, 늘 당당하던 아낙사가 살짝 부끄러워하던 것. 지금까지 재직하는 옛 교수들 이야기.

  이야기가 드문드문 끊어지고, 두 사람뿐인 부엌에는 어느새 편안한 침묵이 감돌았다. 한참을 망설이던 파이논이 조심스레 입을 열었다.

  “이제 134포인트 남았는데, 이건 그냥 없는 셈 쳐야겠죠?”

  아낙사는 깊게 숨을 들이마시더니 옅은 미소를 지었다. 

  “그동안 즐거웠어. 진심이야.”

  “아낙사. 저한테 다시 기회를 줄 수 없나요?”

  “그건, 네 다른 데이트 상대에게 조금 불성실한 태도인 것 같은데.”

  파이논은 어리둥절한 표정으로 되물었다. 다른 데이트 상대라뇨? 아낙사는 지난번 데이트 때 다른 사람에게 번호를 주지 않았냐며, 꾹 눌러 왔던 서운함 한 스푼을 툭 내보였다.

  “번호요? 그게 대체…… 아!”

  파이논의 눈동자에 점차 이해의 빛이 스며들었다. 그는 다급하게 손을 저었다.

  “그런 거 아니에요! 그분은 그냥 제 팬이에요.”

  “뭐?”

  “그러니까 제가 나온 잡지에 사인을 부탁해서…… 으으, 처음부터 제대로 설명할게요!”

  파이논은 부끄러움을 무릅쓰고 그가 모델 아르바이트를 하고 있다는 사실을 털어놓았다. 그 일 자체가 부끄러운 건 절대 아니다. 다만, 어엿한 직업인인 아낙사 앞에서 어중간한 마음가짐으로 업계에 한 발을 담그고 있다는 걸 숨기고 싶었을 뿐이었다. 그게 눈뭉치처럼 불어나서 이런 오해를 불러 올 줄이야. 파이논은 간절한 마음에 명함을 찾으려 주머니를 뒤적였지만, 나오는 건 먹다 남은 과자와 에너지바, 육포, 그리고 짤랑거리는 동전지갑뿐이었다. 아낙사는 대체 저런 것들을 왜 들고 다니나 싶으면서도, 당황해서 쩔쩔매는 파이논의 모습이 꽤 귀엽다고 생각했다.

  “알았어.”

  아낙사는 놀이공원에서 찍은 사진을 떠올렸다. ‘이렇게 웃기게 찍힌 건 처음’이라며 해맑게 웃던 그 말은, 정제된 화보만 찍어 온 모델의 순수한 감탄이었던 것이다.

  “진짜예요, 믿어 주세요! 저한테는 아낙사 뿐이에요. 데이트도 아낙사랑 한 게 처음이라, 옷도 에이전시에서 코디해 준 거 그대로 입고, 식당 예약할 땐 하우스메이트한테 빌어서 겨우 성공한 거고, 데이트 전날 항상 고향 친구한테 영상 통화로 데이트 예절 코칭까지 받았단 말이예요…….”

  이럴 수가. 파이논이 더 부끄러운 고백을 쏟아내기 전에, 아낙사가 손가락을 뻗어 그의 입술을 꾹 눌러 막았다. 아낙사의 뺨이 발그레하게 달아올랐다.

  “알았어, 알았다니까! 파이논.”

  “믿어 주시는 거죠?”

  파이논이 금방이라도 울음을 터뜨릴 듯 눈물을 글썽이며 매달리자, 아낙사는 잠시 말을 잃고 그 얼굴을 빤히 바라봤다. 이럴 때마저 잘생겨 보이는 건 반칙 아닌가. 아낙사는 항복하듯 작게 한숨을 내쉬며 두 손으로 파이논의 뜨끈한 볼을 감싸 쥐었다. 그러고는 그대로 쪽, 하고 가벼운 입맞춤을 건넸다.

  “!!!”

  “다음 데이트 기대할게. 아, 그리고 나 몰래 누나랑 상담하는 건 금지야. 다른 사람하고도 상담하지 마. 네가 고른, 너만의 데이트에 날 데려가 줘.”

  네! 하고 파이논이 당당하게 외친다. 울다가 웃다가, 하여간 못 말리는 녀석이라고 아낙사는 애정 어리게 생각했다.

 

정산내역: 지출금액 -66,889 포인트
(잔여 134 포인트)

연산 재시작……?

 





  그로부터 몇 달 뒤, SkeMma720 채널 채팅창은 연일 눈물바다였다. 부동의 새벽반이자 야근 방송의 아이콘이었던 아낙사의 방송 종료 시각이 눈에 띄게 빨라진 탓이었다. 휴방 공지도 잦아진 데다 평소보다 일찍 방종 버튼을 누르려는 아낙사에게 시청자들이 이유를 묻자, 그는 대수롭지 않다는 듯 툭 던졌다.

  “강아지를 한 마리 기르게 됐거든. 늦은 시간까지 방송하면 침대에서 혼자 슬퍼해.”

  자연히 채팅창에는 질문이 쏟아졌다. 아낙사는 방송 중 신변 이야기를 많이 하지 않는다. 그런 그가 흘린 부스러기 같은 정보에, 시청자들은 게걸스럽게 달려들었다. 

  – 당연히 고양이 키울 줄 알았는데

  – 아냑사고라스 아니었냐며

  – 종이 뭐예요?

  – 엥? 강아지랑 같이 자요?

  마지막 채팅 메시지가 눈에 들어오자 아낙사는 당연한 걸 묻는다는 듯 퉁명스럽게 대꾸했다.

  “그럼 그렇게 어린 강아지를 혼자 재워? 당연히 같이 자야지.”

  밤 12시 10분. 평소라면 한참 텐션이 올랐을 시간이지만, 아낙사는 “이 판까지만 하고 끝낸다”며 무심하게 마우스를 움직였다. 그런데 한창 집중하던 찰나, 마이크 너머로 문이 벌컥 열리는 소리와 함께 누군가의 목소리가 섞여 들어왔다.

  “아낙사아아—”

  잠결에 젖어 잔뜩 늘어진, 누가 들어도 커다란 성인 남성의 목소리였다. 아낙사의 동공이 흔들렸다. 그는 빛의 속도로 카메라를 껐지만, 이미 마이크를 타고 들어간 ‘아낙사아아’라는 애교 섞인 목소리는 주워 담을 수 없었다.

  채팅창은 순식간에 물음표로 도배되었다. 

  – 방금 뭐야?

  – 요즘 강아지는 말도 하네

  – 잠깐만, 나 저 목소리 누군지 알 거 같아 혹시 파

  화면에는 비정상적일 만큼 빠른 속도로 안내 문구가 떴다.

 

SkeMma720 님은 오프라인입니다.

 

  모니터의 검은 화면 위로 아낙사의 붉어진 얼굴이 비쳤다. 침대에서 기어 나와 아낙사의 허리를 뒤에서 껴안으며 어깨에 턱을 괴는 강아지를 보며, 아낙사는 깊은 한숨을 내쉬었다.

  “파이논, 내가 방송할 때는 들어오지 말라고 했잖아.”

  “아낙사아, 졸려요. 이제 자러 가요.”

  파이논이 샴푸 냄새가 나는 백발을 아낙사의 목덜미에 비비며 칭얼거렸다. 두 사람의 향은 비슷한 듯 달랐다. 아낙사는 투덜거리면서도 허리를 감싼 파이논의 큰 손 위에 자신의 손을 겹쳤다. 당장 내일 방송 공지를 뭐라고 써야 할지 머리가 아파졌지만, 일단은 눈앞의 강아지를 재우는 게 급선무였다.

  내일의 일은 내일의 아낙사고라스에게 맡기자. 아마도 어제의 아낙사고라스를 죽이려 들겠지만.

Fin.