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문 바로가기

hsr/hsr

[파이낙사] 사랑의 대화







  그들의 수많은 오후가 그러했듯이, 누스페르마타의 현인을 시답잖은 대화로 이끈 것은 이제는 하나의 접미사가 되어 버린 파이논의 예의 그 질문이었다, “선생님은 어떻게 생각하세요?” 라고 하는.

  아낙사는 코로 긴 숨을 뱉으며, 채점 중이던 과제물에서 서서히 자신의 제자 쪽으로 시선을 돌린다. 파이논은 의자에 얌전히 앉아 있었다. 긴 다리를 불편하게 접고, 무게중심을 잡느라 다소 구부정한 자세로. 애처로울 만큼 자그마한 의자는 제자의 덩치 아래서 명백하게 비명을 지르고 있었다. 훨씬 이전부터 아낙사의 마음속에 이런 의심이 피어나기는 했다, 언젠가 파이논이 그의 유일한 여분 의자가 감당할 수 없을 만큼 커다랗게 자라는 게 아닐까 하는. 그리고 지난 여름을 기점으로 아낙사의 의심은 현실이 되었다. 그야말로 눈 깜빡할 사이에 청년이라는 표현이 어색함이 없어진 파이논은, 금방이라도 깨질 물건을 다루듯 조심조심 의자에 엉덩이를 얹었다. 튼튼한 두 다리를 수레에 앉은 어린애처럼 달랑거리거나, 쉽게 흥분해서 자리를 박차고 일어나는 일 같은 건, 여름이 끝나갈 무렵엔 이미 두 번 다시는 재현될 수 없는 과거의 산물이 되어 있었다.

  어깨를 으쓱하고, 아낙사는 펜을 놓는다. 파이논의 질문이 공기 중에 감돌고 있었다.

  “그 문제에 관한 내 견해가 어떤 건지는 이미 알고 있을 텐데.”

  파이논이 고개를 휙휙 저었다.

  “아니죠. 선생님께서 티탄과 티탄 신앙, 덧붙이자면 불을 쫓는 여정에 대해 어떻게 생각하시는지는 잘 알지만, 제가 여쭤본 건 ‘티탄들이 창조하기 전에 세상은 어떤 모습이었을까’라는 거였어요. 이 둘은 전혀 관련 없는 별개의 문제잖아요.”

  “모르는 척하는 연기가 형편없군, 파이논. 네 질문이 성립하려면 티탄들이 우리가 아는 세상을 창조했다는 게 역사적 사실이자 과학적 사실로 전제되어야 하잖아. 같은 문제야.”

  “아, 선생님,” 파이논이 있는 힘껏 눈썹을 구부렸다. “그냥 대답해 주시면 안 될까요? 제자의 응석을 받아주시는 셈 치고요?”

  “네 응석은 이미 충분히 받아주고 있는 것 같은데. 일례로, 학생 상담 시간은 벌써 일각 전에 끝났지만 넌 과제물을 받아 간다는 핑계를 대면서 아직까지 내 연구실에 붙어 있지. 뒤에서부터 걷어 왔으니까 네 차례는 맨 마지막이 될 거라는 걸 알면서도 말이야. 이 정도면 충분히 응석을 받아주고 있는 거 아닌가?”

  “그럼 왜 뒤에서부터 채점하지 않으시는데요?”

  수레국화의 파랑을 닮은 눈동자가 기대감에 반짝인다. 그러나 그가 얻은 반응은 짧고 매몰찬 ‘흥’ 하는 숨소리뿐이었다. 뭐, 예상하지 못한 바는 아니다.

  “솔직히 말씀드리자면 안심했어요. 오늘 낮에 이 문제, ‘티탄들이 창조하기 전의 세상은 어떤 모습일까’에 관해서 베네라티오 학파 교수님 몇 분과 의견을 주고받을 기회가 있었거든요. 혹시라도 그분들이 선생님께 항의하러 오진 않을까 걱정했는데, 선생님 반응을 보니 조용히 넘어간 모양이네요.”

  “하! 그 사람들의 남아도는 시간을 너무 과소평가한 것 같군, 파이논. 이미 한 차례 다녀갔어. 네가 오기 전에 말이야.”

  “네?”

  파이논의 ‘네?’는 꼬리가 높고 긴, 서운함이 가득 담긴 소리였다. 그가 주인의 배신을 목격한 강아지처럼 한층 높아진 목소리로 꿍얼거리기 시작했다.

  “왜 절 부르지 않으셨어요, 바로 근처에 있었다고요. 알았으면 당장 달려왔을 텐데.”

  “뭐 하러? 몇 마디 대화를 나눈 게 전부야. 하는 말이라고는, 진부해서 귀를 기울일 가치조차 없더군. 전도유망한 청년을 타락시킨다느니, 쓸데없는 사상을 주입한다느니.”

  “선생님…….”

  “그래서 네가 내 제자인 건 맞지만, 그렇다고 모든 공을 스승인 내게 돌리는 건 잘못된 주장이라고 말해줬지. 네 머리로 직접 생각해서 던진 질문인데, 내 덕이라고 말하는 건 옳지 않잖아?”

  “정말 감사합니다. 그런데 또 이런 일이 있으면 그때는 일단 절 불러주셨으면 좋겠어요.”

  “그건 그때 가서 두고 보자고. 그나저나 대체 무슨 의견을 나눴길래 그자들을 그렇게 머리끝까지 화나게 만든 거지?”

  파이논이 움찔하더니 슬슬 스승의 눈치를 살폈다. 아낙사는 케이프 아래로 팔짱을 끼고, 다소 도발적인 미소를 띠며 그를 올려다보고 있었다. 그를 어떤 꿀음료보다도 취하게 만드는, 스승의 감미로운 관심이었다.

  “별거 아니었어요. 그저 선생님께 배운 대로, 순수하게 제 의문을 표했을 뿐이었는데요…….”






  “제 고향 엘리사이 에데스엔 이런 이야기가 있었어요,” 어느 오후의 정적을 가르고 파이논이 입을 열었다.

  새로 들여놓은 튼튼한 의자 덕분에, 이제 그가 긴 다리를 쭉 뻗고 느긋하게 기지개를 켜도 불길한 삐그덕 소리가 따라붙지 않았다. 그 평화로운 광경을 지켜보던 아낙사의 입가에도 작게 만족스러운 미소가 번졌다.

  “가끔 반딧불이가 유독 많아지는 해가 있었거든요. 그럴 때면 어른들은 항상 말씀하시곤 했죠. 저건 아퀼라를 피해 별들이 잠시 지상으로 내려와 풀잎 끝에서 쉬어가는 거라고. 저 멀리 오크마의 여명 기계가 너무 눈부셔서 길을 잃은 별들이라고 하는 어른들도 있었죠. 아이들은 그 말을 믿고 함부로 손을 대지 않았어요. 별의 휴식을 방해해선 안 되니까요.”

  파이논이 낮게 웃음을 터뜨렸다.

  “어릴 땐 정말로 믿었다고요! 밤하늘을 올려다보고, 별이 없는 자리를 발견하면 거기 있던 별이 툭 떨어져서 우리 집 근처 밀밭을 유영하고 있다고 생각했다니까요.”

  아낙사는 대답 대신 서류 위로 시선을 고정했다. 하지만 펜 끝은 잉크가 마를 정도로 멈춰 있었다.

  “그런데 피시아스 선생님이—아, 저희 마을 학교의 한 명뿐인 선생님이셨는데요. 제가 일기에 그 별 이야기를 썼더니, 다음 날 수업 시간에 반딧불이의 발광 원리를 아주 상세히 설명해 주시더라고요. 어렸던 제가 다 이해할 순 없었지만, 설명을 듣고 나니 뭐랄까…… 다시는 그 빛을 예전만큼 아름답게 느낄 수 없었어요. 재미없는 어른이 되어 버린 기분이었달까요, 하하.”

  잠깐의 정적이 흘렀다. 아낙사가 손가락 사이로 펜을 가볍게 굴리며 시선을 들었다.

  “그래, 그때는 선생님의 설명을 귀담아듣는 학생이었나 보지? 어떤 원리였는지 기억하나?”

  파이논이 눈을 깜빡이다 곤란한 듯 미소 지었다.

  “……다시 한번 일깨워 주시겠어요?”

  “기억 못 한다는 소리군. 됐어. 그건 반딧불이의 몸 안에서 특정 물질이 공기와 반응하며 내는 빛이야. 에너지를 열로 낭비하지 않고 거의 빛으로만 치환하지.”

  아낙사가 무심하게 덧붙였다.

  “효율로만 따지자면 여명 기계보다도 훌륭하군. 그런 의미에선 연구할 가치가 충분해.”

  자연스러운 신성 모독에 파이논이 희미하게 웃었다. 스승의 발언을 막을 만큼 파이논이 독실한 티탄 신앙의 신봉자인 것은 아니었다. 아낙사는 펜을 내려놓고 손깍지를 낀 채 먼 곳으로 시선을 던졌다.

  “너는 원리를 알고 나서 그 빛이 덜 아름다워졌다고 했지. 하지만 내 생각은 달라. 저울의 한쪽엔 너희 마을 어른들이 네게 들려주던 이야기가 있고, 다른 한쪽엔 피시아스 선생이 밝힌 이 세상의 진실 한 조각이 있지. 너는 이야기에는 아름다움이 있고, 진실에는 이 아름다움을 파헤치는 차가움이 있다고 생각하는 거겠지? 개인적으로는 과학적 설명이 인간의 이야기보다 매력적이지 않다는 의견엔 동의할 수 없지만…….”

  아낙사가 고개를 돌려 파이논의 파란 눈동자를 정면으로 응시했다.

  “어린 네가 늦은 밤 밀밭을 지날 때, 별을 깨울까 봐 발끝으로 걷던 그 마음은 반딧불이의 원리를 알게 되었다고 해서 ‘별것 아닌 것’으로 변하지 않아. 자연의 무심한 설계가 인간에게 어떤 마음을 이끌어냈다면, 나는 그게 사람들이 흔히 말하는 신들의 기적 따위보다 훨씬 더 경이롭다고 생각하는데.”

  파이논은 한동안 말이 없었다. 그러다 천천히, 입가에 숨길 수 없는 미소가 번졌다.

  “선생님.”

  “왜.”

  “큰일 났어요.”

  “이번엔 또 뭐지?”

  “그렇게 말씀하시면 이제 반딧불이를 볼 때마다 설렐 것 같잖아요.”

  아낙사가 다시 서류로 고개를 숙이며 펜을 잡았다.

  “그건 내 책임이 아니지.”

  “아니요,” 파이논이 의자 깊숙이 몸을 기대며 대답했다. “이건 전적으로 선생님 책임이에요.”






  문밖에서 들려오는 노크 소리에는 특유의 리듬이 있었다. 망설이면서도 자신의 존재를 각인시키고 싶어 하는 어떤 절제된 집요함 같은 것이. 슬슬 찾아올 때가 되었다고 생각했지, 하고 아낙사는 문을 열었다. 문틀에 기대 있는 파이논은 나무 정원의 가장 의심 많은 사람조차도 매료시킨 그 눈부신 미소를 띠고 있었다.

  “제가 보고 싶으셨죠, 아낙사 선생님?”

  “복도로 쫓겨나고 싶나 보지?”

  매정한 대꾸에도 파이논은 그저 소리 내어 웃을 뿐이었다. 이제 제 지정석이나 다름없게 된 그 튼튼한 의자에 파이논이 털썩 주저앉았다. 살짝 패인 눈가에는 젊음으로도 숨길 수 없는 피로가 서려 있었다. 안부를 묻는 말이 아낙사의 입안을 굴렀지만, 그는 결국 그 말을 목구멍 너머로 삼켰다.

  오늘의 주제는 이것이었다——선생님은 만약 시간을 되돌릴 수 있다면, 어떻게 하시겠어요? 아낙사는 천천히 숨을 고르고 그의 수많은 가면 중 가장 침착한 표정을 지어본다.

  “시간을 돌려서 뭘 하려고?”

  그러자 파이논의 어깨가 눈에 띄게 굳었다. 아낙사는 아랑곳하지 않고 말을 이었다.

  “그날 일을 없던 걸로 하고 싶은 거라면, 내 대답은 이거야. ‘엘리사이 에데스의 파이논, 끝내 멍청해지고 싶은 건가?’ 그래, 네가 한 말은 부적절했지. 시의적절하지 않았고, 장소도, 상대도, 모든 게 적절하지 않았어. 그러면 그걸 없던 일로 만든다고 해서, 네가 조금이라도 더 성장할까?

  파이논, 거절당할 확률이 압도적인 상황에서도 너는 네 감정을 표현하기로 결심했지. 물론 무모한 짓이었어. 그 무모함의 결과가 어떤 것이었는지는 굳이 내가 되풀이할 필요가 없겠지. 너는 이제 그게 오답이었다는 걸 알고, 한층 더 성장할 계기를 얻은 거야. 그 성장의 기록을 파기하겠다고? 그건 스승으로서 내가 허락하지 않아.”

  한동안 연구실에는 침묵이 내려앉았다. 그러다 파이논이 천천히 고개를 들었다.

  “선생님은 정말이지…… 마지막까지 제 마음을 가장 잔인하고도 완벽한 방식으로 지켜주시네요. ”

  “착각하지 말도록. 어디까지나 네 선생으로서 하는 말이야.”

  “알아요,” 파이논이 긴 한숨을 쉬며 말한다. “그걸 어떻게 모르겠어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