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문 바로가기

hsr/au

[파이낙사] (AU) 너만큼 코르셋을 조여 주는 사람이 없더라

 

 

아낙사고라스 >
Text Message · SMS
Today 10:04
너만큼 코르셋을 조여 주는 사람이 없더라.



 

  자그마치 10분째, 파이논은 휴대폰을 노려보는 중이었다.

  아낙사로부터 그 문자가 도착했을 때는 막 외출하려던 참이라, 파이논의 한쪽 발에만 구두가 신겨 있었다. 일기예보를 보고 고른 니트 풀오버와 봄버 재킷 조합이 따뜻한 실내에서 슬슬 갑갑하게 느껴진다. 이쯤 되면 차라리 외출을 포기하고 실내복으로 갈아입거나, 아니면 휴대폰을 치우고 그냥 문을 열면 될 텐데, 파이논은 지난달에 바꾼 신형 휴대폰이 마치 그를 개인적으로 모욕하기라도 한 것처럼 차가운 눈으로 노려보는 것 말고는 달리 아무런 행동도 취할 수가 없었다.

  「너만큼 코르셋을 조여 주는 사람이 없더라.

  헤어진 연인이 이런 메시지를 보내는 건, 대체 무슨 의도지?

  파이논의 머리가 터질 것처럼 팽팽하게 돌아갔다.

  수수께끼 같은 그 메시지 위로 과거 그들이 나눈 모든 대화가 착실히 백업되어 있었다. 백업 기능이 이렇게 훌륭한 줄 알았다면 휴대폰을 더 빨리 새것으로 바꿀 걸 그랬다. 이 기록을 잃어버리는 게 싫어서 액정이 깨진 채로 출근하던 과거의 자신이 바보처럼 느껴지는 순간이었다.

  오늘 10시 4분과 마지막 메시지 사이에는 무려 4년하고도 3개월이라는 공백이 있었다. 코르셋 운운한 그 메시지 내용 탓에, 파이논의 뇌는 자연스레 그 4년 3개월 동안 아낙사의 허리 위를 거쳐 갔을지도 모르는 여러 낯선 손들을 상상하고 말았다. 거칠었을까, 부드러웠을까. 그 가느다란 허리를 가볍게 덮을 수 있을 만큼 큰 손도 있었을까. 그 손들이 그의 아낙사를 소중히 대했기를 파이논은 진심으로 바랐다. 아낙사는 그럴 만한 가치가 있는 사람이고, 그것도 모르는 놈은 아낙사에게 손을 댈 자격이 없다—는 건 표면 상의 이유이고, 이것과는 비교도 되지 않을 만큼 깊고 추악한 질투 같은 감정이 제 마음속 깊은 곳에 숨겨져 있음을 파이논은 알고 있었다.

  그는 아낙사가, 무려 아낙사가, 누군가에게 거칠게 다뤄질 만큼 타인에게 틈을 허용하는 게 싫었다. 그게 다정함에 의한 것이든, 혹은 강압에 의한 것이든 파이논에게는 모조리 끔찍한 상상이었다.

  ‘아낙사…….’

  답을 보낼 생각은 하지도 못한 채, 파이논은 왼발에만 구두를 신은 그 모습 그대로 현관에 스르륵 주저앉았다. 메시지를 스크롤하며, 파이논의 기억은 서서히 그들이 막 이별을 나눈 4년 3개월 전으로 거슬러 올라갔다.

 


 

  언젠가 아낙사가 큰 소리로 이렇게 불평한 적이 있다. 인생에 큰 일이 있을 때마다 술로 도피하는 현대 사회의 풍습은, 삶의 모든 문제를 신의 뜻으로 돌리는 종교와 다를 바가 없다고. 그 말을 하는 아낙사의 손에는 그날 밤 다섯 병째인 맥주가 들려있었고, 파이논은 적당히 알딸딸한 상태로 실실 웃으며 그 병에 잔을 부딪혔었다. 나의 사랑스러운 모순덩어리 연인에게 건배!

  그 후엔 어땠더라, 두 사람 모두 진탕 취하고 키스하기 시작했던가?

  아낙사가 갈고 닦은 대외적인 이미지, 즉, 해자를 파고 성벽을 높게 쌓은 요새 같은 모습에서는 상상하기 어렵겠지만, 그는 사실 그럴 마음만 먹으면 제법 칠칠맞지 못할 수 있는 사람이었다. 이때도 마찬가지였다. 드레스 셔츠가 허벅지를 아슬아슬하게 가린 차림으로, 술에 취해 뜨거워진 뺨을 파이논의 가슴에 비비며 아낙사가 칭얼대기 시작했다. 갑갑해. 벗겨줘. 혼자선 힘들어. 네가 해 줘. 그러면 파이논은 충직한 연인답게, 그 자신도 적당히 취기가 오른 상태이면서도 아낙사의 척추를 따라 등 뒤로 길게 이어진 앙증맞은 새틴 단추를 하나씩 풀어 주는 것이었다. 파이논이 조금만 힘을 줘도 이 섬세한 단추들은 투둑 소리를 내며 뜯겨나갈 것이다. 그런 상상을 하자 콧노래가 나올 만큼 즐거워졌다. 조금씩 드러나는 등을 따라 천천히 키스를 남기자, 엎드린 자세로 누워 있던 아낙사가 부르르 몸을 떨었다.

  그건 때론 단추이기도 하고, 구조가 복잡한 지퍼일 때도 있었고, 파이논이 아침에 꽉 조여 묶은 코르셋인 날도 있었다. 일부러 이러는 게 아닐까 의심될 정도로, 아낙사는 혼자 힘으로 벗기 힘든 옷만 골라 입었다. 진실이 어쨌든 파이논은 남들이 모르는 아낙사의 일면을 알고 있다는 황홀함에 푹 빠져 있었다. 그는 이 특권을 놓칠 생각이 전혀 없었다.


  두 사람의 관계가 조금씩 삐그덕거리기 시작한 건, 파이논의 부기장 승진 시기부터였다.

  동료들이 열어 준 승진 축하 파티가 끝나고, 택시에 몸을 실어 파이논의 집으로 향하던 길이었다. 아낙사는 피곤했는지 조금 전부터 눈을 꼭 감은 채 파이논의 어깨에 고개를 기대고 있었다. 심야의 도로를 천천히 달리며 차내는 차분한 정적에 감싸여 있었다. 열린 창문 틈으로 들어오는 밤공기가 조금은 미지근했다.

  “앞으로 자주 못 보겠네.”

  덤덤히 뱉은 그 말은, 지금 생각해보면 대화로의 초대가 아니라 이미 내린 결론을 전달하려는 아낙사 나름의 시도였을지도 모른다. 아낙사에게 익숙한 일상은 이미 깨지기 시작했다. 인생을 사는 이상 필연적인 일이다. 그러므로 아낙사는 선제적으로, 보호막을 두르는 데 익숙한 사람답게, 파이논의 부재로 인해 상처를 받기 전 먼저 거리를 두기로 했을 뿐이었다.

  그리고 그때 파이논은 뭐라고 했던가.

  “휴가 자주 내도록 노력해볼게요.”

  “너무 무리하지 마.”

  “아낙사를 위해선 당연한 일이죠.”

  “괜…… 고마워.”

  속삭이듯이 말하고는 아낙사가 반대쪽으로 스르르 고개를 미끄러뜨렸다. 그날 밤 아낙사는 피곤하다는 핑계를 대며 옷을 갈아입지 않고 침대로 들어왔다. 차가운 발끝이 파이논의 다리에 닿았다. 아낙사가 아끼는 셔츠가 구겨지는 것도 아랑곳하지 않고, 파이논은 그의 셔츠 아래로 손을 넣어 긴장한 몸을 가볍게 지분거리기 시작했다. 그러다 파이논의 손이 단추로 향하자, 아낙사가 허리를 홱 틀며 불 꺼진 침실에서도 보일 만큼 세차게 고개를 저었다.

  “아낙사?”

  “그냥 둬.”

  그것이 그날 밤의 두 번째 신호였다. 첫 번째는 택시 안에서, 두 번째는 침대 위에서. 이제는 파이논도 알 수 있었다. 아낙사가 자기만의 방식으로, 미묘하면서도 섬세한 언어로 천천히 마음을 닫고 있었다는 것을. 논리와 학술의 세계에서 아낙사는 명확하고 확실한 걸 즐기는 사람이었다. 그렇게나 똑똑한 제 연인이, 감정과 복잡한 관계의 영역에서는 발달이 더딘 아이 수준에 머물러 있었다는 걸 파이논은 너무 뒤늦게 깨닫고 말았다.


  변명이 아니라, 그 후로는 정말 바빠서 서로 얼굴조차 보기 어려운 날들이 이어졌다.

  아낙사와 나누는 메시지의 간격이 점점 길어졌다. 휴가 날짜를 맞추려고 아낙사의 일정을 물으면, “바쁜 사람 귀찮게 하고 싶지 않다”는 말이 돌아왔다. 운명의 장난인지 파이논이 조금 한가해질 무렵 아낙사의 프로젝트 일정이 피크를 찍었다. 근무지에서 아낙사가 좋아할 법한 물건—그 지역 한정판 드로마스 인형이나 절판된 철학서 같은 것들을 발견해서 꼬박꼬박 사진을 보내면, 답장이 아니라 사진에 하트 표시나 심지어는 ‘확인했음’ 표시를 남기는 게 점점 당연한 일이 되어 가고 있었다.

  두 사람의 첫 말다툼을 파이논은 여전히 기억하고 있었다. 어느 일요일, 모처럼 일정이 맞은 두 사람이 느긋한 오전을 보내던 때였다. 아낙사는 거울 앞에 앉아 머리를 빗는 중이었고, 파이논은 침대에 누워서 그런 연인의 모습을 거울 너머로 구경하고 있었다. 거울 속에서 시선이 마주쳤을 때, 그는 아낙사를 향해 씩 웃으며 요즈음 잠이 모자라다는 말로 투정을 부렸다.

  “많이 바쁜 건가?”

  “아뇨, 요즘 후배 녀석이 고민 상담해 달라고 밤마다 술집…… 이 아니라! 저희끼리 호텔에서 좀 마시는 정도인데, 아무튼 그것 때문에 잠이 좀 모자라네요.”

  몇 초간 아낙사가 할 말을 곱씹는 게 느껴졌다. 아랫입술을 살짝 깨물고, 그가 결국 꺼낸 말은 이것이었다.

  “그래서 실제로 그 고민이 해결됐어?”

  “그런 건 아니지만…… 그래도 누군가 들어주는 것만으로 그 친구한테는 도움이 되지 않을까요.”

  “아니, 그건 서로에게 비효율적인 일일 뿐이지, 너한테나, 그 후배라는 사람한테나.”

  “그건 아낙사가 남에게 상담해 본 경험이 없어서 모르는 거 아닌가요.”

  파이논의 입에서 나온 그 말은 아낙사의 미간을 아주 미세하게 일그러뜨렸다. 그는 짧게 “그래” 하고 시인하더니 마저 머리를 빗는 데 집중했다. 그날 아낙사는 평소보다 더 정갈하게 자신을 무장하고 있었다. 드레스 셔츠 위로 덧입은 묶지 않은 코르셋이 그의 온 몸에서 유일하게 흐트러진 부분이었다. 

  평소 같았다면 파이논이 먼저 다가가 능글맞게 그 끈을 매만졌을 것이다. 아낙사 역시 그 손길을 기다리며 은근히 몸을 맡겼을 테고.

  “도와줄까요?”

  아낙사는 거울 속 파이논과 눈을 맞추지도 않은 채, 굳게 다문 입술 사이로 짧게 내뱉었다.

  “아니.”

  단호한 거절이었다. 아낙사는 스스로 끈을 매기 위해 어깨를 부자연스럽게 뒤틀었고, 보이지 않는 등 뒤의 매듭을 정리하느라 손가락 끝이 하얗게 질리도록 힘을 주었다.

  ‘지금 내가 손을 대면 분명 더 싫어하겠지.’

  숨을 들이켤 때마다 가늘게 떨리는 등줄기를 보면서도, 파이논은 끝내 다가가지 못했다.


  “우리 대화를 좀 해야겠어,” 라는 아낙사의 말은 선언과도 같았다.

  조수석에 앉은 파이논은 주차한 차의 핸들을 놓지 못하는 아낙사의 옆모습을 빤히 바라봤다. 올 것이 왔다는 생각과, 현실을 부정하고 싶은 감정이 어지럽게 파이논 안에서 뒤섞였다. 타이밍 또한 이보다 최악일 수 없었다. 내일모레는 아낙사의 생일이었다.

  “너에게 사랑받는 건…….”

  어렵사리 아낙사가 입을 뗐다.

  너무 좋았어.

  “나도 그저 한 인간에 불과하다는 걸 깨닫게 했어.”

  한 줄기 햇살에 감싸여 있는 느낌이었어.

  “그게 대체 무슨 뜻이에요.”

   “문자 그대로의 뜻이야.”

  그 빛이 사라지면 내가 이제까지 얼마나 추웠는지, 또 더욱 추워질지를 깨닫게 했지.

  “아낙사.”

  “늦겠다, 어서 가 봐.”

  “잠깐만요. 내일모레 말인데.”

  “신경 쓰지 마.”

  “어떻게 신경 안 쓸 수 있어요!”

  “상대가 바라지도 않는데 베푸는 호의는 네 만족을 위한 고집일 뿐이야, 파이논.”

  “하고 싶은 말은 그게 다예요?”

  아낙사는 여전히 핸들을 쥔 손에 힘을 준 채 앞만 바라보고 있었다.

  “그래.”

  그게 마지막이었다. 아낙사의 차 위로 이제 막 하늘 위로 이륙하는 비행기 그림자가 길게 지나갔다. 그 그림자와, 아낙사의 주차 공간 번호와, 조수석 문이 닫히자마자 흘러나오던 숨죽인 흐느낌은 아주 오랫동안 파이논의 가슴속에 자리를 잡고, 다른 무엇에게도 공간을 내어주지 않았다.

  ——4년 3개월이 지난 지금까지도.




  현관에 주저앉은 채, 파이논은 마른세수를 하며 떨리는 손으로 휴대폰을 다시 들여다봤다. 아낙사로부터 새로운 메시지는 도착하지 않았다.

  ‘아낙사고라스.’

  굳이 연락처상의 이름을 풀네임으로 수정한 건, 소소하고 쩨쩨한 복수심에서였을지도 모른다. 헤어진 연인을 향한 배려심이고 존중하는 마음이라는 허울 좋은 거짓말은 이미 내다 버린 지 오래다. 하지만 설마 번호를 지금까지 바꾸지 않았을 줄은 몰랐다. 아낙사라면 과거의 모든 걸 가차 없이 끊어내기 위해 익숙한 휴대폰 번호부터 집 주소까지 모든 걸 바꿀 거라고 생각했다.

  한참 동안 액정을 노려보며 고민하던 파이논은, 마침내 자판을 두드렸다.

 

Today 10:31
글쎄요
너무 오랜만이라 잘 묶을 수 있을지 모르겠네요

한 번 시험해 봐야 될 거 같은데

 

  전송 버튼을 누르자마자 읽음 표시가 나타났다. 4년 3개월의 공백이 무색할 만큼 빠른 확인이었다. 파이논의 심장이 미친 듯이 빠르게 뛰기 시작했다. 

 

그럼 해볼래?

 

  도발적이고도 간결한 문장이었다. 아낙사는 여전히 파이논의 평정심을 어떻게 흔들어야 하는지 정확히 알고 있었다. 파이논은 홧홧하게 달아오른 뺨을 손바닥으로 짓누르며, 짧게 욕설을 내뱉었다.

  그때, 현관 너머 복도에서 미세한 인기척이 들렸다.

  구두 굽이 바닥을 가볍게 치는 소리. 파이논은 마치 무언가에 홀린 듯 자리에서 일어나 현관문 앞에 섰다. 한쪽 발이 지금 양말 차림이라는 사실은 그리 중요한 문제가 아니었다. 외시경 너머 복도 조명이 일렁이고 있었다. 그가 간절히 찾는 민트색 머리카락은 보이지 않았다. 답답해진 파이논이 숨을 거칠게 뱉었다.

  휴대폰 진동이 다시 한번 손바닥을 울렸다.

 

너희 집 복도, 여전히 춥네.

 

  파이논은 헛웃음을 삼켰다. 그는 떨리는 손으로 도어락과 볼트 잠금을 풀었다. 철컥하는 소리와 함께 문이 열리자, 그곳에는 코트의 각진 모든 부분이 정확한 각도를 유지하고 있는 아낙사가 서 있었다. 당연하다는 듯, 그가 코트 단추를 하나씩 풀며 입을 열었다.

  “시험해보고 싶다며.”

  코트가 벌어지자 그 안으로 흰 피부가 비쳐 보일 만큼 얇은 셔츠와, 허리를 죄고 있는 코르셋의 실루엣이 드러났다.

  “묶어봐. 4년 전보다 훨씬 더 단단하게.”

  파이논의 입가에, 4년 3개월의 욕정이 담긴 미소가 걸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