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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파이낙사] 파이논의 연구 보고서

 

# 파이논의 연구 노트

연구자: 누스페르마타 학파 파이논
연구 개요: 광력 XXXX년 자유의 달 5일 종막시 삼각, 아낙사 선생님과 통상적인 신체 접촉을 수행하던 중, 선생님의 가슴 돌출점에 가벼운 물리적 마찰을 가하자 선생님이 갑자기 슬픔을 토로하는 기묘한 현상이 일어났다. 이로 인해 우리의 신체 접촉 시간은 예정보다 빠르게 종료되어야 했다. 선생님의 제자로서, 학생으로서, 또 연인으로서, 이 미지의 현상을 규명할 책임이 있다고 판단하고 본 연구를 수행하였다. 궁극적으로는 아낙사 선생님의 육체적, 정신적 행복을 도모하는 것을 기대 목표로 삼는다.



……



  파이논은 베개에 머리를 기대고 지그시 눈을 감았다. 그리고 오른손을 자신의 왼 가슴에 얹어 본다.

  우애의 관에서 찾은 어느 연구 결과에 따르면, 성년 이상 평균 나이 39세의 앰포리어스 시민 800명 중 절반 이상이 가슴으로 느껴 본 적이 있다고 답했다고 한다. 1부터 10까지의 척도 중에서, 유두점이 주는 흥분도는 평균 6.35에 달했다나.

  덧붙이자면 파이논은 우애의 관 장서 목록에서 닥치는 대로 고향 이름을 검색하던 시기에 이 자료를 맞닥뜨리게 되었다. 표본 그룹에서 엘레사이 에데스 마을 주민 20명의 존재를 확인했을 때 그의 반가움—그리고 약간의 민망함—이 어느 정도였을지 잠시 상상해 보시라.

  “으으음…….”

  다만 아무래도 파이논은 주류에 속하지 않는 모양이었다. 시험 삼아 근육질의 살덩이를 주물러 보고, 그리 돌출되지 않은 꼭지를 건드려도 봤지만 딱히 이거다 싶은 반응이 오질 않았다. 으음, 조금 간지럽기는 한데. 이 느낌을 뭐라고 하는 게 좋을까, 그래, 어린 시절 밀밭에서 누워서 자다가 등에 밀 이삭이 들어간 채로 등교해 버렸을 때를 떠올리게 한다. 설마 사람들이 이런 걸로 흥분하는 건 아닐 테고.

  포기하고, 파이논은 눈을 떴다.

  역시 자신에게는 해당 없는 이야기인가 보다. 대부분의 사람처럼 가슴으로 느낀다는 것도, 혹은 아낙사 선생님처럼 특이한 반응을 보인다는 것도.

  파이논은 양팔을 편안히 뻗고 침대에 몸을 깊게 파묻었다. 그 자세로 멍하니 천장을 올려다보고 있자니 자연스럽게 그날 일이 생생하게 떠올랐다.

  단 둘 뿐인 연구실에서 갑자기 선생님이 올망올망한 눈으로 그를 올려다봤을 때는, 이러다 심장이 목구멍 밖으로 튀어나오는 게 아닌가 싶을 정도로 정말 깜짝 놀랐다. 냉큼 무릎을 꿇은 파이논은 (아래에서 우지끈 소리가 났지만 파이논의 튼튼한 무릎뼈라면 스크래치 하나 없이 멀쩡했으므로, 무언가 부서진 게 있다면 그건 연구실 바닥이었을 것이다. 물론 그딴 건 지금 하등 중요한 문제가 아니다), 훌쩍거리는 아낙사를 부둥켜안고 한 손으로 토닥이기 시작했다.

  “선생님, 무슨 일인지 모르겠지만 괜찮아요. 아니, 다 괜찮아질 거예요. 저도 여기 있잖아요.”

  “파이, 흑, 파이논.”

  “듣고 있어요. 제가 어떻게 하면 좋을지 알려주세요.”

  “그…….”

  “네, 선생님?”

  “그 손 치워.”

  내려다보니 파이논의 다른 한 손, 그러니까 아낙사의 등을 토닥이고 있지 않은 쪽 손은 여전히 선생님의 옷 속을 비집고 들어간 채였다. 그야 아낙사가 갑자기 눈물을 뚝뚝 흘리기 전에, 두 사람은 통상적인 신체 접촉 도중이었으니까. 어리둥절해하며 파이논이 팔을 뗐다. 그러자 놀랍게도 아낙사의 훌쩍임이 뚝 멈추는 게 아닌가. 마치 선생님의 몸 어딘가에 보이지 않는 스위치가 있어서, 파이논이 실수로 이를 딸깍 눌러 버린 것처럼 말이었다.

  “……?”

  선생님의 가슴을 아늑하게 덮고 있던 파이논의 손이 사라지자, 옷 위로 뾱 고개를 든 작은 실루엣이 보였다. 매우 조심스럽게 파이논이 예민해진 그 부위를 톡 건드려 본다.

  “흑.”

  아낙사의 눈망울에 막 그치려던 눈물이 재차 고인다. 파이논은 얼른 손을 치웠다.

  뚝.

  죄송해요, 선생님. 한 번만 더요.

  훌쩍훌쩍.

  또다시 손을 거두면,

  뚝.

  “이게 대체……..”

  마법의 온·오프 스위치를 앞에 두고 파이논의 눈이 서서히 빛나기 시작했다. 목적의식으로 꿈틀거리는 손이 아낙사의 가슴팍으로 덥석 향하려던 때였다.

  “파이논.”

  차분하면서도 단호한 목소리가 연구실에 울려 퍼졌다. 파이논은 몸을 앞으로 기울인 자세 그대로 꼿꼿하게 얼어붙었다. 마치 보이지 않는 손이 “가만있어” 하고 그의 목줄을 팽팽히 잡아당긴 느낌이라고나 할까. 이럴 땐 얌전히 복종하는 게 모두를 위하는 길이라는 것을, 다년간의 경험을 통해 파이논은 이미 깨달은 참이다.

  “……넵.”

  「프로젝트: 선생님의 스위치를 찾아라!」, 그렇게 시작과 동시에 중단.

  자. 그런데 아낙사 선생님 정도는 아니라지만, 누스페르마타 학파의 어엿한 구성원으로서 파이논도 지적 호기심이랄지, 한 번 마음먹은 일은 해내고 마는 의지력이 제법 강한 학생이었다. 하물며 그 주제가 사랑하는 아낙사 선생님의 몸이라니, 이럴 때 연구자 정신을 발휘하지 않으면 일평생 두 번 다시는 이런 기회가 오지 않을 거라고 파이논은 확신할 수 있었다. 존경하는 선생님의 신체에 미지의 비밀이 있다면, 착한 제자로서 모름지기 이를 탐구해야 하는 법. 또한 연인으로서, 그 눈에서 이유 없이 눈물이 뚝뚝 떨어졌는데 알아보지도 않고 가만히 있을 수는 없었다. 동기도 명분도 충분했다. 선생님의 말버릇을 흉내 내 보자면, ‘연구할 가치가 충분하다’는 거다.

  ——이상이, 누스페르마타 학파 파이논이 아낙사 선생님의 ‘슬픈 젖꼭지 증후군’ 연구를 개시하게 된 경위였다.




제1장. 변수의 통제

 

  아낙사 선생님은 늘 말씀하셨다. 정교한 실험을 고안하는 사람이라면, 먼저 결과에 영향을 미칠 수 있는 모든 요소를 분석하고 적절히 통제하는 것부터 시작해야 한다고.

  그러므로 파이논은 크게 다음의 세 가지 변수를 분리 관찰하기로 했다.

  1. 시각

  2. 촉각

  3. 장소

  물론, 더 정교하게 가자면 고려할 요소는 이보다 훨씬 많았다. 강도 차이라던가 지속 시간, 선생님의 컨디션, 그날의 감정 상태, 심지어는 영야와 여명이라는 차이까지, 떠올릴 수 있는 조건에는 끝이 없었다. 그러나 실험 횟수가 곧 아낙사 선생님이 눈물을 흘려야 하는 횟수와 직결된다면, 파이논은 연구의 정밀도 따위는 과감히 포기할 작정이었다.

  – 지적할 부분이 한두 군데가 아니군. 이대로라면 네 시간을 비효율적으로 낭비하는 결과만 될 뿐이다. 그걸 모를 정도로 구제 불능의 바보는 아니겠지, 엘리사이 에데스의 파이논?

  벌써부터 귓가에 또박또박한 목소리가 울리는 듯하다. 그래, 아낙사 선생님이라면 분명 이렇게 말씀하실 테지.

  “알아요, 선생님.”

  – 실험 대상에게 쓸데없이 감정 이입하는 그 버릇은 고치는 게 좋겠네. 장기적으로 볼 때 너만 손해야.

  “그것도 알지만, 이번만큼은 물러설 생각 없어요.”

  이어질 지적이 무엇인지, 이에 어떻게 반박해야 할지도 파이논은 이미 파악을 마친 참이었다. 어쨌거나 그에게 토론의 기술을 전수한 사람은 아낙사 선생님이었으니까. 찬반을 바꿔 가며 토론술을 연습하던 그 소중한 시간들은 어느새 아낙사의 목소리가 제자의 머릿속에 자리를 잡고 영구히 거주하게 했다. 이 정도면 집세를 받아야 하는 거 아닌가, 실없는 생각을 하며 파이논은 가볍게 웃는다.




1. 시각

  “오늘은 이걸 써주셨으면 해요” 라면서 파이논이 수줍은 듯 어깨를 꼼지락거렸을 때, 아낙사는 황당함을 넘어 웃음을 터뜨리고 말았다.

  그도 그럴 것이, 그 제자가 몹시도 부끄러워하며 슥 내민 물건은, 어떻게 봐도 안대였기 때문이었다.

  “이걸 써 달라고?”

  “네.”

  “한 번 더 묻지. 너는 내가 평소 안대로 이쪽 눈을 가리고 있다는 걸 누구보다 잘 알면서도, 그 위에 다른 안대를 하나 더 써달라고 부탁하려는 거군.”

  “그렇게 표현하시니 제가 조금…… 버릇없이 굴기라도 한 것처럼 들리네요. 하지만 말씀하신 그대로예요, 선생님.”

  짧은 침묵이 내려앉았다.

  파이논의 목소리가 기어들다 못해 금방이라도 바닥과 하나가 될 기세인 걸 보면, 자신의 부탁이 얼마나 어이없는 일인지 자각은 하는 모양이었다. 그렇지 않았다면 아낙사는 당장 이 제자를 방에서 내쫓고, 「거듭되는 유급과 이로 인한 스트레스가 황금의 후예의 정신에 미치는 영향」을 연구한다는 명목으로 그를 놀빛 정원에 감금하도록 지시했을 것이다. 일이 그 지경까지 가지 않아서 다행이었다. 시도 때도 없이 등 뒤에서 엉겨 오는 묵직함에 이제야 겨우 익숙해졌는데, 그게 사라진 일상에 다시 적응할 생각을 하니 벌써 번거로움에 치가 떨렸다.

  하아. 아낙사는 깊은 한숨을 쉬었다.

  “이리 줘 봐.”

  그렇게 말하며 스승이 손을 내밀자 파이논의 얼굴은 여명 기계를 대신할 수도 있을 정도로 환해졌다. 넘겨받은 물건을 손에 들고 아낙사는 품평하듯 만지작거렸다. 촉감은 뭐, 그리 나쁘지 않고. 눈 위로 두르자 봉제선이 깔끔해서 피부에 닿는 감촉이 불편하지 않았다. 머리 뒤쪽으로 매듭을 묶으려다 아낙사가 몇 번 헛손질하자, 제자 쪽에서 먼저 돕겠다고 나섰다. 너무 세게 묶지 말라고 주의를 주기는 했는데, 과연 파이논 기준으로 ‘적당한’ 힘이 객관적으로 어느 정도일지는 조금 의문이었다.

  “실례할게요, 선생님.”

  단단한 손이 어깨를 가볍게 두드렸다. 지금부터 만지겠다는 신호를 보내는 것이다. 파이논은 먼저 아낙사를 침대 쪽으로 천천히 이끌고 자신은 끄트머리에 걸터앉았다. 아낙사를 위해 파이논이 고른 ‘의자’는, 적당히 탄력 있고 뜨끈한 그 자신의 허벅지였다.

  “이럴 필요까지 있나?”

  얼핏 불만스럽게 들리는 말투와 달리, 민트색 머리카락으로 가려지지 않은 귀 끝이 붉게 물들어 있었다. 파이논은 그 귓가에 쪽, 하고 입술을 눌렀다. 활활 타는 온도를 기대했는데, 파이논의 입술에 비하면 영 미지근해서 솔직히 귀엽다. 물론 이런 생각을 입 밖으로 꺼냈다가는 시작하기 전부터 제대로 혼날 게 분명했으므로, 파이논은 아무 일도 없었다는 듯이 대화를 이어나갔다.

  “불편하신가요? 죄송해요. 그래도 이 자세가 지금부터 하려는 일에는 제일 적합해서요.”

  “또 무슨 꿍꿍이인지 모르겠군, 파이논. 하려는 일이라는 건 또 뭐지——”

  아낙사의 말이 끝나기도 전에, 파이논의 손이 불쑥 옷자락 안으로 들어왔다. 너무 놀라 아낙사는 어떤 반응도 할 수 없었다.

  “우애의 관에서 여러 책을 접하며 알게 된 건데요, 선생님. 나무 정원의 오래된 기록들에는 ‘1부터 12까지’라는 척도가 자주 등장하더라고요. 선생님은 그 척도가 쓸데없이 복잡하기만 하고, 열두 티탄을 향한 노골적인 아부라는 기능 외에는 아무짝에도 쓸모없는 최악의 발명품이라고 베네라티오 학파 사람들을 또 한 번 비판하셨지만…… 저는 그래도 마음에 들어요. 10이라는 숫자는 너무 딱 떨어지고, 또 완벽해야 할 것 같잖아요. 그에 비해 12는 조금 숨통이 트인다고 할까요.”

  아낙사는 무슨 말을 하려고 입을 열었다가, 다시 다물었다. 대화를 이어가는 동안 그의 옷 속을 헤집고 돌아다니는 손이 점점 더 위쪽으로 올라오고 있었다.

  “그래서 말인데요. 제가 이렇게 할 때,” 파이논이 아담한 가슴을 가볍게 쥐었다. “1부터 12까지 중에서 어느 정도로 느껴지세요?”

  “하. 대답할 가치도 없는 질문이야.”

  짧고 단호한 즉답이 돌아왔다. 하지만 파이논은 자기 허벅지 위에 걸터앉은 다리가 미세하게 떨리는 것을 고스란히 느끼고 있었다.

  “그래도 네 호기심을 충족해 주자면, 4 정도겠군. 시야가 차단됨으로써 발생하는 심리적인 불안감이 2, 그리고 네가 내 아까운 시간을 낭비하고 있다는 사실에서 오는 불쾌감이 2다.”

  “제 점수는 겨우 2점인가요? 아하하, 역시 아낙사 선생님은 엄격하시네요.”

  파이논의 잔잔한 웃음소리가 몸끼리 닿은 부분을 타고 진동으로 전해져 왔다. 아낙사는 안대 너머로 제자가 짓고 있을 얄미운 표정을 상상하며 입술을 지그시 깨물었다.

  “그럼 이건 어떠세요?”

  까슬한 엄지손가락이 느릿하게 원을 그리며, 안감 밑에 감춰진 예민한 유두점을 건드렸다. 순간에 불과했지만 효과는 즉각적이었다.

  “……아.”

  알 수 없는 깊은 슬픔이 엄습해 오고, 눈물 한줄기가 소리 없이 안대를 적신다. 8, 아니 9? 저도 모르게 베네라티오 학파의 그 멍청한 12단계 척도로 사고하고 있었다는 걸 깨닫고 아낙사가 주먹을 움켜쥐었다. 정돈된 손톱이 살갗을 아프게 찔렀다. 아무 말 없이 부들부들 떨고 있는 스승의 상태를 ‘안정적’이라고 판단한 것일까, 파이논은 이번엔 손가락 끝을 세워서 아낙사의 가슴을 공략하기 시작했다.

  “윽……!”

  “선생님? 괜찮으세요?”

  이 미숙한 제자 같으니, 괜찮을 리가 있겠냐고 날카롭게 반문하고 싶지만, 그럴 기운이 남아 있지 않았다. 아낙사는 자신을 지탱하고 있는 파이논의 상체에 뒷머리를 기댔다.

  “……12점. 12점이야, 파이논…….”

  안대를 축축하게 적신 눈물이 이제는 뺨을 타고 흐르기 시작했다. 살짝 열린 입술 사이로 흘러나오는 12점이라는 말은 항복 선언이나 다름없었다. 원하는 답을 얻은 순간, 파이논의 손길이 마법처럼 정확히 멈췄다.

  “선생님!”

  제자의 목소리엔 당황과 걱정이 가득 서려 있었다. 그는 서둘러 아낙사의 눈을 가리고 있던 바깥쪽 안대를 조심스럽게 풀어냈다. 축축하게 젖은 천이 벗겨지자마자 아낙사는 몸을 틀어 제자를 마주 봤다. 그러더니 망설일 틈도 없이 그대로 그 가슴팍에 이마를 푹 박았다. 그야말로 적진을 향해 맹렬히 돌진하는 드로마스처럼. 제자리에서 1cm도 흔들리지 않았으면서 파이논이 과장되게 억, 하고 앓는 소리를 냈다.

  “정말 잘하셨어요. 이제 다 끝났으니까 걱정하지 마세요.”

  아낙사는 한동안 아무 말 없이 그대로 파이논에게 몸을 기대고 있었다. 파이논은 기꺼이 안락의자 역할을 자처하며, 매듭 때문에 엉망이 된 선생님의 머리칼을 손끝으로 정리해 주었다. 두 사람의 숨소리가 어느새 비슷한 리듬으로 편안히 맞물릴 즈음이었다.

  “선생님.”

  아낙사가 시선만 살짝 들어서 파이논을 올려다보았다. 제자는 전에 없이 진지한 표정을 짓고 있었다.

  “꼭 여쭤봐야 하는 게 있어요.”

  “……”

  “조금 전엔 12점이라고 하셨잖아요. 그럼 맨 처음, 그러니까 며칠 전 연구실에서 제가 실수로 선생님 여기를…… 처음 만졌을 때, 그때는 몇 점이었는지 알려주실 수 있나요?”

  “파이논.”

  “아까 느낀 걸 잘 떠올려 보고 대답해 주셨으면 좋겠어요. 9점인가요? 아니면 10점?”

  “당장 나가.”

  “중요한 문제예요. 꼭 대답해 주셨으면—”

  “나가라고 했어, 파이논!”



# 파이논의 연구 노트 (1)

눈을 가리면 선생님의 반응이 확실히 더 커지는 것 같다. (12/12)
눈을 가리지 않았을 때는 어땠는지 물어보려고 했는데, 방에서 쫓겨나는 바람에 결국 못 물어봤다. 그때 선생님 반응이 어땠더라? 지금 생각해도 꽤 높았던 것 같다.
→ 한 9점 정도?
다음에 다시 제대로 물어보고 싶은데… 허락은 안 해주실 것 같다.
그나저나 또 쫓겨나면 어쩌지?




2. 촉각

  두 번째로 실험할 독립 변수인 ‘촉각’은 어떤 의미로는 시각보다 훨씬 더 까다로웠다.

  시각은 단순히 차단하면 그만이라지만, 촉각은 그렇지 않았다. 무엇으로, 어떻게, 어느 정도로 접촉하느냐에 따라 결과가 크게 달라질 수 있었기 때문이다.

  게다가 가장 중요한 문제는 따로 있었다. 파이논은 제삼자를 이 실험에 끌어들이느니, 차라리 세 번째 손을 길러 올 각오가 되어 있었다. 애초에 파이논이 허용한다 해도 아낙사의 교구가 가만있을 리 없다. 결국 고민 끝에 파이논은 대상을 단순하게 둘로 나누기로 했다.

  파이논의 맨손 / 파이논의 맨손이 아닌 것.

  이 기준에 따라 그가 준비한 실험 도구는 다음과 같았다. 장갑을 낀 파이논의 손. 길에서 주운 황금색 깃털(깨끗하게 소독했다). 그리고 연금 실험 도중 선생님이 우연히 탄생시킨, 정체를 알 수 없는 찐득한 물체. 과연 이걸 ‘물체’로 분류하는 게 맞는가에 관해서는 학생들 사이에서 현재 진행형으로 토론이 이뤄지고 있지만 말이다. 케팔의 성체에 맹세코, 파이논은 수업 중 그 슬라임 같은 ‘것’과 두 번 이상 눈이 마주쳤다고 장담할 수 있었다. 교활하게도 그건 아낙사 선생님이 돌아볼 때마다 무생물인 척 시치미를 뗐지만 말이다.

  어쨌거나 오늘 수업을 마친 아낙사 앞에 파이논이 나타났을 때, 그는 이 삼 종 세트를 야무지게 갖춘 모습이었다. 그 꼴을 본 아낙사는 바로 관자놀이를 짚었다.

  우선 가장 눈에 띄는 장갑부터 지적해 보도록 하자. 평소 파이논은 손마디가 드러나는 반장갑을 자주 끼곤 했다. 그 반장갑 차림과, 혈기로 반짝이는 젊은 뺨을 보면서 아낙사는 이 제자가 오늘도 문비시 일찍부터 연무장에 다녀왔겠거니 짐작하는 것이었다. 그러나 지금 파이논의 손에는 어디서 구했는지 모를 처음 보는 두툼한 주방용 장갑이 씌워져 있었다.

  어떤 장갑인가 하는 것 자체는 큰 문제가 아니었다. 하지만 저 흉측한 색깔이라니—정말이지.

  그건 한쪽이 채도 높은 보라색에 다른 한쪽은 칙칙한 황토색이었다. 만약 파이논이 나무 정원 인근에서 이 장갑을 구한 거라면, 아낙사는 그가 자주 가는 가게의 주소를 물어볼 심산이었다. 그래야 앞으로 영원히 그쪽으로 발길을 돌리지 않을 수 있을 테니까.

  “저 왔는데, 인사 정도는 해주셔도 되잖아요.”

  파이논이 입을 삐죽 내밀며 말했다.

  두 번째로, 그는 내용물이 보이지 않는 양동이를 소중하게 끌어안고 있었다. 양동이 안에서는 기분 나쁘게 축축하고 끈적이는 ‘꾸물, 꾸물’ 소리가 들려왔다.

  “파이논.”

  아낙사의 목소리는 낮고 서늘했다. 파이논은 양동이를 바닥에 내려놓으며 (바닥에 닿는 순간 양동이가 철퍽하고 불길하게 출렁였다) 버릇처럼 뒷머리를 긁적이려 했다. 하지만 주방용 장갑을 낀 채로는 어림도 없다는 걸 깨닫고 웃으며 손을 내려놓는다. 그제야 아낙사는 제자의 바지 주머니 속에서 빼꼼 얼굴을 내민 커다란 황금색 깃털을 발견할 수 있었다. 마지막 아이템은 약간이나마 아낙사의 흥미를 끌었다.

  “……이게 다 뭔지 설명해 봐. 단, 아주 잘 설명해야 할 거다.”

  파이논은 잠시 버텨볼까 하고 입을 꾹 다물었다가, 이내 순순히 고개를 끄덕였다. 이미 변명으로 빠져나갈 수 있는 단계는 지났다는 걸 본인도 잘 알고 있었다. 상대는 그 아낙사 선생님이 아니던가.

  “역시 선생님이세요. 제 의도 따윈 이미 강의실에 찾아왔을 때부터 가볍게 꿰뚫어 보신 거겠죠.”

  파이논은 오히려 홀가분하다는 듯 양동이를 슬쩍 발로 밀어 보였다. 안에서 슬라임이 기분 나쁘다는 듯이 꾸르륵 소리를 냈다.

  “흥, 그야 알고 있었어. 네가 뜬금없이 12 척도 이야기를 꺼냈을 때부터 이미 짐작하고 있었다고.”

  “앗, 그때부터요?”

  굳어 있던 것도 잠시, 파이논의 얼굴에 미소가 돌아왔다. 거절당하지 않을 거라는 확신이 노골적으로 드러나는 미소였다. 선생님이 냅다 그를 쫓아내거나 설교부터 시작하지 않았다는 건, 호기심이 이기고 있다는 뜻이었다.

  “이미 다 알고 계셨다니, 이야기가 훨씬 빨라지겠네요.”

  그는 주방 장갑을 낀 손을 쥐었다가 펴며 아낙사 쪽으로 몸을 기울였다. 책상을 짚고 넘어온 커다란 그림자가 아낙사를 머리끝부터 발끝까지 완전히 덮었다. 대범한 거리감 속에서, 황토색과 보라색의 향연이 아낙사의 시야를 가득 채웠다. 가까이서 보니 심지어 손목에는 보색의 레이스마저 달려 있었다.

  “자, 선생님. 그럼 선택권을 드릴게요. 어느 쪽 손이 더 마음에 드세요? 아니면 양동이 속 이 친구부터 만나보실래요?”

  파이논이 눈앞에서 황토색과 보라색 장갑을 번갈아 까딱거렸다. 질끈, 아낙사는 눈을 감았다.




# 파이논의 연구 노트 (2)

장갑을 끼면 확실히 반응이 조금 둔해지는 것 같았는데, 완전히 없는 건 아니었다. (의외!)
→ 대략 6~7점 정도?
깃털은…… 잘 모르겠다. 간지러우셨던 걸까, 아니면 다른 의미로 예민해졌던 걸까?
문제는 양동이 속 ‘그것’인데, 솔직히 이걸 실험 도구로 써도 되는지 아직도 잘 모르겠다. 일단 선생님이 굉장히 싫어하셨다.
→ 아무튼 둘 다 확실히 5점 이하
그나저나 그 꾸물거리는 이상한 물체 같으니, 손을 대지도 않았는데 어느 순간 가장자리까지 멋대로 기어 올라와서는 양동이를 넘어뜨렸다.
선생님, 제발 제 말을 믿어 주세요. 그건 분명 살아 있는 게 맞다니까요.




3. 장소

  일 년에 한 번 있는 나무 정원 만찬의 제1순위 초청 대상을 꼽으라면, 그건 물론 각 학파의 현인들이었다. 관례에 따라 베네라티오 학파가 행사를 주관했으므로, 위로는 현인부터 아래로는 갓 입학한 신입생까지 모두가 준비 업무에 동원되었다. 학생들은 각 현인 앞으로 보낼 초청장을 정성스레 준비하면서도, 서로 눈치를 보며 몰래 한숨을 폭 쉬었다. 어차피 이 중 한 개는 올해도 어김없이 ‘불참’으로 돌아올 텐데, 뭐 하러 구색 맞추는 척을 한담.

  이 안일한 예상은, 그러나 며칠 후 답신이 도착하기 시작하면서 보기 좋게 빗나갔다.

  몇 년 연속 불참이라는 전통을 깨고 누스페르마타 현인이 돌연 참석을 선언한 것이다. 심지어는,

  “도, 동반객 1명이 있으시답니다!”

  초청장 담당 조교가 부들부들 떨리는 목소리로 외쳤다. 그의 손에는 나무 새가 물고 온 아낙사의 답장이 들려 있었다(수려한 필체가 인상적이었다). 사실 아낙사의 답변 자체는 아주 단순했다: 나와 내 동반객이 그 자리를 빛낼 겁니다. 그러나 이 짧은 한 문장이 던진 파문은 결코 소소하지 않았다. 동반객의 정체를 두고 온갖 추측이 난무하자 만찬 준비위원회는 다소 조잡한 이유를 내세워 그 현인에게 전령을 보냈다.

  올해 훌륭한 성과를 낸 학자만이 나무 정원의 연례 만찬에 참석할 수 있었다. 따라서 위원회에는 자격 요건을 확인한다는 명목으로 동반객의 정체를 확인할 권리가 있는 것도 사실이었다. 하지만 어엿한 현인인 아낙사에게 그 권리를 직접 행사한다는 것은, 그를 의심하겠다는 선전포고나 다름없었다. 한마디로, 같은 학자로서 무례하고 치졸한 행동이었다.

  “실례되지 않는다면 동반객의 존함을 알려주실 수 있겠습니까.”

  땀을 뻘뻘 흘리며 고개를 숙이는 전령에게 아낙사는 입꼬리만 올리는 그 특유의 웃음을 지어 보였다. 그리고 이렇게 답했다고 전해진다.

  ‘엘리사이 에데스의 파이논.’

  ……그 대답이 더 큰 소란을 불러왔음은 굳이 설명할 필요도 없으리라.

  혹자는 아낙사가 토론 대회 7연속 우승자를 배출해 냈다는 걸 자랑하기 위해 약간의 불편함을 감수하고서라도 만찬장에 얼굴을 내미는 거라고 추측했다. 올해도 파이논이 그 백발 위에 당당히 일곱 번째 월계관을 썼던 게 그 증거 아닌가. 그런가 하면 또 누군가는, 아낙사가 스스로 만든 ‘누스페르마타 학파 현인은 만찬에 불참한다’는 전통을 직접 깨부수는 이 순간의 쾌감을 위해 남몰래 계획하고 기다려왔던 거라고 수군거리기도 했다.

  그 의중을 과연 누가 알 수 있을까. 결국 모두가 전전긍긍하며 만찬 당일을 손꼽아 기다리게 되었다. 군중은 늘 아낙사고라스라는 인간을 죽을 만큼 미워하거나, 혹은 열광하거나 둘 중 하나였다. 그 반짝이는 지성 앞에서 무관심할 수 있는 사람은, 단언컨대 존재하지 않았다.



  한적한 테이블을 발견하고 파이논이 자리를 잡았다. 그리고 흥미진진한 눈으로 주위를 둘러본다.

  만찬장은 숲속 공터에 마련되어 있었다. 얼핏 조각된 석등이라고 생각했던 광원은 가까이서 보자 발광석을 끼운 석목이었다. 아마 자신의 무게를 못 견디고 자연스레 부러진 줄기가 아니었을까, 파이논은 추측해 봤다. 머리 위로는 오늘 밤의 나무 그림자가 캐노피처럼 두껍게 드리워져 있었다. 선선한 바람이 불 때마다 종이로 만든 등이 나뭇가지에 걸려 파르르 빛을 뿌렸다.

  “정말 공들인 행사네.”

  작게 중얼거리며, 파이논이 주빈석 쪽을 힐끗 보았다. 현인들의 상석은 그가 앉은 테이블로부터 멀리 떨어진 곳에 있었다. 가운데 놓인 음식은 거의 아무도 손대지 않은 채였다. 분명 정성을 가득 담아 준비한 걸 텐데, 아깝기도 하지. 그러나 아무리 현인의 동반객이라 해도 학생 신분인 그가 감히 그 자리에 낄 수는 없었다. 조용히 두 접시째를 비워가던 파이논은 문득 상석에도 지금 자신이 먹고 있는 소스에 절인 고기가 놓여있을지 궁금해졌다.

  ‘선생님한테도 먹여 드리고 싶은데.’

  그가 아무리 인적 드문 테이블을 골랐다고 해도 다른 손님들로부터 완전히 자유로울 수는 없었다. 다섯, 아니, 여섯 접시째였을까? 파이논은 버릇처럼 상석으로 시선을 돌리다 어느 학자 한 명과 눈이 마주쳤다. 남자는 성큼성큼 다가오더니 자신을 헬코리토 학파 학자라고 소개했다. 그러면서 말하길, 연무장에서 늘 그를 눈여겨봤다는 것이었다. 그렇게 몇 마디 대화를 주고받는 사이, 사람은 하나둘 늘어나 어느새 파이논 주위에는 작은 무리가 형성되어 있었다.

  그러나 그 왁자지껄함은 오래 가지 않았다.

  저 멀리 주빈석 쪽에서부터 서늘한 기운이 다가왔기 때문이었다. 사람들은 천천히 다가오는 아낙사의 그림자를 보자마자 저마다 변명을 늘어놓으며 테이블을 떠났다.

  “데려와 주셔서 고맙습니다, 선생님.”

  아낙사는 파이논 바로 옆, 제자가 미리 살짝 빼둔 의자에 자리를 잡고 앉는다. 그러더니 대답 대신 “흐음” 하고 짧게 목을 울렸다.

  “이렇게 외진 곳에서 너 혼자 즐기고 있는 줄은 몰랐군.”

  두 사람의 머리 위로 바람이 지나갔다. 파이논은 잠시 얼굴을 들고 지상의 소란이 닿지 않은 하늘의 냄새를 깊게 들이마셨다. 오늘 밤 아낙사는 늘 보던 학자복 대신 만찬 분위기에 어울리는 옷을 걸치고 있었다. 시야 끄트머리에서 그의 상의 자락이 하늘하늘 바람에 흔들리는 것이 보였다.

  “너라면 가장 주목받는 자리를 고를 줄 알았는데.”

  “평소라면 그랬을지도요.”

  파이논은 잠시 생각에 잠긴 듯 고개를 기울였다가, 이내 솔직한 눈빛으로 아낙사를 바라보았다.

  “넘겨짚었다면 혼날 각오는 되어 있어요, 선생님. 그런데 오늘 밤 이상하게도 선생님이…… 제가 여기 앉기를 바라신다는 느낌이 들었거든요.”

  잠깐의 침묵. 그리고,

  “제법이군.”

  의외로 순순한 답이 돌아왔다. 그제야 파이논은 아낙사의 얼굴을 자세히 살폈다. 그의 뺨이 취기로 조금 달아올라 있었다. 손에 든 잔이 넘칠 듯 말 듯 기울어지자, 파이논은 반사적으로 그의 손목을 잡아주었다. 평소 같았다면 지금쯤 아낙사의 입에서 피곤하다는 말이 나올 시점이었다. 이만 일어나는 게 어떻겠는지 제안하려던 순간, 그의 선생님이 잔을 들지 않은 쪽 손을 까딱하며 파이논을 불렀다.

  “저길 봐, 저쪽…… 자기 목소리에 취한 멍청이들이 한가득이군.”

  그가 제자의 귀에 대고 낮게 속삭였다. 파이논의 어깨가 딱딱하게 굳는 게 느껴졌다.

  “여기라면 남들 시선은 확실히 피할 수 있겠네. 똑똑한 선택이야, 파이논.”

  “전, 저는 그럴 생각까지는…….”

  들켰다.

  아낙사의 초대를 받았을 때, 뛸 듯이 기쁜 한편으로 다른 생각을 했다는 것을 파이논은 인정한다. 이제까지의 ‘실험’은 모두 남의 시선이 닿지 않는 둘만의 공간에서 이뤄져 왔다. 그렇다면 지금쯤 그 경계를 넘어 봐야 하지 않을까, 그런 생각이 은밀하게 머리를 스치지 않았던 건 아니다.

  파이논은 잠시 아무 대답도 하지 못하고 큰 눈을 깜빡거렸다. 아낙사가 피식 웃었다.

  “그럴 생각이 없었다고?”

  “……있었을지도 모르겠네요.”

  조금 애매하지만, 솔직함이라는 미덕을 잊지 않은 제자에게 아낙사는 상을 줄 생각이었다. 그의 시선이 천천히 아래로 떨어졌다. 파이논은 의자 가장자리를 생명줄처럼 꽉 붙들고 있었다. 그 손을 아낙사가 직접 자신의 목덜미로 이끌었다.

  “이쪽이야.”

  세상에서 가장 은밀한 비밀을 들려주는 사람처럼, 그의 목소리는 낮게 가라앉아 있었다. 파이논의 손끝에 닿은 것은 차가운 금속이었다. 크기로 치면 단추 하나 정도일까. 더듬어 보니 선생님의 옷에 연결된 장식이라는 사실을 금방 알 수 있었다. 고개를 갸웃하며, 파이논이 장식의 홈을 시험 삼아 눌러보았다.

  달칵.

  “선생님, 이건 설마…….”

  “조심하는 게 좋겠군, 파이논. 그렇게 성급하게 굴다간, 저기서 몰래 이쪽을 훔쳐보는 얼간이에게 못 볼 꼴을 보이게 될지도 모르잖아.”

  “이런 옷을 지금 입고 계셨던 거예요?” 주변을 힐끗 돌아보는 파이논의 시선에는 당황과 짜증, 그리고 서서히 차오르는 분노가 묘하게 섞여 있었다. “사람이 이렇게 많은 데서요?”

  그 말투는 거의 스승을 혼내는 것에 가까웠다. 파이논의 머릿속에 만찬 내내 상석에 홀로 앉아 있던 아낙사의 모습이 스쳐 지나갔다. 만약 그때 이 장식이 오작동했거나, 누가 실수로 누르기라도 했다면……. 파이논이라는 가림막도 없이 어쩔 생각이었는지를 떠올리자, 뒷목이 뻣뻣하게 아파져 올 지경이었다.

  “흥. 내가 고안한 장치가 그렇게 쉽게 풀릴 리 없잖아. 그래서, 안 만질 거야?”

  선생님, 하고 부르는 파이논의 목소리는 평소처럼 다정했다. 그 미소가 눈까지 닿지 못했다는 사실을 알아차릴 수 있는 사람은 서로의 심장 소리가 들릴 만큼 가까이에 있는 아낙사뿐이었다.

  “지금 선생님이 처한 상황을 잘 이해하지 못하신 것 같네요. 이런 데서, 이런 차림으로, 이걸 푸는 방법까지 제게 알려주셨다면…… 당연히 실험을 계속할 거라고 생각하셨어야죠.”

  “바라던 바야.”

  기다렸다는 듯, 아낙사가 파이논의 손을 한 번 더 목덜미로 이끈다.



# 파이논의 연구 노트 (3)

지금까지의 점수를 대충 정리해 보면,
평소처럼 만졌을 때…… 이건 아직 정확한 수치를 못 들었다. (아마 9점?)
눈을 가렸을 때 반응이 제일 컸고 (최대 12점),
손이 아닌 건 그닥이었다. (대략 5에서 7점?)
그리고 이번 ‘장소’ 실험 말인데, 확실히 반응이 크기는 했는데 정확한 수치는 못 여쭤봤다. (그럴 상황이 아니었지)
→ 체감 12점? 하지만 다시는 하고 싶지 않다.

이걸로 변수 실험은 끝까지 해낼 수 있었다. 이 결론대로라면 선생님을 위해서는 내가 늘 장갑을 껴야 한다는 뜻인데…… 아낙사 선생님이 과연 그걸 좋아하실까?




제2장. 가설과 증명

 

  ——이상의 실험을 통해 본 연구자는 아낙사 선생님에게 더 큰 슬픔을 주는 요소를 계량화할 수 있었다(표 1 참조). 그러나 이 실험만으로 현상의 원인을 밝힐 수는 없었다. 추가적인 실험을 진행하는 것은 연구자와 아낙사 선생님 모두에게 위험하다고 판단, 가설과 증명 단계로 돌입하기로 하였다

 

1. 슬픔은 중화할 수 있다

  현상의 원인을 제거할 수 없다면, 적어도 결괏값인 ‘슬픔’의 총량을 ‘기쁨’으로 중화할 수 있지 않을까?

 

  1-A. 언어적 중화

  “사랑해요.”

  그건 고백이라기보다 차라리 간절한 주문에 가까웠다.

  수차례 반복된 경험에도 아낙사의 몸은 둔감해지지 않고, 오히려 눈물이 고이는 속도만 빨라지고 있었다.

  “……오늘따라 말이 많군, 파이논.”

  아낙사가 톡 쏘듯 대꾸했다. 하지만 목소리엔 힘이 없었다. 파이논의 손가락이 실험 부위를 느리게, 또 집요하게 문지르기 시작하자, 아낙사의 고개가 뒤로 꺾였다.

  “사랑해요, 사랑해요, 사랑해요…….”

  평소 아낙사로부터 입만 살았다는 꾸중을 듣기도 하는 저 혀가, 오늘은 다른 말을 잊어버린 것처럼 이 한마디를 계속해서 반복했다. 사랑해요. 단어와 단어 사이 숨소리조차도 아낙사를 사랑한다고 말하고 있었다.

  “……하, 파이……, 논…….”

  우리들 인간에게 있어 슬픔이란 감정은 대체 뭘까. 아낙사는 제자 아래에서 바둥거리며, 약한 전기 신호처럼 끊어졌다가 이어지는 생각을 이어 나갔다. 슬픔은 사람을 깊은 수렁에 빠뜨리고, 허우적거리게 만든다. 그러다 어느덧, 물먹은 솜처럼 잠겨 있는 이 상태가 편안히 느껴지는 순간이 온다. 나를 짓누르는 이 무게에서 벗어나는 게 오히려 두려워지는 순간이.

  그럼에도 호수 가장 밑바닥까지 햇빛은 들어온다.

  “사랑해요.”

  조금 더 낮게.

  “사랑해요.”

  조금 더 가까이.

  “사랑해요.”

  이번에는 거의 속삭이듯.

  그 빛에 이름이 있다면, 아낙사는 눈앞의 제자와 같은 이름을 가졌을 거라고 생각한다. 눈물이 무겁게 만든 속눈썹 사이로 아낙사가 그를 올려다봤다.

  “나도 너를——”

 

  1-B. 물리적 중화  

  뒷말은 끝내 이어지지 못했다. 고백이 채 완성되기도 전에 아낙사의 입술이 파이논의 입안으로 집어삼켜졌기 때문이다. 그것은 파이논이 마침내 인내의 끈을 놓아버린 순간이기도 했다.

  “읍, 파이…….”

  파이논은 아낙사가 숨 쉴 틈을 주지 않았다. 뺨을 타고 흐르던 눈물을 훔쳐내고, 곧이어 열기로 가득한 숨결을 불어넣는다.

  “사랑해요, 선생님.”

  파이논이 입술을 떼지 않은 채 웅얼거렸다. 내내 사랑한다는 말을 쏟아내는 제자의 목을 당겨 안았을 땐, 무의식이 아낙사를 지배하고 있었다.

  파이논에게 그 이상의 격려는 필요하지 않았다.

  

 

2. 슬픔은 전이될 수 있다

  직접 접촉 방식(skin-to-skin)을 통해, 아낙사 선생님의 슬픔을 전달받을 수 있는지 실험해 본다. 슬픔의 총량이 그대로라면, 전이를 통해 선생님이 느끼는 슬픔을 줄일 수 있을 것이다.



  파이논은 슬그머니 아낙사의 어깨에 이마를 가져다 댔다. 정돈되지 않은 머리카락이 아낙사의 쇄골 언저리를 간지럽혔지만, 그는 밀어내는 대신 파이논의 뒤통수를 가만히 쓰다듬어 주었다.

  “……선생님.”

  “말해봐.”

  “어쩐지 제 가슴도 약간 찌릿하는 것 같아요.”

  파이논이 아낙사의 품에 얼굴을 더 깊게 비비며 웅얼거렸다. 그는 제자의 뒤통수를 쓰다듬던 손을 멈추고, 살짝 몸을 틀어 그와 마주 봤다.

  “……이상하네요. 갑자기 어제 키메라에게 양보한 과자가 생각나면서 조금 눈물이 나는 것 같기도 하고. 혹시 선생님 몸에 남아 있던 슬픔이 저한테 전이된 건 아닐까요?”

  “파이논.”

  진지한 척하는 목소리를 듣고 있자니 웃음이 나올 것 같다. 아니, 아낙사는 이미 웃고 있었다.

  “그건 그냥 네가 배가 고픈 거잖아.”

  “그럴 리가요. 전 지금 아주 진지한 고찰을 하는 중인데요.”

  “학술 고찰을 하는 배에서 그렇게 정직한 소리가 나진 않지.”

  꼬르륵.

  파이논이 민망한 듯 베개 밑으로 얼굴을 숨겼다. 아낙사는 못 말린다는 듯 한숨을 내쉬더니 몸을 일으키려고 했다. 제자의 두 팔이 그의 허리를 꼭 붙잡지만 않았다면 말이다.

  “어디 가세요?”

  “배고프다며.”

  “안 고파요. 아니, 약간 고프긴 한데…… 참을 수 있어요.”

  “그래, 그럼 누워 있던가. 나는 먹을 거니까.”

  “네. 메뉴는 뭐로 할까요?”

  “너는 안 먹는다면서?”

  “아, 선생님…….”

  파이논이 눈썹을 축 늘어뜨리며 아낙사의 허리를 감은 팔에 힘을 주었다. 아낙사는 자신의 품 안에서 커다란 덩치를 웅크리고 있는 제자를 내려다보았다. 처음부터 이렇게 고분고분하게 나올 것이지.

  “좋아. 메뉴는 네가 골라.”

  “역시 선생님은 제 슬픔을 중화하는 데 천재적이세요.”

  이후 한동안 두 사람이 어떤 대단한 요리를 먹을지 투닥거리는 소리가 이어졌다. 파이논이 지금 시간에 어울리지 않는 거창한 메뉴를 제안하면, 아낙사가 제 나약한 위장을 불쌍히 여기라면서 기각하는 식이었다. 말은 그렇게 해도, 두 사람 모두 침실에서 스무 발짝 이상 떨어질 생각은 없었다.

  정적을 깨고 파이논의 배에서 다시 한번 커다란 뱃고동 같은 꼬르륵 소리가 울려 퍼졌을 때, 파이논은 달아오른 분홍색 볼을 하고 침대에서 일어날 수밖에 없었다. 찬장을 뒤져 발견한 건 먹다 남은 마른 빵 몇 조각이었다. 퍽퍽한 빵을 우유에 적셔 한 입씩을 나눠 먹던 중, 파이논은 문득 깨달았다.

  이건 아마도, 그가 태어나서 먹은 가장 맛있는 한 끼일 거라고.




제3장. 결론

 

  “엘리사이 에데스의 파이논. 잠시 남아.”

  낮게 가라앉은 아낙사 교수의 목소리가 서서히 활기를 띠던 강의실에 찬물을 끼얹었다. 때는 학기 말 보고서 제출이 끝난 직후. 후련한 마음으로 짐을 챙기던 학생들의 시선이 일제히 파이논에게 쏠렸다.

  “나머지 학생들은 돌아가도 좋다. 단, 이게 너희들의 보고서에 아무 문제가 없다는 걸 의미한다는 달콤한 착각에 빠진 사람이 있다면——앞으로의 인생을 위해 이 말을 들려주지. 그런 근거 없는 희망은 버려.”

  학생들은 안쓰러운 눈빛으로 파이논의 등을 툭 치거나, 힘내라는 듯 비장하게 고개를 끄덕이면서 그의 곁을 지나쳐갔다. 아낙사 교수에게 단독으로 호출당한다는 것이 무엇을 의미하는지 다들 잘 알고 있었기 때문이었다.

  마지막 학생이 강의실을 빠져나가자, 아낙사는 책상 위에 놓인 파이논의 보고서를 툭툭 건드렸다.

  “……파이논. 이런 기록을 이번 학기 보고서로 제출하다니, 그 용기가 가상할 정도야.”

  매서운 질책에도 파이논은 오히려 당당하게 가슴을 폈다.

  “저한테는 잊을 수 없는 경험이었으니까요.”

  “여느 때처럼 입만 살았군. 이런 걸 성적에 반영할 수 있을 리 없잖아.”

  아낙사는 엄한 표정을 지으며 파이논을 꾸짖었지만, 마지막 학생의 발소리마저 복도 끝으로 완전히 사라지자 그의 눈빛에 묘한 변화가 일었다. 그는 천천히 강단에서 내려와 파이논에게 다가갔다. 그리고 파이논의 옷깃을 가볍게 쥐어 제 쪽으로 끌어당겼다. 파이논은 그저 그가 당기는 대로, 인력에 끌려가 주는 것처럼 거리를 훅 좁혔다.

  “데이터가 너무 부족해. 이런 미완의 보고서를 제출하는 건 학술적 실책이다.”

  파이논의 눈동자가 커다래졌다.

  “오늘 수업 끝나고 연구실로 와. 보충 실험을 할 테니까. 밤을 새워서라도 철저하게 검증해 주지.”

  용건을 마친 아낙사가 옷깃을 툭 놓았다. 그러나 파이논은 휘청이는 대신, 어정쩡하게 몸을 숙인 자세 그대로 굳은 채 서 있었다. 아낙사는 제자의 멍한 얼굴을 한 번 훑더니, 어깨로 그를 툭 치고 지나갔다. “정신 차려” 라고 말하려는 것처럼 말이었다.

  홀로 남겨진 파이논이 움직임을 되찾기까지는 오랜 시간이 걸렸다.

  “선생님, 기다려주세요! 같이 가요!”

  그가 가방을 낚아채며 강의실 밖으로 바람처럼 달려 나간다.




  ——이 모든 노력에도 불구하고, 안타깝게도 이번 학기 파이논의 성적표에는 낙제를 의미하는 도장이 찍히고 말았다.

  누스페르마타 학파 동료 학생들이 이 소식을 접했을 때, 모두 한마음 한뜻으로 파이논의 미래를 걱정하며 진심 어린 위로를 보냈다. 어쩐지, 그날 아낙사 교수님 목소리가 장난이 아니더라니.

  낙제점을 만회하려는 시도였을까, 그날 밤 늦은 시각, 파이논의 튼튼한 두 다리가 누스페르마타 학파 현인의 연구실 앞을 성큼성큼 찾았다. 신중한 노크 소리가 들리고 기다렸다는 듯이 문이 열린다.

  아낙사의 연구실을 밝게 비추는 불은 다음 날 문비시가 되어서도 꺼지지 않고, 제자와 스승의 학구열, 그리고 집요한 탐구심을 연료 삼아, 만찬날 숲을 밝히던 등불보다도 뜨겁게 타올랐다고 전해진다…….

fin.

 

 

짧은 후기

더보기

Sad nipple syndrome에 대해서는 들어보신 적 있을 것 같은데요, 이야기 전개를 위해 현실의 증상보다는 당연히 훨씬 과장되게 묘사했습니다. 간단히 조사하는 과정에서 이것의 원인을 옥시토신과 도파민의 작용으로 보는 가설이라던가, 수유와의 관계에 주목하는 연구라던가 등등 이런저런 재밌는 걸 많이 알게 됐어요

어쨌든 한동안 nipple 이야기는 안 해도 될 것 같아요 너무 많이 해서… 이런 이상한 소재에도 절 버리지 않고 여기까지 읽어주신 의리 넘치는 파낙러에게 감사드립니다

오늘도 내일도 해피파낙해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