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느 기연의 달 둘째 주에 있었던 일이다.
아낙사고라스가 거액의 복권에 당첨되었다. 그야말로 눈이 휘둥그레질 만한 액수의 복권에.
이 소식을 듣자마자 급성 복통으로 앓아누운 사람이 얼마나 많았는지 모른다. 어째서 그 신성 모독자에게 이런 행운이 찾아오는 거냐, 신들의 지고한 뜻은 정말 종잡을 수 없다고 탄식하는 사람부터, 앞으로는 자그레우스 대신 세르세스에게 공물을 바쳐야겠다고 진지하게 고민하는 사람까지. 운이 더 좋아진다는 약간의 기대만 있으면 당장 다른 티탄의 신전을 두드린다는 점에서, 후자야말로 진짜배기 자그레우스 신자였다. 물론 나무 정원의 현인씩이나 된 자가 세속적인 가치를 탐한다는 질투 섞인 비난도 빠져서는 아쉬운 레퍼토리였다. 이 비난은 주로 은퇴한 학자들의 입에서 나왔다.
한마디씩 하고 싶어서 안달 난 이들에게 아낙사가 복권을 산 이유는 단 하나, 다름 아닌 드로마스 때문이었다는 걸 밝힌다면, 대부분은 목덜미를 잡고 쓰러질 것이다. 내일부터 세르세스 대신 지오리오스에게 식후 기도를 바칠 영리한 기회주의자들만 제외하고 말이다.
‘교활한 손 복권 ~복권 수입의 일부는 드로마스 돌봄 기금으로 사용됩니다~’
마모리얼 시장의 복권 판매소 앞에 이런 안내판이 덜렁 놓인 것이 작년 초였다. 오가는 사람들의 발에 채고, 수레에서 튄 흙탕물을 맞고, 하루 종일 여명 기계의 빛을 받아 종이가 누레지면서도 안내판은 꿋꿋하게 자리를 지켰다. 아이들은 안내판에 드로마스 얼굴을 낙서하고는 누가 더 잘 그렸는지 경쟁하며 깔깔 웃었다. 마침내 그 앞을 지나는 누구도 이 안내판의 존재를 인식하지 못할 즈음, 시장 골목에서 눈을 동그랗게 뜨고 이쪽을 바라보는 사람이 있었다.
그 사람이란, 두말할 필요도 없이 아낙사였다.
복작복작한 인파 속에서 아낙사는 입을 살짝 벌린 채 발길을 멈췄다. 아낙사와 어깨를 부딪친 사람이 구시렁거리며 뒤를 돌아봤다가, 학자복(그리고 교구)의 권위에 눌려 슬그머니 가던 길을 재촉했다. 미안한 말이지만 아낙사는 그런 사람이 있는 줄도 몰랐다.
거창하게 복권 판매소라고 해 봤자 작은 매대 하나였고, 매대는 그릇 가게와 말린 과일 점포 사이에 애처롭게 껴 있었다. 매대를 보는 점원은 영 심심한 표정으로 귀를 후비는 중이었다. 문제의 안내판, 그러니까 드로마스 낙서가 가득한 그것은, 보통 사람이라면 눈살을 찌푸리게 할 정도로 엉망이었다. 펜을 든 게 누구였는지는 몰라도, 문자를 이해하지 못하는 사람인 게 분명해 보였다.
하지만 아낙사고라스가 어디 보통 사람이던가.
당당한 걸음으로 아낙사는 매대 앞으로 향했다. 그리고 품 안에서 균형의 동전이 든 파우치를 꺼내 들었다. 늘어지게 하품하던 젊은 점원이 화들짝 놀라 입을 가렸다. 파우치 속 동전이 묵직하게 짤랑이는 소리가 아니었더라도, 새 손님의 고상한 옷차림과 잘 관리된 손끝만으로 점원을 기대하게 만들기는 충분했다.
다만 아낙사는 안내판에서 말한 ‘수익의 일부’가 정확히 얼마를 의미하는지, 또 어떤 드로마스 관련 단체에 정확히 어떤 식으로 전달되는지 캐묻기 전에는, 파우치 입구를 열 생각이 전혀 없었다.
생각지도 못한 질문이었는지 점원은 어리둥절한 표정이었다.
“저어, 손님…… 제가 실은 글자를 몰라서 그러는데, 그냥 장부를 보여드리면 안 될까요?”
바라던 바라며 아낙사가 장부를 넘겨받았다. 선 채로 아낙사는 수십 페이지를 꼼꼼하게 확인했다. 결과가 만족스럽자 그가 매대 위에 동전 몇 개를 내려놓았다. 점원은 조심스럽게 복권 추첨기를 꺼내 왔다.
추첨기는 홈에 이름이 적힌 공을 끼워 넣은 다음 빙빙 돌려 하나를 뽑는 방식이었다. 아낙사가 낸 돈은 공 세 개 분량이라고 했다. 그는 모든 공에 신중하게 이름을 새겨 넣었다. 작은 공에 아낙사고라스 여섯 글자가 모두 들어가도록.
점원은 매 주말 모두가 보는 앞에서 추첨기를 돌린다며, 꼭 다시 들러 달라고 혼신의 영업용 미소를 지어 보였다. 노력이 무색하게도 아낙사는 고개를 저었다. 그는 며칠 안에 이 시끄러운 도시를 재방문할 계획이 없었다. 다음 방문은 5년, 아니, 10년 뒤, 가능하다면 평생 오지 않았으면 좋겠다.
용건을 마친 아낙사는 원래 계획대로 시장을 빠르게 가로질러, 드로마스 상단과 미리 약속한 장소로 향했다. 나무 정원으로 돌아가는 길에 그는 마침 생각난 것처럼 상단 사람들에게 구호 기금 이야기를 꺼냈다. 그러면서 필요하다면 각지의 복권 판매소는 물론, 역참 회계 담당자들에게 읽고 쓰는 법부터 중급 회계 지식을 무료로 강의해 줄 사람을 알아봐 주겠다고 제안했다. 상단 사람들이 몹시 기뻐한 건 당연한 일이었다. 대부분의 회계 담당자들은 숫자를 셀 줄 안다는 이유만으로 그 자리에 억지로 앉힌 시골 사람들이었다.
상단은 느린 걸음으로 며칠을 여행하여 나무 정원에 도착했고 아낙사를 입구에 내려주었다. 그를 태웠던 드로마스가 연신 뒤를 돌아보며 상냥한 민트색 인간에게 작별 인사를 하는 모습은 눈물겨울 정도였다. 아낙사 또한 제자리에 서서 한참이나 손을 흔들었다.
자, 그 후에 어떻게 되었냐 하면.
한 번이라도 복권을 사 본 경험이 있는 사람이라면 누구나 공감하겠지만, 주머니에 추첨권을 넣는 순간 사람의 마음에는 ‘혹시나’ 하는 기대가 피어나기 마련이었다. 그러나 아낙사의 마음은 그렇게 작동하지 않았다. 중요한 건 이 일로 드로마스들이 혜택을 볼 수 있게 되었다는 사실이었고, 그다음으로 중요한 건 앞으로 할 일—가까운 시일 내에 노두스 학파 사람들을 들들 볶아 (무료로) 회계 강좌를 열게 만들어야 한다는 것. 그 밖의 일은 모두 부차적인 사건에 지나지 않았다.
복권 추첨기에 공 세 개를 끼워 넣었단 사실은 이렇게 아낙사의 머리에서 서서히 잊히는 듯했다.
어느 날 나무 정원의 소포 접수처에, <아낙사고라스 님> 앞으로 묵직한 궤짝 하나가 도착하기 전까진.
궤짝을 연구실까지 옮겨 주겠다는 헬코리토 학파 사람들의 제안을 그렇게 딱 잘라 거절하지 말 걸 그랬다. 혼자서 모서리를 붙잡고 있는 아낙사의 손마디는 하얗게 질려 있었다. 끙, 소리를 내면서 그가 간신히 문턱을 넘겼다. 안쪽까지 궤짝을 밀어 넣고 아낙사는 밀린 숨을 몰아쉬기 시작했다.
슬슬 가볍게 땀이 나고 있었다. 그의 겉옷이 부주의하게 책상 위로 휙 내던져졌다. 손부채질을 하며 아낙사가 오랜만의 운동으로 비명을 지르는 두 팔을 주무른다. 당장 바닥에 드러눕고 싶지만 궤짝이 연구실 한가운데에 버티고 있는 이상, 휴식은 조금 뒤로 미뤄야 했다.
궤짝 앞에 쪼그리고 앉아서 그가 잠시 상자의 구조를 검사했다. 가볍게 살펴본 결과 수상한 기운이 느껴지지는 않는다. 걸쇠를 여는 순간 갑자기 안에서 화살이 튀어나오거나, 치명적인 가스가 흘러나올 것 같지는 않다는 의미였다. 철컥. 걸쇠를 젖히고 아낙사가 뚜껑을 밀었다. 안에서 그를 기다리고 있는 건, ‘당첨을 축하합니다!’ 라는 메시지 카드와 그야말로 산더미처럼 쌓인——반짝반짝한 균형의 동전이었다.
아낙사는 잠시 말문을 잃었다.
가벼운 충격 탓일까, 이름 하나가 오랜만에 그의 머릿속에서 살랑살랑 꼬리를 흔들었다.
파이논.
생각만 하던 이름을 입 밖으로 내뱉은 순간, 기억의 둑이 우수수 무너졌다. 언젠가 우애의 관에서 그와 나눴던 대화가 어제 일처럼 생생하게 머릿속에서 재생되고 있었다.
“——파이논?”
아낙사의 목소리가 고요한 관내를 울리자, 파이논이 깜짝 놀라면서 뒤를 돌아봤다.
그전까지 파이논의 뒷모습은 깊은 생각에 잠겨 있는 것처럼 보였다. 평소라면 모른 척 지나갔을 아낙사가 제자의 이름을 부른 것도 그 때문이었다. 빠르게 뒤를 돌면서 파이논이 품에 안고 있던 스크롤 십수 개가 와르르 굴러떨어지고 말았다. 우애의 관 계단을 따라, 서가 밑으로, 하여튼 사방팔방으로 데굴데굴. 그중 몇 개는 우뚝 서 있던 아낙사 쪽으로 굴러오더니 그의 신발 끝에 부딪혀 멈췄다.
“이런…… 죄송해요.”
얼른 허리를 굽히더니 파이논이 자신이 만든 난장판을 정리하기 시작했다. 아낙사는 발밑으로 펼쳐진 스크롤들의 제목을 읽었다. 『(개정판) 투자론: 부자들은 어디에 투자하는가』, 『당신의 잔고가 늘 부족한 이유』, 『(왕초보를 위한) 골동품 감정 입문』…….
스승의 시선이 스크롤로 향한 걸 보고 안 그래도 달아올랐던 파이논의 뺨이 더욱 짙은 색으로 물들었다. 두 눈을 질끈 감고 파이논이 아낙사의 발 근처로 손을 뻗었다. 아낙사는 그동안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아낙사 선생님.”
몸을 일으킨 파이논의 어깨는 축 늘어져 있었다.
“차라리 빨리 혼내주세요.”
아낙사가 재미있다는 듯 눈썹을 들어 올린다. 내가 왜 그래야 하지? 그 말에 파이논이 풀죽은 목소리로 대답했다.
“공부할 시간에 이런 거나 읽고 있었으니까요.”
“교실 밖에서 뭘 하든 그건 네 자유야. 그러니 내가 어떻게 생각했더라도 중요한 게 아니지.”
“그런가요…….”
스크롤이 사방팔방으로 굴러간 상황보다도, 스승의 무심할 만큼 너그러운 태도가 그를 더 시무룩하게 만든 모양이었다. 아낙사는 혀를 찼다. 혼나기 싫은 건지 아닌 건지, 원.
“저는 선생님께서 이런 데 관심을 두는 건 시간 낭비라고, 이럴 시간에 공식이나 한 줄 더 외우라고 하실 줄 알았어요.”
백발 밑으로 보이는 파이논의 목덜미는 여전히 붉었다. 아닌 게 아니라 며칠 전 쪽지시험에서 파이논이 처참한 점수를 받기는 했다. 풀이 방향은 늘 그럴싸한데, 공식은 뒤죽박죽 기억하는 학습력이 어떤 의미로는 경탄스럽다.
“알고 있다니 다행이군. 다만…….”
아낙사는 그가 들고 있는 『투자론』의 모서리를 유심히 바라보았다. 개정판이라는 제목답게 신간이었지만, 벌써 여러 사람의 손을 거쳐 너덜너덜해져 있었다. 그 수많은 손에 파이논도 포함되어 있으리란 건 어렵지 않게 추측할 수 있었다.
그 마음을 아낙사는 잘 알고 있었다. 뼈에 사무치도록 경험해 봤으니까.
아낙사를 창백한 피부의 학자로만 보는 사람은 코웃음을 치며 이렇게 말할지도 모른다. 평생 종이보다 무거운 건 들어본 적도 없는 학자 선생이, 밑바닥 인생의 고통에 대해 뭘 알기나 하냐고. 하지만, 이 깨달음의 나무 정원도 바깥과 다를 바 없었다. 다만 쓰이는 화폐가 다를 뿐이다. 거목 밖의 세상이 균형의 동전으로 움직인다면, 이곳의 통화는 전통과 가치관, 그리고 평판이었다.
아낙사는 이미 한참 전에 두 세계의 화폐를 모두 정복해 냈다. 그러나 그렇게 되기까지 겪은 수모와, 때론 분개하며 보낸 어린 밤들까지 잊지는 않았다.
“그 책이 쓸모없는지 아닌지는 네가 판단할 문제겠지.”
고개를 든 제자와 스승의 눈이 마주쳤다. 예상했던 대답이 아니어서인지 파이논의 눈이 조금 커져 있었다.
“단,” 아낙사는 손을 뻗어 『투자론』의 흐트러진 모서리를 가볍게 정리해 주었다. 파이논은 스승의 손끝이 닿은 게 스크롤이 아니라 제 팔뚝인 것처럼 화들짝 놀랐다.
“그걸 읽느라 정작 네가 지금 이 순간에만 경험할 수 있는 것들을 놓친다면, 그리 좋은 투자라고 할 수 없다는 생각이 드는군.”
“……아.”
“지식이든 균형의 동전이든, 불리는 방식은 의외로 비슷하거든. 내 조언이 더 필요하다면 언제나처럼 연구실로 찾아오도록, 파이논. 기다리고 있겠다.”
아낙사가 손을 거뒀다. 파이논은 잠시 멍하니 서 있다가 이내 고개를 꾸벅 숙였다. 인사만으로는 부족하다고 생각했는지, 그가 머뭇거리던 끝에 입을 열었다.
“그 약속, 꼭 지켜주셔야 해요.”
“내가 언제 네 출입을 막은 적이 있던가? 설령 입구를 막는다고 해도 너에겐 소용없을 것 같은데.”
“그건 그렇지만…… 그렇다고 진짜로 문에 못칠하지는 말아 주셨으면 좋겠는데요. 뜯어내는 건 제 일이 될 테니까요.”
파이논이 그에게 남긴 모든 인상과 마찬가지로, 이 순간의 기억 또한 아낙사의 머리에서 떠난 적이 없었다. 파이논의 파랗고 파란 눈동자는 여느 때처럼 감정을 숨기지 않았다. 그 눈은 기대의 빛을 담고 또렷하게 반짝이고 있었다. 새하얀 머리카락 두 가닥은 오늘도 고집스럽게 하늘로 솟은 채였다.
저도 모르게 아낙사는 그 눈송이 같은 백발로 손을 뻗었다.
끼익.
걸쇠에서 나는 소음이 아낙사를 우애의 관 복도에서부터 어질러진 연구실로 붙잡아 왔다.
파이논. 영리함을 발휘할 때도, 수업에서 뒤처질 때도, 남들의 수십 배는 인상적이던 자신의 제자. 졸업 후 벌써 몇 년이 지나도록 아낙사는 그와 길이 겹친 적이 없었다. 지금은 오크마 시에서 잘 지내는 모양이었다, 파이논이 제 입으로 한 말을 곧이곧대로 믿는다면 말이다. 그가 한때는 울상을 하고 자신의 교실에 앉아 공식과 씨름하던 학생이었다는 사실을 떠올리니, 아낙사의 입가에 작은 미소가 떠올랐다.
어디서 들었는지, 파이논은 얼마 전 그가 오크마에 잠깐 들른 사실을 알고 있었다(정보의 출처가 짐작 가지 않는 건 아니다, 불쾌하게도). 연락이 끊겼던 스승에게 정정당당히 연락할 수 있는 이 좋은 기회를 파이논은 물론 놓치지 않았고, 아낙사가 짧은 여행에서 복귀한 지 이튿날 전서를 보냈다.
‘잘 지내시죠, 아낙사 선생님? 저는 잘 지내고 있으니까 걱정 마세요.’
‘그나저나 길이 엇갈렸네요. 마침 제가 없을 때 오크마를 방문하시다니……. 다음에는 꼭 미리 말씀해 주세요. 한 끼 근사하게 대접할 테니까요. 선생님이 좋아하실 만한 곳을 알거든요.’
정중한 듯 친밀하고, 친밀한 듯 예의를 차린 메시지였다. 이런 메시지에는 대체 뭐라고 답변해야 할까. 짧은 고민 끝에, 당시 아낙사는 간결함이 최고의 전략이라는 결론을 내렸다.
‘필요 없어.’
아낙사라고 해서 나무 정원 바깥세상과 완전히 단절된 채 지내는 건 아니다. 그의 곁에는 그게 자신들의 의무라는 것처럼 늘 파이논의 소식을 물어다 주는 동료며 지인들이 있었다. 이번엔 어디로 원정을 갔다더라, 돌아오자마자 시민을 위한 자선 연회에 불려 갔다더라, 구세주와 춤 한 번 춰보기 위해 사람들이 줄을 서는 바람에 결국 번호표를 나눠 줘야 했다더라 등등. 덕분에 그가 평소 얼마나 바쁘게 사는지 뻔히 알고 있는데, 이런 일로 소중한 휴일을 허비하게 만들 수는 없었다.
그 후 파이논으로부터 답장이 오지 않으면서 대화는 끊겨 버렸다. 어쨌거나 그 말대로라면 적어도 파이논은 스승에게 부끄럽지 않은 식사를 대접할 수 있을 만큼은 부족함 없이 지내고 있다는 뜻일 테니까, 그것만으로도 아낙사는 만족스러웠다. 만족스러웠을 터였다.
궤짝 가득한 균형의 동전은 그 반짝임으로 아낙사에게 이렇게 묻는 듯했다.
정말 그런 걸로 만족할 수 있겠어, 나무 정원 소년?
아낙사는 잠시 생각에 잠겼다. 그의 손가락이 별 뜻 없이 매끈매끈한 동전 표면을 매만졌다. 조금 뒤 그의 얼굴에 장난기 넘치는 미소가 씩 피어올랐다.
오랜만에 숙제 검사나 해 볼까.
궤짝을 덮고, 아낙사가 서둘러 외출할 채비를 했다. 『투자론』과 『골동품 감정 입문』의 성과를 확인할 시간이었다.
“하아…….”
석판을 쳐다본 지 반 각째, 파이논의 입에서 깊은 패배의 한숨이 새어 나왔다. 석판을 너무 오래 봐서인지 눈이 뻐근했다. 밖에서는 아무래도 남의 시선을 의식하게 되지만, 제집이라는 비밀스러운 공간 안에서만큼은 어깨를 무너뜨리는 여유를 갖고 싶었다, 아주 잠깐이라도 좋으니까.
그나저나, 집이라.
‘집’이라는 단어를 떠올린 순간 파이논의 뻐근한 눈이 다시 석판 위로 미끄러졌다. 그래, 집. 정확히는 아낙사 선생님이 알아보고 다닌다는 그 대저택들 말이었다.
“선생님, 이건 좀…… 아닌 것 같아요.”
파이논이 침대 위를 굴러다니며 석판을 신경질적으로 스크롤했다. 석판에는 오크마 외곽과 인근 지역 부동산 매물을 보여주는 누리망 페이지가 띄워져 있었다. 아낙사가 찜했다는 (소문이 도는) 매물들은 하나같이 환금성이 뛰어난 것은 물론, 조금 과장해서 드로마스 두 마리가 전력 질주를 해도 될 만큼 광활한 필지를 자랑했다.
“혼자 사시기엔 너무 넓잖아…… 설마 정말 누구랑 같이 사시려는 건가? 아니면 드로마스랑 나 잡아 봐라 놀이라도 하실 셈이세요?”
후자의 경우, 아낙사 선생님이라면 농담에 그치지 않을지도 모른다. 파이논은 잠시 천장을 보며 즐거운 상상에 빠져들었다. 장면 1, 여명 기계의 빛이 잘 드는 광활한 정원에서 아낙사 선생님이 어린 드로마스들과 술래잡기하는 장면. 묵직한 꼬리에 발이 걸려 비틀거리면서도, 선생님은 아이처럼 행복하게 웃는다. 하늘색 드로마스가 걱정의 우웅 소리를 내면 아낙사가 그 동그란 머리를 자애롭게 쓰다듬는다.
“정말 귀엽겠네…….”
파이논이 꿈꾸듯이 중얼거렸다. 그래, 맞아. 선생님이 행복하다면 그걸로 된 거 아닐까? 딱딱한 의자보다는 흙바닥이 선생님의 관절 건강에도 좋을 테고. 심지어 운동량도 자연스레 늘 수 있다. 하지만 파이논의 평화로운 상상은 갑자기 낯선 불청객이 그림 속에 불쑥 끼어들면서 먹구름이 드리워지기 시작했다.
- “낙샤, 저녁 준비 다 됐어. 어서 들어와.”
상상 속에서 저택 문이 열리며, 처음 듣는 목소리가 아낙사를 불러 세운다. 그 누군가는 아낙사를 깃털처럼 가볍게 들어 올렸다. 맨발로 드로마스와 뒹굴던 아낙사는 익숙한 듯 품에 안겨 자연스럽게 집 안으로 이끌려 들어간다.
쾅. 상상 속 현관문이 눈앞에서 닫히는 소리가 파이논을 현실로 되돌려 놓았다.
“……아.”
도저히 대저택이라고 부를 수 없는 파이논의 소박한 침실 천장이 그를 기다리고 있었다. 파이논은 석판을 휙 던져버렸다.
최근 아낙사가 중개인을 통해 집을 알아보고 있다는 소문이 오크마 시에 파다하게 퍼졌다. 이 때문에 파이논은 요즈음 몹시 울적한 상태였다. 연무장에서조차 집중하지 못해서, 이럴 거면 썩 꺼지라고 대련 상대에게 한 소리 들었을 정도다.
설마. 아낙사 선생님이 그럴 리가. 하지만 파이논이 아무리 부정하려 해 봐도 진실은 점점 또렷하게 드러나고 있었다. 방 한 칸도 아니고, 대저택을 사들이는 일이니 관계자들 입단속을 완벽히 하기도 어려웠을 것이다. 얼마 전에는 마모리얼 시장의 가구 장인들에게까지 연락이 닿았다는데, 파이논이 판단하기에 아무래도 뜬소문은 아닌 듯했다. 어딜 가도 사람들이 ‘아낙사의 제자’의 등을 치면서 조만간 선생님으로부터 좋은 소식이 들려오는 거 아니냐고 짓궂은 농담을 던졌다. 그때마다 파이논의 기분은 바닥을 뚫고 수직 낙하했다. 웃는 얼굴을 유지할 수 있었던 건 순전히 파이논의 지나칠 만큼 뛰어난 의지력 덕분이었다.
선생님이 복권에 당첨됐다는 소식에 뛸 듯이 기뻐한 게 엊그제 일 같은데, 여유 자금이 생기자마자 살 집을 알아보시다니. 파이논은 차라리 아낙사가 이 대저택들을 드로마스 보호소로 개조해 버리겠다는 야심 찬 계획을 품고 있기를 간절히 바랐다. 이 기약 없는 짝사랑에 마침표를 찍어야 한다면, 차라리 상대가 드로마스인 게 나았다. 정체도 모를 괴한 같은 놈이 선생님과 신혼살림을 차릴 생각을 하면…….
파이논이 누운 채 이를 으득 갈았다.
사실 해결법은 간단했다. 석판을 들어 아낙사에게 직접 전서를 보내면 그만이었다. 집을 보러 다니신다고들 하던데, 소문이 사실인지? 혹시 누군가와 정착할 계획이 있는지? 하지만 파이논은 시장 골목을 누비면서 선생님의 사생활이나 캐고 다니는 놈으로 비치고 싶지 않았다. 게다가, 혹시라도 선생님이 순순히 인정한다면(“그래, 조만간 파이논 네게도 내 파트너를 소개해 주지”)? 파이논은 자신이 그 순간을 견딜 수 있을 거라는 확신이 서지 않았다. 확인되지 않은 소문은 괴로움을 주지만, 확인된 절망은 치명상을 준다.
파이논의 망상은 어느덧 얼굴도 없는 선생님의 파트너를 조용히 그림 밖으로 치워버렸다. 불의의 사고로 비어 버린 옆자리를 메꿀 사람은 물론 파이논이었다. 어두운 대저택 복도에서 두 사람이 부둥켜안는 장면. 파이논은 상복 위로 드러난 목선에 자연스럽게 얼굴을 묻는다. 앞으로는 제가 지켜드릴게요, 선생님—아니, 아낙사. 지금부터 아낙사라고 불러도 될까요. 그러면 아낙사는 그의 등을 토닥여 주면서…….
딩동!
“……!”
맑은 전서 알림음이 파이논의 귀를 때렸다.
화들짝 놀라며 그가 망상에서 깨어났다. 이 소리는 선생님만을 위해 특별히 따로 설정한 알림음이었다. 갑자기 파이논의 뒷덜미가 화끈거렸다. 저 멀리서 아낙사의 서슬 퍼런 기운이 느껴지는 듯하다. 엘리사이 에데스의 파이논, 스승을 이런 눈으로 보고 있었던 건가? 감점, 아니, 파문이다!
그는 허둥지둥 침대 구석으로 밀려난 석판을 낚아챘다. 아낙사의 메시지가 화면에서 그를 기다리고 있었다.
‘전에 말한 식사 약속, 아직 유효해?’
순간, 파이논의 입이 떡 벌어졌다.
지난 자유의 달에 열린 자선 연회에서, 아글라이아는 금실을 짜는 자의 이름을 걸고 파이논을 연회장의 구세주로 만들겠다고 단언했다. 그리고 그 손끝에서 탄생한 연회용 의상은 과연 그 장담이 과장이 아니었음을 증명할 만한 결과물이었다.
평소 파이논의 의상은 그가 가진 전사로서의 힘에 적당한 위엄을 실어주면서도, 어디까지나 젊고 혈기 왕성한 느낌을 잃지 않게 했다. 실제로 파이논은 젊은 청년이었으므로, 나이에 걸맞은 차림이라고 할 수 있었다.
이는 또한 불을 쫓는 여정에서는 하나의 선언이었다.
‘여기 젊은 구세주가 있다.’
‘천 년을 이어온 불을 쫓는 여정에 새 피를 수혈해 줄 황금의 후예가 있다.’
‘우리에게는 새 희망이 있고, 그 희망은 구세주와 함께 자라날 것이다.’
어느새 시민들은 도시 곳곳에서 흩날리는 파이논의 푸른 망토자락을 발견할 때마다 빙긋 웃고 있는 자신들을 발견했다. 파이논은 존경받았고, 또 동시에 친근한 사랑을 받았다. 혹여 그가 가벼운 실수를 하더라도, 사람들은 실망하기보단 ‘우리 구세주가 또 이렇게 성장하는구나!’ 하면서 제 일처럼 뿌듯함을 느꼈다. 말하자면 그 흰 옷은 오크마 전체가 함께 키워가는 미완의 캔버스를 상징하는 셈이었다.
하지만 이번 연회를 위해 준비한 옷은 전혀 달랐다.
흰색과 푸른색이 사라진 자리에는 깊은 검정과 서늘한 황금의 대비가 남아 있었다. 평소의 청량함이 싱그러운 영웅의 서사를 그렸다면, 이 예복은 파이논에게서 소년미를 깨끗이 지워내고 묵직한 진중함을 덧입히고자 했다. 불을 쫓는 여정의 수장은 시민들에게 한 시대를 짊어질 준비가 된 구세주의 완성을 피력하고자 했던 것이다.
——그런 의도를, 아낙사는 오늘 저녁 파이논이 선택한 의상에서 읽어낼 수 있었다. 파이논이 자신의 역할을 어디까지 이해했는지는 미지수였지만 말이다. 똑똑한 학생이니 본능적으로 알아챈 부분이 있을 거라고 아낙사는 믿는다.
테이블 너머에서 파이논이 의식적으로 옷깃을 매만졌다. 그가 움직일 때마다 금실로 수를 놓은 부분이 테이블 불빛에 반사되면서 번쩍거렸다. 아낙사는 보일 듯 말 듯 웃고는 가벼운 감상을 들려준다.
“검정색이 잘 어울리네.”
“감사합니다.”
파이논이 즉각 대답했다. 관찰력이 아주 좋은 사람이 아니라면 그가 이 새 옷을 불편하게 여긴다는 걸 눈치채기란 어려운 일이었다. 그리고 학자로서 아낙사의 관찰력은 평균 이상이었다.
“솔직히 이 옷이 완성되기까지 꼼짝도 못 하고 버텨야 했던 그 긴 시간을 떠올려 보면…… 혹시라도 안 어울린다는 말을 들었을 땐 조금 서운했을지도요.”
그가 긴장한 듯 웃었다. 그제야 아낙사는 지금의 성장(盛飾)한 남자와 자신의 제자를 겹쳐 볼 수 있었다.
대화가 끊기고 분위기가 묘하게 가라앉았다. 파이논은 점점 무거워지는 정적을 깨기 위해, 그리고 지금도 가슴 속을 맴도는 그놈의 ‘대저택’ 관련 소문을 에둘러 확인하기 위해 입을 뗐다.
“그동안 잘 지내셨어요, 선생님? 소식이 워낙 뜸하셔서 슬슬 걱정되던—”
“파이논.”
아낙사가 그의 말을 부드럽게 가로챘다. 평소보다 조금 더 낮고 진중한 어조였다.
“사실 오늘 널 부른 건, 네게 개인적으로 부탁할 일이 있어서야.”
부탁? 파이논이 그를 알고 지낸 내내, 아낙사가 이런 말을 꺼낸 건 이번이 처음이었다. 그는 기쁨을 감추지 못하고 즉각 대답했다.
“네, 말씀하세요. 뭐든요.”
“어떤 부탁인지 확인도 않고 수락하는 건가? 신중함을 기를 필요가 있겠어. 하지만 덕분에 설득할 수고를 덜었군, 고마워.”
그의 입에서 나온 ‘고마워’ 라는 말이 파이논의 뺨을 옅은 분홍색으로 물들였다. 아낙사가 요청한 것은 부동산 투어였다. 자기가 알아본 집들이 문헌이나 중개인의 설명만 들어서는 확신이 서지 않으니, 조만간 시간을 내어 함께 가줄 수 있겠냐는 것이었다. 뜻밖인 듯하면서도 요즘 선생님의 근황을 생각하면 그리 놀랄 일도 아니었다.
“그럼요, 당연하죠. 제가 꼼꼼히 봐드릴게요.”
파이논의 심장이 두근거렸다. 다시 한번 선생님과 만날 구실이 생겼다는 사실만으로도 가슴이 벅차올랐다. 그게 설령 선생님이 은거를 준비하기 위한 집이든, 혹은 (상상조차 괴롭지만) 누군가와 살기 위한 집일지라도, 지금은 그저 도움이 되고 싶다는 마음이 앞섰다.
“그리고 파이논, 하나 더.”
아낙사가 덧붙이자 파이논은 이번에도 망설임 없이 힘차게 고개를 끄덕였다.
“네!”
아낙사가 결국 참지 못하고 피식 웃음을 터뜨렸다.
“또 무조건인가? 계속 그러다간 원치 않는 부탁을 짊어지게 될 수도 있어.”
“무슨 말씀이세요. 선생님 부탁인데 제가 싫어할 리가 없잖아요.”
파이논이 자랑스럽게 가슴을 폈다. 아낙사는 못 말린다는 듯 고개를 젓더니, 품 안에서 무언가를 꺼내 테이블 위에 내려놓았다.
그것은 작은 장신구 상자였다.
“열어 봐도……?”
아낙사가 선선히 끄덕이며 그를 부추겼다. 파이논은 조심스럽게 상자 위로 손을 뻗었다. 상자는 은은한 광택이 나는 짙은 청록색 천으로 되어 있었다. 허락을 받기는 했지만, 뚜껑을 스치는 손끝이 가늘게 떨렸다. 꿀꺽 긴장을 삼키고 파이논은 상자를 열었다.
“…….”
반지.
아낙사의 열 손가락 어디에도 맞지 않을 커다란 반지가 상자 안에 아늑하게 보관되어 있었다. 한눈에도 정교하게 세공된 특상품이라는 게 느껴졌다. 반지의 중심에는 밝은 하늘색의 보석이 자리를 잡았고, 그 주변을 잘게 부순 흰빛의 보석들이 정교하게 수놓고 있었다.
“네가 아직 내 제자이던 시절, 골동품을 비롯해 이런 귀중품을 감정하는 데 제법 열을 올렸던 게 떠올라서 말이지. 지금의 네 눈에 어떻게 보이는지 알려 줬으면 좋겠군.”
아아. 이것은 업보였다. 선생님 앞에서 오랫동안 제 마음을 숨겨 온 업보.
파이논은 쓴 약을 먹은 기분으로 상자를 들어 눈높이에 맞췄다. 마침내 현실로 다가온 선생님의 파트너라는 존재보다도, 조금 전 아낙사의 말이 어째선지 더 깊은 상처로 다가왔다.
‘네가 아직 내 제자이던 시절.’
마치 파이논과의 짧은 인연을 뒤로 하고, 인생의 새 장을 열 준비가 된 것처럼. 엘리사이 에데스의 파이논이라는 남자는 이제 아낙사의 제자도 뭣도 아니라는 것처럼.
파이논은 반지를 살피기 시작했다. 하지만 이미 눈앞이 흐려진 그에게 제대로 된 감정이 가능할 리 없었다. 그는 반사적으로 날 선 평가를 내뱉었다.
“글쎄요. 솔직히 말씀드리면 제대로 된 골동품 같지는 않네요. 누군가 옛 방식을 어설프게 흉내 내서 급하게 만든 물건 같아요. 세공 자체는 확실히 훌륭하긴 한데…… 선생님, 혹시 얼마를 주고 사신 건지 여쭤봐도 될까요? 분명 바가지였을 거라고 생각하지만요.”
말을 내뱉고도 파이논은 좁아터진 제 속에 스스로 경악했다. 아낙사는 흠, 하고 낮은 신음 섞인 소리를 내더니 파이논의 손에서 반지 상자를 뺏어 들었다.
“하는 수 없지. 네 눈에 그렇게 보인다면야.”
아낙사의 실망한 듯한 기색에 파이논은 급히 수습에 나섰다.
“아무래도 선생님은 이 분야 전문가가 아니시니까요. 다음에 이런 물건을 사실 땐 제가 같이 가서 골라드릴게요. 아니면 지금 바로 출발해도 좋고요.”
“……네가 같이 골라줘서는 의미가 없는데.”
아낙사가 입술을 살짝 내밀며 불편한 기색을 드러낸다. 파이논의 심장이 다시금 철렁했다. 역시 중요한 사람에게 주는 선물은 직접 고르고 싶다는 걸까. 그가 마음에도 없는 죄송하다는 말을 습관처럼 내뱉으려고 할 때였다.
“선물을 받을 사람이 직접 골라버리면 의미가 없잖아.”
“……네?”
파이논의 사고 회로가 순간 멈췄다.
“……저, 저한테…… 어…… 어라?”
“조악한 흉내라느니 바가지라느니, 네 의견은 충분히 들은 것 같은데. 싫다는 사람에게 억지로 줄 생각은 없어.”
아낙사가 반지를 다시 주머니 속으로 밀어 넣으려 했다. 파이논은 거의 비명에 가까운 외마디 소리를 지르며 선생님의 옷소매를 붙잡았다.
“자, 잠깐만 기다려 주세요, 선생님! 세상에, 다시 보니 이거 완전 걸작인데요.”
“말이 너무 쉽게 바뀌는군. 믿을 수가 없어.”
“너무하세요…… 제가 언제 선생님께 진심이 아닌 말을 한 적이 있었던가요?”
아낙사는 턱을 괸 채, 눈앞에서 실시간으로 무너졌다 살아났다를 반복하는 제자를 가만히 관찰했다. 파이논은 테이블에 몸을 바짝 붙여 앉더니, 필사적으로 눈을 깜빡이기 시작했다.
“진심이에요, 선생님. 아까는 제가 잠시 눈이 멀었었나 봐요. 제발 한 번만 더 기회를 주시면 안 될까요? 이렇게 기품 넘치고 섬세한 세공이라니…… 제 손에 끼워볼 수만 있다면 더없는 영광일 거예요. 대체 이런 보물을 어디서 구하셨어요?”
급기야 파이논이 <대놓고 아부하기> 전략을 펼치기 시작한다. 아낙사는 자세를 고쳐 앉는 척하면서 슬그머니 손으로 입가를 가렸다.
“어디서 구했냐고?”
“네. 분명 이름 높은 장인의 솜씨가 분명해요. 그런데 이상하네요, 오크마에 자주 출입하는 장인 중에 제가 모르는 사람은 없을 텐데…… 여행 중에 발견하신 건가요?”
“내가 만들었는데.”
“…….”
아.
파이논의 눈이 깜빡임을 멈췄다. 자기 입에서 흘러나왔던 말들이 화살처럼 날아와 파이논에게 꽂히기 시작했다. 파이논이 석상처럼 굳어 아무 말이 없자, 아낙사는 무심함을 가장하면서 다시 반지 상자를 거둬들이려고 했다.
그러나 그 손가락이 상자 뚜껑에 닿기도 전에, 파이논이 자신의 커다란 손을 가만히 포개어 누른다.
“……선생님.”
파이논이 전에 없이 진지한 얼굴로 입을 열었다.
“그러고 보니 제가 요즘 반지에 관심이 생겼다는 말씀을 드렸던가요?”
+) 후일담
처음에 비하면 약간 줄어들었다고는 하지만, 궤짝 하나를 거의 꽉 채운 동전이 주는 시각적 충격은 여전히 엄청난 수준이었다. 파이논은 멍하니 서서 그 산더미 같은 균형의 동전을 내려다봤다.
‘이게 다 얼마야…….’
그가 열심히 머리를 굴리는 소리가 가까이에 있는 아낙사에게 들릴 정도였다. 그러다 그의 어깨가 순간 눈에 띄게 털썩 내려앉는다. 계산 결과를 자신의 소박한 저축 잔고와 비교해 보기라도 한 것일까.
아니, 지금은 울적함의 늪에 빠져 있을 때가 아니다. 파이논은 서둘러 고개를 털었다. 그가 밝은 목소리로 물었다.
“선생님, 이 어마어마한 당첨금을 다 어디에 쓰실 계획이세요? 설마 소문처럼 그 대저택들을 전부 사들이실 건 아니죠?”
바로 그 질문만을 기다려왔다는 듯, 아낙사가 종이 한 장을 꺼내 오더니 파이논 앞으로 쓱 내민다. 파이논은 목록을 훑어 내려가기 시작했다.
- 드로마스 보호소 설립 및 환경 개선 기금
- 드로마스 적토주기 체험 프로그램 개발비
- 드로마스학 심화 교과목 개발비
- 성장기 드로마스를 위한 맞춤형 영양 적토 개발 연구비
- 드로마스 역참 관계자 대상 교육비…
“전부 드로마스 관련이네요. 정말 선생님다우세요.”
그가 안심 섞인 미소를 지었다. 그러나 리스트의 마지막 항목에 다다르자, 파이논은 영문을 모르겠다는 표정을 짓는다.
- 키메라 목줄
“……키메라 입양하시려고요?”
“아, 그건 이미 샀으니까 신경 쓸 거 없어.”
“벌써요? 어디에 두셨는데요?”
아낙사는 주위를 두리번거리는 제자의 모습을 가만히 눈에 담았다. 여기저기 잘도 움직이는 파란 눈동자가 책장 아래며 담요 더미 같은 연구실 구석을 살폈다. 어딘가에서 아낙사가 몰래 숨겨둔 귀여운 키메라가 짠 하고 나타나지는 않을까 기대하는 눈치였다.
화려한 목줄이 반짝이는 제자의 왼손 약지를 바라보며, 아낙사는 만족스럽게 웃는다. 역시 그가 가르친 가장 우수한 키메라에게는 구름 같은 흰색과 넓게 펼쳐진 밀밭의 하늘이 어울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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