커플 테라피
Couples Therapy
베리타스 레이시오, M.D., Ph.D.를 수업이 없는 한가로운 화요일 오후 2시에 랩실의 평화 속에서 끌어낼 수 있는 인물 혹은 사건은 그리 많지 않다. 그나마 가능성 있는 일을 꼽아보자면 첫째, 연구동 건물이 무너지기, 둘째, 정기구독 점심 도시락이 어째선지 배달되지 않기, 셋째, 익명의 전략적 파트너로부터 「네 도시락은 내 손안에 있어! 당장 주차장으로 내려오도록!」이라는 문자를 받기―정도를 꼽아볼 수 있겠다.
그렇기에 오후 2시 정각, 레이시오 교수가 랩 가운을 벗고 보호용 안경도 제자리로 돌려놓았을 때, 방 안에 있던 대학원생 일동은 정신적 차렷 자세를 하고 교수의 뒷모습을 눈으로 좇았다. 대체 무슨 비상사태지? 도시락 사건의 재림인가? 뒤통수가 따가울 법도 한데도 레이시오는 아랑곳하지 않고 랩실 문을 벌컥 열었다. 그리고 바깥에서 기다리고 있던 학부생으로 보이는 한 인물을 향해 무심하게 질문했다.
“혼자 왔나? 네 교수는?”
“그분은 먼저 가서 기다리고 있겠다고 하셨어요. 그러면 저희도 갈까요?”
그렇게 씩씩하게 제안해 놓고선 갑자기 볼을 긁으며 부끄럽다는 듯 웃는다.
“왜, 무슨 일이지?”
“방금 제 교수님이라고 하셔서요. 곱씹으니 조금 부끄럽네요. 그분이 여기 안 계신 게 천만다행이에요.”
“…….”
이쪽이야, 레이시오가 앞장서며 말했다. 그러면서 마음속으로 몇 가지 메모를 남겼다, 그것도 굵은 글씨로. 이 사실을 알 리 없는 학부생은 명랑하게, 그저 한없이 명랑하게 복도를 걸어갈 뿐이었다.
한편, 랩실에 있던 대학원생 하나가 저 청량하다 못해 시릴 정도로 파아란 눈동자의 학부생이 누구인지 깨닫고 외마디 비명을 질렀다. 학내 익명 커뮤니티에서 ‘저 지금 ○○대 건물인데요, 방금 지나간 이 백발 미남 누구죠?!’같은 게시글이 올라오면 높은 확률로, 아니, 99.999% 확률로 답변에 오르는 그 인물, 어느 500명 대형 교양 수업에서 교실을 뒤집어 놓았다던 그 전설의 학부생,
“인지과학과 파이논!”
레이시오의 연구실은 건물의 동쪽 윙에 자리 잡고 있었다. 그나마 햇빛이 든다던 이유로 그해 신임 교수들 사이에서 자리 경쟁이 치열했는데, 앞에 새 건물이 세워지면서 그 유일한 장점도 사라지고 말았다.
실내등을 켜고 레이시오는 두 손님을 안으로 맞이했다, 인지과학과 아낙사고라스 교수와 학부생인 파이논을. 책상 의자를 빼면 유일한 앉을 자리인 2인용 소파는 한쪽이 푹 내려앉아 있었다. 먼저 들어온 파이논이 조심스럽게 그쪽을 골라 앉는다. 상대적으로 멀쩡한 자리는 자연스레 그의 교수님 차지가 되었다.
시작하기에 앞서, 레이시오는 나란히 앉은 두 사람의 얼굴을 번갈아 봤다. 아낙사고라스, 피로가 만성으로 내려앉은 얼굴에 구부정한 자세로 팔짱을 끼고 있다. ‘세상의 진실’이라는 문구의 티셔츠를 입고 있는데, 레이시오는 같은 차림을 한 대학원생 몇 명과 연구동에서 마주친 적 있었다. 아무래도 휘하 연구실 학생들과 단체로 옷을 맞춰 입은 모양이었다. (레이시오는 티셔츠 문구의‘진실’을 ‘진리’로 바꾸면 어떨까 하는 소소한 의견이 있었지만, 상황이 상황인지라 언급하지는 않았다.)
반면 파이논은 등을 곧게 세우고 양손을 무릎 위에 올리고 있었다. 같은 티셔츠가 아닌 건, 아직 1학년이라 연구실에 들어가지 못했기 때문일까? 전반적으로 이 학생은 몸이 앞으로 기울어 있어서 금방이라도 튀어 나갈 준비가 되어 있는, 비유하자면 프리스비를 눈앞에 둔 하얀 강아지 같았다.
“좋아, 정리하자면,” 레이시오가 사전에 전달받은 보고서로 눈길을 돌렸다. “두 사람은 아낙사고라스 교수의 <정신 구조화 입문> 수업이 끝나고 복도에서 논쟁을 벌였어. 현장에 있던 학생 증언에 의하면 아낙사고라스 교수, 그쪽이 여기 이 학생에게 드로마스만큼 많이 먹는다고 했다던데.”
“그건 칭찬이었어.”
아낙사가 퉁명스럽게 대꾸한다. 레이시오는 보고서에 큼지막한 물음표를 세 개 그렸다.
“그러면 파이논 학생. 교수를 복도에서 밀친 이유가 뭐지?”
“밀친 게 아니라 조심하시라는 의미로 제 쪽으로 당긴 거였어요. 왁스 칠 때문에 바닥이 일부 미끄러웠거든요. 아낙사… 제 말은, 교수님은 그때 절 보고 계셔서 앞이 미끄럽다는 걸 모르셨을 거예요.”
이번에는 느낌표 세 개. 각자 할 말이 많다는 건 좋은 징조였다, 적어도 상담 내내 입을 꾹 다물고 보내는 것보다야 훨씬 나았으니까. 징계위원회에서 두 사람을 호출했을 때는 그런 일이 벌어졌다고 들었다. 그래서 위원회 자문 위원인 베리타스 레이시오 M.D., Ph.D., 그리고 Psy.D.에게 이 일이 넘어온 것이다.
“그럼 두 사람은 논쟁한 적이 없다? 그렇게 말하고 싶은 건가?”
“그건… 아니요. 저희가 사람들 앞에서 큰 소리로 언쟁한 건 사실이에요. 하지만 그것도 다 아낙사, 교수님이 약속을 어기셔서.”
“난 그렇게 약속한 적 없어.”
“약속하셨잖아요!”
세상 억울한 강아지 같은 눈길로 파이논이 옆자리의 아낙사를 돌아봤다. 복도에서 벌어진 일이 되풀이될 기미에, 레이시오가 잽싸게 손을 들어 두 사람의 주의를 돌렸다.
“그 약속이란 게 뭐였는지 얘기해 볼 사람 있나?”
정적. 아낙사고라스는 반대쪽으로 고개를 휙 돌려버리고, 파이논은 이제까지 잘만 움직이던 입을 꾹 다물었다. 하는 수 없다, 레이시오는 다른 제안을 건네기로 했다.
“그러면 각자 관점에서 그날 무슨 일이 있었는지 얘기해 보는 게 좋겠군. 아낙사고라스 교수, 그쪽부터 시작하는 건 어때.”
민트색 머리가 마지못해 끄덕 움직였다. 그의 이야기는 긴 한숨과 함께 시작되었다.
그날 <정신 구조화 입문> 수업은 5분 늦게 시작되었다.
(“어째서지?” 레이시오의 질문과, “내 말을 끊지 마, 그리고 밝히고 싶지 않아.”라는 답변.)
학생 대부분이 다음 수업이 있으니 그래도 제시간에 마쳐주었다. 그러고 강의실을 빠져나오는데, 파이논이 허겁지겁 가방을 챙겨 따라 나왔다.
무슨 대화를 했냐고? 그게 중요한가? 아무튼 결론은 둘 사이에 사소한 견해 차이가 있었다는 거고, 대화로 풀었다는 것만 알면 된다. 무슨 견해 차이였냐고? 그게 중요한가?
몹시도 짧은 이야기 끝에, 아낙사는 팔짱을 반대로 끼고 의자에 등을 기댔다. 이곳에서 내 할 일은 이제 끝났다는 선언이나 다름없었다.
“이제 제 차례인가요?”
반면 파이논은 자신의 지도 교수와 달리 매우 협조적인 태도였다. 그에게 작은 희망을 품으며 레이시오는 학생 쪽으로 몸을 돌렸다.
어디서부터 말해야 할까요.
(“쓸데없는 소리는 하지 마, 파이논.”)
그날 수업 전에 아낙사, 어, 교수님을 뵈러 연구실에 방문했었어요. 제가 조금 실수해서 입고 오신 옷을 못 쓰게 되는 바람에, 죄송하게도 티셔츠 차림으로 갈아입게 되셨어요. 그 바람에 지각하신 거니까 제 잘못인 거죠. 이 부분은 꼭 짚고 넘어가고 싶었어요.
(“쓸데없는 소리 하지 말랬잖아.”)
수업 마치고 한 대화라면… 그 드로마스 얘기 말인가요? 제가 드로마스처럼 잘 먹으니까, 저녁 메뉴는 제가 고르는 게 낫지 않겠냐는 뜻으로 하신 말씀이었는데, 의도치 않은 오해를 불러일으킨 모양이네요. 아무튼 아낙사와 제가 소란스럽게 해서 죄송했습니다. 다신 이런 일 없을 거예요.
꾸벅, 파이논이 가슴에 손을 얹고 고개까지 숙여 보였다. 레이시오는 거의 연습장이 되어버린 보고서를 두 사람에게 보이지 않게끔 거꾸로 뒤집어 책상 위로 돌려놓았다.
“좋아, 무슨 일이 있었는지 전혀 듣지 못했지만, 같은 일을 반복하지 않겠다고 맹세한 것만으로도 성공적이었다고 볼 수 있겠지.”
벽에 걸린 시계에 따르면 지금 시간은 2시 32분이었다. 앞으로 3분 안에 징계위원회로 보낼 의견서 초고를 작성하고, 2분 안에 다듬은 다음 메일 발송 버튼을 누르면 3시 전에 다시 랩실로 돌아갈 수 있다. 거기에도 치료해야 할 우둔함이 있으니, 레이시오가 이 황당한 커플 테라피에 하염없이 시간을 뺏길 수는 없는 법이다.
“어쨌든 이 상담은 여기까지야. 다신 학내에서 싸우지 마. 또 견해 차이가 생기면 남들 눈에 안 띄는 곳에서 하던가.”
레이시오가 내린 결론에 파이논이 고개를 갸웃한다. 나란히 앉은 아낙사는 그의 목줄을 끌다시피―실제로 후드에 달린 끈을 잡아당겼으니 단순한 비유가 아니다―제자를 데리고 허겁지겁 동료 교수의 연구실을 떠났다.
“닥터 베리타스 레이시오는 바보가 아니야.”
“갑자기 왜 그 교수님 칭찬을 하세요?”
“드로마스 얘기로 그의 집중을 흐트러뜨리려 했다면, 네 시도는 완전히 실패했다는 뜻이야. 세상에 어떤 교수가 1학년 지도 학생과 저녁 메뉴를 상담해? 그 얘기는 왜 한 거야?”
“아낙사, 전 그냥.”
“또… 남들 앞에선 그렇게 부르지 말라고 했잖아.”
“죄송해요, 벌써 익숙해졌나 봐요.”
“2주 만에?”
그렇다, 2주 만에. 파이논의 열렬한 고백 끝에 두 사람이 조용히 사귀기 시작한 지 2주 만에, 서로를 아낙사와 파이논으로 부르기로 약속한 지 2주 만에, <아낙사고라스 교수님> 아홉 글자가 머릿속에서 싹 지워졌단다. 그렇게 부르지 말라고 하면 낑낑대는 강아지 같은 얼굴로, ‘하지만 그래도 된다고 약속하셨잖아요!’라고 애원하고, 타협안으로 둘만 있을 때라는 단서 조항을 붙이자 더 자주 둘만의 시간을 가져야 한다고 시도 때도 없이 찾아온다. 정말이지 이 직진밖에 모르는 제자를 어떻게 하면 좋을까.
“그래도 지금은 둘만 있으니까, 그렇게 불러도 되죠?”
“그건, 그래, 약속했으니까.”
“아낙사.”
지난 2주간 수십 번, 어쩌면 수백 번 들었을 이 호칭에 심장이 반응하는 걸 보면, 아낙사고라스도 중증이라면 중증이다.
[닥터 베리타스 레이시오의 의견서]
1. 쌍방의 태도로 볼 때 고의성, 악의적 의도가 없음
2. 갈등을 봉합할 시간을 주는 것이 바람직함
3. 아낙사고라스 교수의 연구실을 복도 끝으로 이동하는 것을 제안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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