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선생님, 저 왔어요.”
문이 벌컥 열리는 소리가 파이논의 입장을 알리는 밝은 목소리보다 먼저였다.
남의 방에 들어가기 전에는 노크부터. 아무리 가까운 사이라도 신분을 밝히는 예의를 잊지 말아줬으면 좋겠다. 그렇게 몇 차례나 타박을 들었으면서도 파이논은 좀처럼 이 버릇을 고치지 못했다. 어쩌면 그 책임은 절반쯤 스승인 아낙사에게 있는 걸지도 모른다. “저희가 그렇게 가까운 사이인가요?” 하고 아무것도 모른다는 얼굴로 매번 되묻는 제자를, 제대로 밀어낸 적이 없었으니까. 순진한 척하는 갸웃거림 아래 무슨 의도가 숨어 있는지 뻔히 알면서, 적당히 휘말려 주는 아낙사야말로 이 나쁜 버릇에 무럭무럭 양분을 준 정원사라고 할 수 있었다.
어쨌든 스승의 체면이라는 게 있으니, 아낙사는 오늘도 빠뜨리지 않고 한마디를 덧붙여 본다:
“그런 말은 남의 방에 불쑥 들어오기 전에 하는 거야. 내가 안에서 뭘 하고 있을 줄 알고 그렇게 겁도 없이 문부터 열고 들어와?”
그러면 이제 파이논이 기다렸다는 듯 눈을 동그랗게 뜰 차례였다.
“아낙사 선생님, 그렇게 말씀하시면 마치… 선생님이 혼자 계실 때 엄청난 짓이라도 하는 것처럼 들리네요. 정말 그런가요?”
지나치게 천진한 목소리. 한껏 애교부리는 눈동자. 긴 코트 자락 뒤로 보이지 않는 꼬리가 슉슉 흔들리고 있는 것만 같다. 속이 다 보이는 어설픈 유혹이었다.
‘얼른 걸려들어 주세요, 선생님. 얼른!’
꿈 깨라고 말해 주고 싶다.
그래도 멀리까지 심부름을 다녀온 기특함을 봐서, 아낙사는 강의 교구를 겨누는 것만큼은 면제해 주기로 한다. 교구가 들어 있는 맨 아래 서랍으로 향하는 대신, 아낙사의 손은 제자 앞으로 쓱 내밀어졌다.
깜빡깜빡.
파이논의 속눈썹이 팔랑거렸다. 뭐지? 뭘 원하시는 걸까? 잠시 고민하던 그는 이내 조심스럽게 제 손을 선생님의 손바닥 위로 겹쳐 본다. 그러자 아낙사가 손을 확 뒤집었다.
“네 손 말고, 심부름시킨 물건 말이야, 파이논. 설마 오는 길에 또 골동품값 대신으로 써버린 건 아니겠지?”
“아, 아아. 맞다. 잠시만요.”
순간 파이논의 표정이 눈에 띄게 머쓱해졌다. 그는 헛기침을 한 번 하고는 들고 온 책더미를 책상 위에 턱 올려놓았다. 묵직한 소리와 함께 먼지가 조금 흩날렸다.
“이거 제법 무거웠거든요,” 파이논이 괜히 어깨를 돌리며 투덜거린다. “크렘노스성 사람들은 책도 무기로 쓰나 봐요. 여차하면 이걸 창 대신 던질 수도 있겠어요.”
“음? 제법이군, 파이논. 그 말대로야.”
아낙사는 태연하게 책 표지를 한 번 쓸어내렸다. 입가에 작은 미소가 걸렸다.
“내가 어느 회차 크렘노스 제전의 승자가 될 수 있었던 것도 그 덕분이었지. 마지막 순간 연금 탄환이 다 떨어졌는데, 마침 주머니에 책을 넣어뒀다는 걸 기억해 냈거든. 전략에 따라서는 냉병기가 화기를 압도할 수 있다는 걸 제대로 실감한 경험이었어.”
제자의 눈이 접시만 해진다.
크렘노스 제전, 우승자, 그 아낙사 선생님이? 삼천만 번 이상의 윤회를 고스란히 담고 있는 머릿속 그 어디에도 이런 거짓말 같은 정보는 없었다.
“……진짜요?”
“어떨 것 같아?”
입을 쩍 벌린 파이논과 눈이 마주치자, 아낙사의 어깨가 조금씩 들썩이기 시작했다.
“너무해, 지금 절 놀리신 거예요?”
그 질문에 대한 답은 이윽고 터져버린 두 사람의 웃음소리에 가려져 영원히 알 수 없게 되었다. 간만에 눈가에 눈물이 맺히도록 웃은 아낙사는 버거운 듯이 숨까지 헐떡였다. 이러니저러니 해도 파이논은 그의 착하고 자랑스러운 제자다. 멀리 크렘노스 성까지 다녀온 수고를 가볍게 치하하기 위해 그가 입을 열었을 때였다.
순간, 책더미를 훑던 아낙사의 표정이 날카로워졌다. 부탁했던 목록과 미묘하게 다른 제목들이 몇 권 섞여 있었다.
“무슨 일이세요, 아낙사 선생님.”
곧바로 파이논의 목소리에서도 장난기가 싹 가신다. 그가 다가오려고 하자 아낙사는 빠르게 고개를 저었다.
“별거 아냐… 음, 네 말대로 이 무거운 걸 여기까지 들고 오느라 수고했어, 파이논. 고생한 김에 하나만 더 부탁하려고 하는데, 이것들을 책장에 꽂아주겠어? 제목 순서대로, 한 글자도 틀리지 않게 조심해.”
“…….”
째깍째깍.
집안 어딘가에서 기계장치가 돌아가는 소리가 전에 없이 크게 울린다. 파이논은 눈을 꼭 감고 허망하게 웃은 다음, 혼잣말처럼 중얼거렸다.
“……역시 선생님한테는 못 숨기겠네요.”
“언제부터 안 보였던 거야?”
“미리 말씀드리지만,” 파이논이 먼저 손을 들었다. “완전히 안 보이는 건 아니에요. 지금 선생님 눈도, 머리색도, 웃는 표정도… 다 제대로 눈에 들어오니까요. 그저 정교한 문자나, 혹은 어두운 곳에 특히 취약할 뿐이에요. 안타깝게도 크렘노스 성의 도서관은 이 두 가지 조건을 모두 갖춘 장소였죠.”
무슨 말을 해야 할까. 아낙사는 입술을 가볍게 깨문다.
“그런 표정 짓지 마세요.”
파이논의 목소리가 조금 낮아졌다. 여전히 부드러웠지만, 조금 전까지와는 결이 달랐다. 위로하듯이, 또 가볍게 체념하듯이, 그가 아낙사의 어깨에 손을 얹는다.
“선생님도 늘 말씀하셨잖아요, 모든 일에는 그만한 대가가 따르는 법이라고. 이 정도면 꽤 가볍게 치른 거 아닌가 했는데… 제가 또 너무 순진하게 생각했나요?”
“…….”
“정말로, 그런 표정 짓지 마시라니까요, 선생님. 전 괜찮아요.”
“네 눈이 빛을 잃을 수도 있다는데, 어떻게 괜찮을 수 있어.”
“선생님이 스스로 눈을 찌르는 걸 수천만 번 멀리서 지켜보고만 있어야 했던 그때와 비교하면, 이 정도는 아무것도 아니라고 단언할 수 있어요.”
“넌 정말…….”
아낙사가 말을 멈췄다. 그에겐 이런 표정 짓지 마시라고 했으면서, 정작 본인은 지금 어떤 얼굴을 하고 있는지 알기나 하는 걸까. 아낙사는 낮게 한숨을 내쉬었다.
어쩔 수 없는 제자다. 예전부터 그랬다. 이러니저러니 해도 결국 이 아이가 하는 짓을 제대로 막아본 적이 없다. 밀어내지 못하고, 혼내지 못하고, 나쁜 버릇에 기어이 양분을 줘버리는 정원사. 오늘도 아낙사는 똑같은 행동을 반복할 모양이다.
“……앉아.”
어깨에서 파이논의 손을 치우게 하고, 아낙사는 서랍을 열었다. 이것저것 뒤적이는 소리가 잠시 이어졌다. 아낙사가 꺼내 든 건 쓰다 만 안약 하나와 작은 메모지였다.
“어두운 데서는 아예 일하지 마. 그건 눈이 멀쩡한 사람도 마찬가지야.” 메모지에 뭔가를 적으면서 그가 말한다. “조명은 항상 위에서 아래로. 정면이나 아래에서 오는 빛은 생각보다 피로가 빨리 쌓여. 혹시라도 문서를 읽어야 한다면 한 시간에 한 번씩 눈을 감고 있어, 억지로라도. 웬만하면 곁에 있는 사람들에게 읽어달라고 하고. 눈을 혹사하는 건 절대 금지야.”
메모지를 파이논 앞에 밀어놓고, 안약도 그 옆에 함께 내려놓았다.
“그리고 이건 받아 가. 자기 전에 한 방울씩. 다 떨어지면 말하고.”
파이논이 조용히 두 아이템을 집어 들었다. 글씨를 훑어보는 그의 눈이 잠깐 가늘어진다. 평소 급하면 필체가 날아가는 아낙사지만, 지금은 파이논을 위해 한 글자씩 또박또박 크게 적었다.
“……선생님.”
“왜.”
“좋아해요.”
“…책 정리는 내가 할 테니까 넌 그냥 앉아 있어.”
“아, 그건 저도 할 수 있는데요. 제목 정도는 보여요.”
“이제 귀도 안 들리는 모양이지?”
파이논이 소리 없이 웃었다. 아낙사는 그 웃음을 못 본 척하며 첫 번째 책을 집어 들었다. 오래되어 바삭한 종이 질감을 손끝으로 한 번 훑고, 그는 평소보다 조금 느릿한 템포로 제목을 읽었다.
“《철기 재련》.”
파란 눈이 조용히 위로 들렸다. 아낙사는 아무렇지도 않은 얼굴로 다음 책으로 손을 옮긴다.
“《화기 구조 입문》. 이건 두 번째 칸.”
툭, 책장 안으로 책이 꽂힌다. 한 권, 두 권, 세 권… 이윽고 모든 책이 책장에 자리를 잡을 동안, 아낙사는 지치지도 않고 한 권씩 제목을 읊어주었다. 턱을 괸 채 선생님이 일하는 모습을 감상하던 파이논이 마음속으로 중얼거린다. 이 정도면 잠들기 전에 머리맡에서 책을 읽어달라고 부탁해도 진짜로 들어주실지도 모르겠다.
음, 진짜 부탁해 볼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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