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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파이낙사] (AU) 1 + 1 + ... 1? ④






  샤워 부스의 뜨거운 김을 헤치고 나온 아낙사는 곧바로 두 가지 사실을 눈치챘다.

  하나, 어째서인지 카오스가 개 모습으로 변해 있다는 것. 그리고 또 다른 하나는, 평소 삼 형제로 북적이던 거실이 이상하리만치 활기를 잃었다는 것. 오직 카오스만이 소파에서 가장 좋아하는 자리를 차지하고 누운 채, 가끔 앞발을 움찔거리거나 감은 눈꺼풀을 무의식적으로 깜빡이는 중이었다.

  제법 깊이 잠든 모양이라고 아낙사는 추측했다. 갑자기 개로 변한 이유도 그 때문이라면 앞뒤가 맞는다.

  삼 형제 중 아낙사가 고심해서 고른 침대를 애용하는 녀석은 괘씸하게도 한 명도 없었다. 이쯤 되니 아낙사도 밤마다 슬그머니 침대 위로 기어 올라오는 녀석들을 꾸짖는 일을 반쯤 포기한 상태였다. 파이논이 그가 아끼는 드로마스 인형에 잔뜩 침을 묻혀 놓았을 때조차 그냥 가볍게 넘어가 줬을 정도다.

  (덧붙이자면, 형제들의 침대를 직접 조립하고, 심지어는 테스트까지 해본 사람이 아낙사다. 커버 달린 특대형 동굴 침대와 고급 DIY 원목 침대는 사람이 누워도 충분히 아늑하고 편안했으므로, 개집이 불편해서 그렇다는 변명은 그에게 통하지 않는다.)

  경계가 모호해지고는 있지만, 그럼에도 넘어서는 안 되는 확고한 선이 있다는 사실을 그들 모두가 이해하고 있었다: 침대 위에서 사람 모습은 금지. 그곳은 오직 털이 부숭부숭한 ‘인간의 친구’에게만 허용된 공간이었다.

  그러므로 카오스가 잔다는 행위와 개 형태를 자연스럽게 연결 지어 생각하는 것도 그리 놀랄 일은 아니었다. 혼자 꾸벅꾸벅 졸고 있을 때조차 네발 달린 짐승 모습으로 변해 있다니, 정말 성실한 녀석이었다.

  조심스럽게, 아낙사는 잠든 개 옆에 자리를 잡았다. 카오스와 단둘이 있는 건 꽤 드문 기회였다. 개를 찬찬히 내려다보던 중에 아낙사는 하늘로 솟아 있는 두꺼운 검은 털 한 가닥을 발견하고 피식 웃었다. 만약 카오스가 네 발이 아니라 두 발로 서 있었다면 그의 눈썹 근처가 될 자리였다. 혹시 이것도 고양이 수염과 비슷한 기능을 가졌을까? 고양이의 촉각모, 즉 수염은 감각 기관이다. 그 정도는 아낙사도 알고 있었다. 그렇다면 개의 경우는 어떨까.

  설마 한 번 쿡 찌르는 정도로 깨지는 않겠지?

  쿡.

  “……아.”

  카오스가 뒤척였다.

   순식간에 아낙사는 졸음 가득한 둥근 개 눈과 마주 보게 됐다. 보랏빛 도는 푸른 눈이 너무나 맑아, 아낙사는 그 안에 비친 자신의 모습을 거울처럼 들여다볼 수 있었다. 개는 말없이 그에게 몸을 기댔다. 부드러운 털이 반바지 차림의 허벅지에 닿아 간지러웠다. 개는 마치 이렇게 말하고 있는 것 같았다.

   – ‘돌아오신 줄 몰랐어요.’

   “평소보다 일찍 끝났어,” 아낙사가 느긋하게 입을 뗐다. “강의하던 건물에 수도관이 터지는 바람에 물탱크까지 문제가 생겼거든. 수업은 ‘추후 통지가 있을 때까지 휴강’이야. 강의실이 아니면 수업을 진행할 수 없다니 도무지 이해가 안 되는군. 그 사람들의 꽉 막힌 사고방식이란……. 흠, 아무래도 상관없는 얘기야. 나머지 둘은?”

  형제들 이야기가 나오자 카오스가 앞발을 써서 소파 근처 커피 테이블에 놓여 있던 무언가를 끌어당겼다. 자세히 보니 그건 지역 농산물 마켓의 전단지였다. 어디 보자, 날짜와 시간, 그리고 장소는, 음. 여기 있다. 정확히 지금, 이 순간 인근 공원에서 열리고 있는 모양이다.

   “다들 거기 갔단 말이군. 너는?”

   – ‘거절했어요.’

   흥미 없다는 게 분명한 태도였다. 카오스는 고개를 돌려 다시 잠자는 자세로 돌아갔다. 아낙사는 별생각 없이 개의 뒷다리 근처를 부드럽게 쓰다듬기 시작했다.

   “그렇군.”

   그 후로 비록 일방적이었을지언정 대화가 끊겼다. 카오스와 함께하는 침묵은 무거웠지만, 그렇다고 기분 나쁜 느낌은 아니었다. 아낙사는 휴대폰을 꺼내 누스페르마타 학파 공지방을 훑어봤다. 보아하니 그의 학생들은 갑작스럽게 찾아온 휴강 주간 덕분에 대학 생활 최고의 시간을 만끽하고 있는 모양이었다.

   ‘순진하긴,’ 아낙사가 코웃음 쳤다. 학생들을 통곡하게 만드는 데는 네 단어면 충분했다: 다음 과제, 내일 마감.

   곧바로 채팅창이 비명으로 뒤덮였다. 학생들은 우는 이모티콘과 함께 “왜요”, “어떻게 그러실 수 있어요”라는 말을 도배하기 시작했다. 하, 그런다고 마음이 약해질 줄 알고! 올라가는 채팅창을 보며 아낙사가 삐죽 웃었다. 혼란스러운 와중, 누군가 그를 태그했다는 알림이 날아들었다.

 

유리피데스 15:02
아낙사 교수님네 강아지들 사진 보면 그나마 좀 버틸 수 있을듯👀👀 @아낙사고라스

 

  아낙사가 움찔했다. 반사적으로 늘 하는 말(“아낙사고라스라고 불러”)을 날려 보내려다가, 학생의 댓글에 달린 추천 수를 보고 잠시 휴대폰을 내려놓았다. 파이논, 카오스라나, 카오스의 귀여움이 정말로 평균적인 인간의 정신에 그만큼의 영향을 미칠 수 있단 말인가?

   흠…….

   테스트해 볼 가치가 있는 가설이었다.

   아낙사가 상체를 살짝 돌려 카오스를 마주 봤다. 카오스는 눈을 감고 잠든 척하고 있었지만, 아낙사가 조금만 움직여도 귀 끝이 미세하게 쫑긋거리는 걸 보면 아직 깨어 있다는 건 명백했다.

   “내 말 들리나?”

   – ‘음.’

   “가만히 있어, 지금부터 널 만질 거니까.”

   – ‘지금 뭐라고 하신 거죠?’

   대답도 없이 아낙사가 팔꿈치를 기대고 앞으로 엎드렸다. 그러더니 카오스의 신체에서 가장 말랑한 부위를 조물거리기 시작했다. 형제들 중에서 제일 크고 훌륭하다고 내심 자부하는, 털이 부숭부숭하고 선단이 살짝 한쪽으로 휜… 말랑 따끈한 귀 말이었다.

   조물조물. 꾸욱. 꾹.

   물론 세게 붙잡은 건 아니었다. 부드러운 움직임 속에서 그가 카오스에게 스트레스를 주지 않기 위해 얼마나 의식하고 있는지 확실히 느껴졌다.

   “아. 이렇게 하니까 정말 토끼 귀 같군. 흥미로워.”

   토끼 귀? 대체 뭘 하는 건지 정확히 알 수는 없어도, 아낙사가 자기 귀를 만지며 꽤 즐거워하고 있다는 것만큼은 확실했다. 한참을 그러고 놀다가 마침내 아낙사는 귀를 놓아주었다. 물론 그전에 당황한 기색이 역력한 카오스를 재빨리 사진에 담는 것 또한 잊지 않았다.

   “여기서 잠깐 기다려, 아직 안 끝났으니까.”

   – ‘…….’

   아낙사의 두 눈이 수상할 정도로 반짝였다. 행복해 보이니 된 건가. 카오스는 개의 신체 구조가 허용하는 최대한으로 어깨를 으쓱해 보였다. 방으로 사라진 지 얼마나 지났을까, 아낙사는 그 어느 때보다도 즐거운 표정을 짓고 다시 거실로 나타났다. 손에는 작은 드로마스 머리띠가 들려 있었다.

   “이게 너한테 맞는지 보자고. 자.”

   – ‘이해가 안 돼요, 선생님.’

   작은 머리띠가 귀 사이로 딱 알맞게 씌워졌다. 무슨 말이라도 할 줄 알았는데, 잠시 아낙사는 단 한마디도 하지 않았다. 기묘한 침묵이 따랐다. 그렇게 별로인가? 카오스는 시간이 갈수록 점점 불안해지는 걸 느꼈다. 결국 참지 못하고 그가 앞발로 머리띠를 벗으려 하자, 아낙사가 서둘러 막았다.

   “아파?”

   – ‘아뇨. 하지만….’

   “안타깝게도 난 너희들과 달리 개 언어에는 정통하지 못해서 말이지. 아프면 한 번, 아니면 두 번 고개를 끄덕여.”

   한 번. 두 번.

   “좋아. 그렇다면 내 감상을 말해 볼까…….”

   갑자기 그들 사이의 거리는 존재하지 않는 것이 되어버렸다. 아낙사의 두 손이 카오스의 입가를 감싸 쥐었다. 그 강렬한 시선을 피하고 싶었지만, 이 새로운 자세에서는 그러기가 쉽지 않았다.

   “카오스, 너…….”

   – ‘…….’

   “너무 귀엽군!”

   – ‘?’

   “귀여워! 지나치게 사랑스럽잖아! 과연, 이 정도 귀여움이라면 지친 청춘들에게 활력을 불어넣고도 남겠어. 하하하하하하, 이건 세기의 대발견이야!”

   깜짝이야. 뽀뽀당하는 줄 알았다.

   카오스의 꼬리가 애매한 느낌으로 소파를 한 번 툭 쳤다. 웃느라 몸을 들썩이는 통에, 아낙사의 헐렁한 반바지가 자꾸 허벅지 위로 말려 올라가고 있었다. 

   복도 너머 어딘가에서 익숙한 발소리가 희미하게 울려 퍼졌다. 형제들이 돌아오는 소리였다. 어떻게든 두 사람이 들어오기 전에 아낙사의 관심을 이쪽으로 돌려야 했다. 카오스는 말려 올라간 반바지 밑단을 조심스럽게 물더니, 아래로 잡아당겼다.

   – ‘선생님, 아낙사, 여기 봐요…….’

   그게 치명적인 한 수였다는 걸, 카오스는 알아야 했다.

   아낙사는 이미 ‘하하하하하하’ 하고 웃는 걸 멈추고 휴대폰을 들고 있었다. 찰칵, 찰칵. 화면을 보는 아낙사의 눈빛은 저도 모르게 낯부끄러워질 만큼 부드러웠다. 결국 카오스는 낮게 웅얼거리면서 아낙사의 배에 얼굴을 파묻었다.

   “흠,” 그를 토닥거리면서, 한편으로는 진지한 얼굴로 아낙사가 방금 찍은 사진들을 검토해 나갔다. “구도도 훌륭하고 조명 상태도 나쁘지 않아. 역시 나머지 둘 것도 맞춰 사는 게 좋겠어.”

   – ‘그렇게 되지 않기만을 바랐는데요.’

   아낙사가 웃었다. 작지만 진심이 담긴, 보기 드문 미소였다.

   “그 표정, 내 제안에 반대한다는 뜻으로 받아들이지,” 그가 태연하게 말을 이었다. “하지만 이미 늦었어. 가설은 이미 완벽하게 증명됐거든.”

   회백색 개는 온몸을 울리는 깊은 한숨을 쉬었다.

 


 

   멍한 감각이 잠든 파이논의 의식 속으로 천천히 스며들었다.

   꿈속에서 그는 달리고 있었다.

   네 발바닥이 불규칙한 리듬으로 바닥을 내리친다. 빨리. 더 빨리. 계속 움직여야만 했다. 무언가가, 아니, 누군가가 그를 따라잡기 전에 얼른 도망쳐야만 했다.

   그런데 그게 누구였더라?

   하얀 개는 거친 숨을 몰아쉬었다. 미궁처럼 꼬이고 뒤틀린 길이 끝도 없이 이어지면서, 가는 곳마다 그를 가로막는다. 벽은 지나치게 높았고, 숨 막힐 만큼 가까웠다. 모퉁이를 돌자 또 막다른 길이었다. 그의 몸이 다급하게 멈춰 섰다. 그가 얼마나 빨리 달리고 있었는지를 떠올려 보면, 그대로 가까운 벽에 처박히지 않은 건 거의 기적이었다.

   안 돼. 여기서 시간을 끌면 안 된다. 계속 달려야만 했다. 하지만… 아무리 노력해도 대체 어디로 가려고 했는지 전혀 기억나질 않았다.

   생각은 제대로 형태를 갖추기도 전에 의식 너머로 미끄러졌다. 꿈 세계의 논리가 공간에 작용하고 있었다. 그가 서 있던 복도가 조금씩 녹아내리고, 정신을 차렸을 때는 어느덧 넓은 공간 한가운데로 이동한 채였다.

   집인가?

   아니, 집이 아니다. 여긴 파이논에게 제법 익숙해진 그 장소가 아니었다.

   소파 위에 제각기 늘어져 있는 형제들이 보이지 않는다. 각자 뻔뻔하게 차지한 자기 자리도. 파이논이 실수로 깔고 앉는 바람에, 구제할 길 없이 납작해져 버린 드로마스 얼굴 모양의 등받이 쿠션도 없었다. 분명 제대로 사과했을 텐데, 아낙사는 오늘날까지도 툭하면 이 일을 입에 올렸다. 그럴 때마다 어찌나 엄숙한 표정을 지었던지, 살짝 드러난 장난기가 아녔다면 파이논은 진심으로 마음에 깊은 상처를 입었을지도 모른다.

   그 아낙사가 어디에도 보이지 않았다.

   대신 파이논 앞에 서 있는 건 엄격한 인상의 다른 남자였다. 남자의 흰 가운, 흰 장갑, 흰 벽. 주위의 모든 건 무균실처럼 새하얬다. 지나치게 깨끗해서, 누군가 실수로 세상에 표백제를 부어 버린 듯한 풍경이었다. 문득 파이논은 아직도 생생한 기억 하나를 떠올렸다. 그가 처음으로 세탁기 당번을 맡은 날, 아낙사의 출근용 셔츠들을 전부 오묘한 빛깔의 회색으로 물들여 버렸던 일이었다. 다 된 빨래를 가지러 갔다가 꼬리를 말고 돌아 나온 파이논을 보고, 그 카오스조차 웃음을 터뜨렸었다.

   그러나 여기서는 웃는 사람 따위 찾아볼 수 없었다.

   ‘실험체 496호.’

   부르는 소리에 파이논의 귀가 쫑긋하고 움직였다. 남자의 목소리는 이상하게 일그러져 들렸다.

   ‘■■■■■, ■■ ■.’

   무슨 말인지 이해할 수 없어서, 파이논은 새 명령을 기다리며 그저 가만히 서 있었다. 그러자 갑자기 남자가 그의 목에 채워져 있던 목줄을 잡고 거칠게 잡아당겼다.

   숨 막히는 소리와 함께 파이논의 몸이 앞으로 휘청했다. 필사적으로 발톱을 세우고 바닥을 밀어내지만, 목줄은 점점 더 세게 당겨질 뿐이었다. 기도가 조여왔다. 눈물 고인 눈 아래로 바닥이 흐릿하게 보였다.

   서서히 그가 앞으로 끌려가고 있었다. 익숙한 공황이 느껴지면서 파이논은 숨을 헐떡였다. 안 돼, 다시 돌아가지 않겠어! 그러나 목구멍에서는 외침 대신 억눌리고 부서진 소리만이 새어 나왔다.

   “…논. 파이논.”

   질식할 것처럼 새하얀 세계를 뚫고, 다른 목소리 하나가 들려왔다.

   “파이논!”

   파란 눈이 번쩍 뜨였다. 누군가 그의 어깨를 붙잡고 거칠게 흔들고 있었다.

   카오스였다.

   형제는 눈이 동그래진 채, 눈썹은 드물게도 걱정 어린 기색으로 일그러져 있었다. 한 손은 여전히 파이논의 어깨를 단단히 잡은 채였다. 도저히 멈출 수 없는 기침이 터져나왔다. 잠에서 깨고 나서도, 목을 옥죄는 목줄의 감각이 환상통처럼 남아 있었다.

   “윽…….”

   이윽고 제대로 사고할 수 있게 되자, 처음으로 떠오른 생각은 이것이었다.

   “……아낙사 선생님은?”

   카오스는 바로 대답하지 않았다. 대신, 가볍게 옆으로 물러서며 벽에 걸린 시계를 보여주었다. 15시 32분. 젠장, 너무 오래 자버렸다. 아낙사는 이미 한참 전에 출근했을 시간이었다.

   “혼자 간 게 아니야. 카오스라나가 같이 갔어.” 카오스가 조용히 덧붙였다. 파이논은 멍하니 시계를 보고 있다가, 이내 털썩하고 침대 헤드에 등을 기댔다.

   “다행이다…….”

   작은 목소리가 흘러나왔다. 파이논이 몸을 웅크렸다. 거의 무의식에 가까운 움직임이었다. 어깨가 움츠러들고, 자신을 작아지게 만들려는 듯이 무릎을 당겨 안았다. 잠들어있는 동안 어느 시점에 인간 모습으로 돌아온 게 분명했다. 아무것도 걸치지 않은 가슴이 숨 쉴 때마다 불규칙하게 오르내렸다. 온 몸은 식은땀으로 젖어 있었다. 아낙사가 봤다면 분명 실망하겠지.

   한심하다. 꿈 같은 거에 휘둘려서 덜덜 떨기나 하고.

   “따라갈래?”

   넌지시 카오스가 질문을 던졌다. 파이논은 놀라서 눈을 깜빡였다.

   “넌 괜찮겠어?”

   그의 형제는 사람 많은 공간을 그리 좋아하지 않는다. 특히 이 시간의 대학처럼, 활기 넘치는 인간들이 우글거리는 장소는 더더욱. 그러나 카오스는 떨떠름한 얼굴로 그를 바라볼 뿐이었다.

   “지금 너한테 그런 말을 듣다니. 거울이라도 가져와야 하나.” 

   …그렇긴 하네. 파이논이 힘없는 웃음을 뱉었다. 세상에, 카오스가 그를 위로하려 들 정도라면, 지금 그의 꼴이 얼마나 엉망이라는 건지 감도 잡히지 않는다. 땀에 젖은 머리를 빗어 넘기면서 파이논은 잠시 가만히 생각에 잠겼다.

   “가자. 가는 게 좋겠어.”

   그 말과 함께, 파이논은 마침내 무거운 몸을 일으켰다.



   아낙사의 대학으로 향하는 그들의 첫 여행은, 아무리 좋은 말로 포장해도 실수 연발이었다.

   오늘 안에 달려갈 수 있는 거리는 아니고, 그렇다면 버스라는 걸 타야 했는데, 두 사람 모두 당혹스럽게도 아낙사의 차가 아닌 이동 수단에 익숙하지 않았다. 잠시 귓속말로 작전 회의를 나눈 끝에 지나가는 사람을 붙잡는 역할은 파이논이 맡기로 했다. 파이논과 대화를 나눈 노부인은 ‘늠름하고 훤칠한 청년들’을 도울 수 있다니 매우 기쁘다고 하며, 친절하게 길을 안내해 주었다. 조금 떨어진 곳에서 카오스는 저 대화에 끼느니 차라리 녹아서 증발해버리고 싶다는 얼굴로 서 있었다.

   버스 요금을 내는 것도 순탄치 않았다. 알고 보니 대부분의 사람들은 “교통 카드”나 “토큰”을 써서 돈을 지불하는 모양이었다. 파이논과 카오스 모두 그게 무슨 뜻인지도 몰랐다. 한참을 쩔쩔맨 끝에, 두 사람은 현금으로 버스 요금을 낼 수 있었다. 기사는 둘을 번갈아 보며 껄껄 웃었다.

   “버스 처음 타나 봐?”

   파이논이 어색하게 웃었다. “그렇게 티가 나나요?”

   “학생, 같이 온 쌍둥이 형제가 좀 전에 카드 단말기를 무슨 전생의 원수처럼 노려보고 있었어.”

   카오스가 그 기계에 무슨 짓을 저지르지 않은 게 천만다행이었다.

   우여곡절 끝에 그들은 자리에 앉았다. 좌석이 좁아서 버스가 크게 회전할 때마다 서로의 어깨가 스쳤다. 그러나 둘 다 이에 대해선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창밖으로 도시 풍경이 퍼즐 조각처럼 흘러갔다. 그러다 조금씩 눈에 익은 풍경이 보이기 시작했다. 늘 아낙사의 차 조수석이나 뒷자리에서 보던 거리였다. 시간대는 대개 이른 아침. 운전석에서는 교통 체증에 대해 쉴 새 없이 투덜거리는 아낙사의 목소리가 들려오곤 했다.

   아낙사를 떠올리자 파이논의 마음 속 무언가가 부드럽게 녹아내렸다. 그제야 파이논은 자신이 이 짧은 여행 내내, 아니, 그 전부터 얼마나 긴장하고 있었는지를 깨달았다.

   버스는 천천히 그들을 목적지로 데려다주었다. 조금 전부터 카오스는 꾸벅꾸벅 졸기 시작하더니, 어느새 파이논의 어깨에 머리를 기대고 잠들어 있었다. 근처에 앉아 있던, 70대쯤 되어 보이는 인상 좋은 승객이 노선 안내판을 힐끔 보고는 파이논 쪽으로 몸을 살짝 기울였다.

   “학생들, 다음 두 정거장 가서 내리면 돼,” 남성은 카오스가 깨지 않도록 조심스럽게 속삭이며 말했다. 파이논은 잠깐 눈을 깜빡이다가 부드럽게 미소 지었다.

   “고맙습니다.”

   그 사람은 가볍게 손을 내저으며 버스에서 내렸다. 지팡이를 짚으며 그가 어딘가로 향한다. 미소는 그 뒤로도 계속 파이논의 입가에 머물러 있었다. 악몽을 꾼 탓에, 이렇게 밖에 나와 있는 것이 새삼 비현실적으로 느껴졌다. 햇빛이 들어오는 버스에 앉아서, 낯선 사람과 평범하기 이를 데 없는 대화를 나누며, 그들도 이 일상적인 풍경 속 당연한 일원처럼 대해지는 일이.

   파이논은 잠든 형제를 부드럽게 흔들어 깨웠다. 남은 거리는 이제 두 정거장. 곧 그들의 아낙사를 만나러 갈 시간이었다.



   아낙사의 연구실로 가는 복도는 평소보다 조용했다. 어쩌면 그동안 파이논이 눈치채지 못했을 뿐, 늘 이런 느낌이었던 걸지도 모른다. 아낙사가 강의며 “쓸데없는 회의”로 자리를 비우는 동안, 파이논과 형제들은 주로 아낙사의 개인 연구실이나 제자들이 있는 방에서 그가 돌아오기만을 기다리곤 했다. 그 “회의”라는 게 정말 아낙사가 묘사한 그대로라면, 무슨 일이 있어도 관여하지 말자고 형제들은 이미 결론을 낸 참이었다. 그래도 파이논은 마음 한구석에 은밀한 소망을 남겨놓았다. 언젠가 아낙사가 “회의”에 따라와 달라고 부탁하는 날이 올지도 몰라, 하는.

   조용한 복도에 서 있자니, 닫힌 연구실 문 너머로 희미한 말소리가 새어 나왔다. 카오스라나의 낮고 덤덤한 톤, 뒤이어 들려오는 아낙사의 차분한 말투. 말다툼하는 것처럼 들리지는 않았지만, 그렇다고 평범한 대화 같지도 않았다. 파이논은 망설였다. 들어가도 되려나?

   그때 복도 반대편에서 발소리가 다가왔다. 무심코 고개를 들었다가, 파이논은 그대로 얼어붙어 버렸다.

   남자. 흰 실험 가운 차림. 한 손에만 흰 장갑. 깊게 팬 주름 사이로 피곤함이 내려앉은 얼굴. 인상에 엄격함을 더하는 짙은 눈썹.

   끔찍한 찰나, 파이논을 둘러싼 세계가 갑자기 좁아졌다. 머리 위의 형광등은 눈이 시릴 만큼 밝아지며 복도를 살풍경한 백색으로 물들였다. 파이논의 숨이 턱 막혔다.

   도망쳐. 본능이 그렇게 외쳤다. 왼발이 한 걸음 뒤로 바닥을 짚었을 때, 뒤늦은 현실 감각이 돌아오기 시작했다.

   아니. 꿈에서 본 그 남자가 아니었다. 그저 어렴풋이 느낌이 비슷한 사람일 뿐이었다. 중년 남성이라는 특징과 옷차림을 제외하면, 얼굴 생김도 그다지 닮지 않았다. 남자는 파이논이 자신을 빤히 쳐다보는 걸 느끼고 잠시 의아한 표정을 지었으나, 이내 별생각 없이 가던 길을 계속 걸어갔다.

   파이논은 곁에 서 있던 카오스의 긴장한 냄새를 맡을 수 있었다. 그의 가슴 깊은 곳에서 낮게 으르렁거리는 소리가 울렸다.

   “괜찮아, 그냥 내가 착각한—”

   너무 늦었다.

   카오스는 벌써 무서운 속도로 돌진하고 있었다. 회색 잔상처럼 보이는 누군가가 자신을 향해 달려들자, 연구원은 소스라치게 놀라며 들고 있던 서류를 떨어뜨릴 뻔했다. 다음 순간, 파이논은 거의 반사적으로 움직였다. 카오스가 남자에게 닿기 직전, 두 팔로 가까스로 그를 끌어안아 멈춰 세웠다.

   “그만둬!”

   조용하던 복도에 날카로운 외침이 울려 퍼졌다. 카오스는 그의 품 안에서 거칠게 몸부림쳤다. 순간적으로, 파이논은 그가 빠져나갈지도 모른다는 공포를 느꼈다.

   그때 근처 연구실 문이 벌컥 열리면서 카오스라나가 먼저 모습을 드러냈다. 그는 복도를 한 번 훑는 것만으로 빠르게 상황을 파악해 냈다. 즉시 문을 가로막으며 그가 말했다.

   “선생님. 나오지 마세요.”

   불행히도 아낙사가 남의 말을 잘 듣는 걸로 유명한 사람은 아니었다. 오히려 그는 위험한지 아닌지 자기 손으로 직접 푹 찔러 보고 나서야 직성이 풀리는 부류에 가까웠다. 짜증 섞인 한숨을 쉬면서, 그가 카오스라나를 밀치고 지나갔다.

   그때까지도 카오스는 파이논의 품 안에서 거칠게 몸부림치고 있었다. 카오스의 목 깊은 곳에서 거친 으르렁거림이 터져 나왔다. 거센 몸부림에 파이논은 거의 균형을 잃을 뻔했다. 반사적으로 그의 팔에 힘이 들어갔다. 흰 가운 차림의 연구원은 새파랗게 질린 얼굴로 오도 가도 못하고 있었다.

   아낙사의 냄새가 점점 그들에게 가까워졌다. 파이논은 팽팽하게 버티고 있던 무언가가 자신의 안에서 뚝 끊어지는 걸 느꼈다. 그는 멍하니 서 있는 남자를 노려보며 숨결 아래로 거칠게 속삭였다.

   “더는 당신의 안전을 보장할 수 없습니다. 그러니 꺼지시죠. 당장.”

   그 이상의 경고는 필요하지 않았다. 연구원은 비틀거리며 뒷걸음질 치더니 이내 복도 끝으로 빠르게 도망쳤다.

   “둘 다 뭐 하는 짓이야?”

   아낙사의 목소리가 바로 가까이에서 들렸다. 그래서였을까, 카오스가 더욱 강하게 몸을 뒤틀었다. 아낙사가 그들을 향해 손을 뻗어야겠다고 결심한 것도 정확히 바로 이 순간이었다.

   붉은 피가 바닥 위로 후드득 튀었다.

   아낙사가 한 손으로 왼쪽 눈을 가리며 휘청거렸다. 눈가를 감싸 쥔 손가락 사이로 피가 흘러내렸다. 파이논의 얼굴이 순식간에 하얗게 질렸다. 그는 잠시 아무 말도 하지 못하고 아낙사의 손등을 타고 흐르는 붉은색만 멍하니 바라보았다. 먹먹해진 귓가에 카오스라나의 다급한 외침이 들려왔다.

   “아낙사!”

   최면에서 풀린 것처럼 파이논의 청각이 돌아왔다. 정작 아낙사는 짜증스럽다는 듯 혀를 차고 있었다. 그는 손등으로 뺨을 타고 흐르는 피를 대충 훔쳐냈다. “그냥 좀 긁힌 거야,” 하고 그가 중얼거렸다. 그 말이 설득력을 얻기에는 흐르는 피의 양이 너무 많았다.

   한동안 카오스는 아직도 반쯤 야생동물 같아 보였다. 숨은 거칠고, 오르내리는 어깨가 불규칙했다. 아낙사의 익숙한 체향 덕분이었을까, 아니면 머리칼을 천천히 쓸어 넘기는 일정한 온기 덕분이었을까. 그의 눈에 서려 있던 위험한 기운이 서서히 누그러들기 시작했다.

   그리고 마침내 그는 아낙사의 얼굴을 제대로 보게 되었다. 마치 “잘했어”라고 말하려는 듯 자랑스럽게 웃는 얼굴과, 그 얼굴의 거의 절반을 물들인 붉은색을.

   카오스는 그대로 굳어버렸다.

   “어째서…… 아.”

   갑자기, 지금 상황에 어울리지 않게도, 아낙사는 그가 길을 잃은 어린애처럼 보인다는 엉뚱한 생각을 했다. 카오스는 불에 덴 듯이 화들짝 뒤로 물러섰다. 그러더니 모두를 밀쳐내고 긴 복도를 달려 나갔다.

   옷가지들이 그가 남긴 흔적처럼 하나둘 뒤에 남겨졌다. 잠시 후, 완전히 개로 변한 그가 무서운 속도로 계단을 질주해 내려가는 발톱 소리가 복도에 울려 퍼졌다.

   잠깐의 정적 동안 파이논과 카오스라나는 서로 눈길을 교환했다. 무슨 합의에 도달했는지 두 사람은 즉시 양쪽에서 아낙사의 팔을 하나씩 붙잡았다. 연구실로 질질 끌려가면서 아낙사는 짜증스럽게 발을 굴렀다. 그래봤자 두 녀석들은 꿈쩍도 하지 않는다.

   “상처를 봐야 해요,” 카오스라나가 단호하게 말했다.

   “피가 나고 있잖아요,” 파이논이 덧붙였다. 여전히 창백한 얼굴이었다.

   “흥. 이보다 심한 일도 겪어 봤어. 이 정도는 아무것도 아니—”

   “그게 뭐가 자랑이라고요,” 그들이 동시에 말허리를 잘랐다.



   손전등을 들고 아낙사는 빠르게 숲길을 올라가고 있었다.

   도대체가, 조금 긁힌 것 가지고 그 두 녀석은 호들갑이 너무 심하다. 핏자국을 닦아내자 상처는 그렇게 피가 많이 흐른 게 신기할 정도로 자그마했다. 쌍꺼풀 있는 곳과 눈썹뼈 아래 살이 (아낙사 기준으로) 조금 패였을 뿐이었다. 물론 감염 방지를 위해 나중에 병원에 들러야겠지만, 당장 그가 픽 쓰러져 죽을 것처럼 야단을 떨 일도 아니었다.

   수풀을 헤치고 그가 앞으로 나아갔다. 뒤쪽에서 바스락 소리가 들려도 이제는 놀라지 않는다.

   이번에는 올빼미와 낙엽 소리 대신, 저 멀리 노을 진 하늘 위로 집을 찾아가는 기러기 종대와, 연두색 잎사귀들이 일제히 바람에 떨리는 소리가 아낙사를 반기고 있었다. 혹시나 해서 손전등을 챙기긴 했는데 (그리고 여분의 배터리도), 녀석이 어지간히 멀리 도망간 게 아닌 이상 손전등이 활약할 순간은 오지 않을 것 같았다.

   왼쪽 눈을 덮고 있는 안대 탓에 움직임이 조금 어색했다. 아낙사가 조금만 더 감상적인 사람이었다면 추억에 잠길 만한 상황이었지만, 아쉽게도 그는 그런 감상에 쉽게 빠지는 사람이 아니었다.

   얼마나 걸었을까. 저기, 잘려 나간 참나무 밑동 아래, 그가 찾는 대상이 보였다.

   “찾았다.”

   이 밑동에 강아지 청년들을 유혹하는 무슨 마력이라도 있는 건지, 아니면 그저 우연의 일치였던 건지, ‘파이’를 처음 만났던 바로 그 자리에 카오스는 동그랗게 누워있었다. 매번 공들여 닦아 주는 까만 발바닥이 벌써 지저분해진 걸 보고 아낙사가 믿을 수 없다는 듯 눈살을 찌푸렸다.

   툭.

   푹신한 무언가가 개의 코 앞에 휙 던져진다. 카오스는 느릿하게 고개를 들었다. 아낙사가 가장 아끼는 오래된 하늘색 드로마스 인형이 땅 위를 데굴 굴러가고 있었다. 인형의 목에는 늘 달려 있던 리본 대신 열쇠 하나가 걸려 있었다. 집 열쇠였다. 한 사람당 하나씩 나눠주며, 절대 잃어버리지 말라고 아낙사가 몇 번이나 강조했던 바로 그 열쇠.

   “물어와.”

   아낙사가 장난스럽게 말한다. 안대가 씌워지지 않은 쪽 눈이 꼭 이렇게 말하는 것 같았다.

   ‘그러게, 누가 복도에 버리고 가래?’

   카오스는 가만히 인형을—그 목에 걸린 열쇠를 내려다봤다. 그러다 천천히 몸을 일으켰다. 최대한 침이 묻지 않도록 조심 또 조심하면서, 그는 하늘색 드로마스 인형을 입에 물었다. 어느새 칭찬받는 일에 익숙해진 꼬리가, 기대에 차 흔들리고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