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요한 자신의 침실에서 아낙사는 눈을 떴다.
새로 바꾼 커튼 사이로 부드러운 아침 햇살이 살짝 새어 들어오고 있었다. 어스름 속에서 서로 다른 호흡이 나른하게 겹쳤다. 이상할 만큼 평화롭고, 또 가정적인 분위기. 아낙사는 아직 이런 분위기에 완벽히 적응하지 못했다.
왼쪽에서는 파이논이 흰 머리카락을 사방에 흩뜨린 채 베개에 얼굴을 묻고 잠들어 있었다. 드러난 팔 하나가 아낙사의 허리를 가로질러 떡하니 놓여 있었다. 반대편에서는 카오스가, 벽돌 담장을 발견한 담쟁이덩굴의 조용한 집념을 띄고, 옆으로 누운 자세로 그에게 달라붙은 채였다. 그나마 카오스라나만이 먼저 일어나 조용히 집안을 돌아다니면서 형제들의 마지막 남은 품위를 지켰다.
아낙사는 말 없이 어둑한 천장을 응시했다.
대학 본부 측의 권고로 (말이 권고지, 사실상 강제 조치였다) 석 달간의 요양 휴직을 부여받은 지 2주 차. 우리 집 개들이 최악의 응석받이가 되어버렸다.
우선 어딜 가나 아낙사의 뒤를 졸졸 따라붙는다. 처음 몇 번은 아낙사도 단순히 우연일 거라고 생각하고 넘어가려고 했다. 하루 종일 동거인끼리 동선 한 번 겹치지 않을 만큼 집이 넓은 것도 아니었으니 말이다. 하지만 계속 속아 넘어가 주기엔 녀석들의 연기가 조금 서툴렀다. 예를 들어 물을 마시러 움직이면 몇 분 뒤 파이논이 부엌에 나타났다. 소파에 앉아 논문을 읽고 있으면 어느새 카오스가 근처 바닥에 자리 잡고 누워 있었다. 창문 앞에서 기지개를 켜다 보면 잠시 후 카오스라나가 식물 상태를 점검하는 척 주위를 서성거렸다.
한 명씩. 시간차를 두고. 마치 “우연히 들렀습니다”라고 얼굴에 써 붙인 것처럼.
녀석들이 귀찮을 만큼 따라붙는 원인에는 어느 정도 짐작 가는 바가 있었다. 그날 연구실 복도에서 벌어진 그 사건이었다. 그야 썩 보기 좋은 꼴은 아니었을 테니까, 굳이 그런 모습을 목격하게 만든 건 아주 약간 미안하게 생각하고 있었다. 모래알만 한 죄책감에 더해, 그래, 과연 너희들이 어디까지 하나 보자는 심정도 있었음을 아낙사는 솔직하게 인정한다. 그렇게 방관하는 사이, 형제들은 아주 빠른 속도로 선을 넘고 있었다.
그 대표적 예시 하나, 어젯밤의 파이논.
목욕을 마치고 나온 아낙사는 욕실 앞에 우두커니 서 있던 파이논과 눈이 마주쳤다. 샤워실이 있는 공용 화장실은 아무래도 붐비는 경우가 잦아서, 아낙사는 느긋하게 몸을 담그고 싶을 때 주로 그의 침실에 딸린 욕실을 사용했다. 그러다 보니 삼 형제도 어느덧 거기를 아낙사의 영역으로 인식하고 발을 들이려 하지 않았다.
“여기서 뭐 해?”
“선생님 나올 때까지 기다렸어요.”
파이논은 파자마를 입고 이미 잘 준비를 마친 상태였다. 물방울이 젖은 민트색 머리카락 끝을 타고 툭 떨어졌다. 아낙사는 수건으로 머리를 대충 털다가 문득 한 가지 사실을 깨달았다.
“설마 들어오려고 한 건 아니겠지?”
파이논이 화들짝 놀라더니 시선을 피했다. 꼭 잘못을 들킨 강아지 같다고 해야 할까. 아낙사는 손을 들어, 그대로 그의 콧잔등을 톡 쳤다.
“아야.”
눈을 찔끔 감고 파이논이 코를 문질렀다. 별로 안 아픈 소리를 낸 주제에 엄살은. 그가 억울함 가득한 얼굴로 중얼거렸다.
“……저희 이미 같이 목욕도 한 사이인데.”
아낙사는 황당하다는 듯 그를 바라봤다. 대체 우리가 언제 같이 목욕했다는 거지? 잠깐의 침묵 끝에 그는 한 가지 가능성을 떠올렸다. 설마 파이논이 아직 ‘파이’였을 때, 욕실 바닥을 물바다로 만들어 가며 그를 씻겨 줬던 그때를 말하는 건가?
“파이논,” 아낙사가 파자마 어깨에 손을 얹으며 말했다. “난 그때 옷을 입고 있었어. 옷 입은 채로 욕실에 들어간 걸 목욕했다고 부르긴 어렵지.”
“그렇지만 축축해졌다고 중간에 벗어 버리셨잖아요.”
“그게 누구 탓이었는데? 네가 자꾸 몸을 터는 바람에 그랬던 거잖아.”
“죄, 죄송해요… 그건 저로서도 어쩔 수 없는 본능이라…….”
“게다가 잊은 모양인데, 속옷까지 벗은 적은 없었어.”
“…….”
“기억 안 나?”
“오히려 잊을 수가 없어서 더 문제인데요…….”
결국 아낙사는 파이논을 붙잡고, 그날의 사건을 ‘함께 목욕한 것’으로 분류할 수 없는 이유를 처음부터 차근차근 설명해 줬다. 남이 씻고 있을 때 허락 없이 욕실에 들어가면 안 되는 이유에 대해서도. 설명하다 보니, 개인 공간이라는 개념부터 사생활에 이르기까지 짚고 넘어갈 게 한둘이 아녔다. 파이논은 중간중간 풀이 죽은 얼굴로 고개를 끄덕였고, 마지막에는 다시는 이러지 않겠다고 순순히 약속하면서 작은 해프닝은 일단락되는 듯했다.
그런 줄 알았는데, 아무래도 보충 수업이 필요한 모양이었다.
조심스럽게 아낙사는 허리에 놓인 파이논의 팔을 밀어내려 했다. 반응은 즉각적이었다. 파이논은 잠결에 칭얼거림과 짜증의 중간쯤 되는 소리를 내더니, 눈도 뜨지 않고 오히려 아낙사를 더 꽉 붙들었다. 게다가 꾸물꾸물 안겨 오기까지. 곧이어 그가 만족스러운 듯 깊은 한숨을 쉬는 느낌이 온몸을 통해 전해졌다. 아낙사는 믿을 수 없다는 얼굴로 그를 내려다봤다.
“네가 무슨 아기도 아니고…….”
문득 아낙사는 마음 한구석으로, 이 백발 청년이 아기라고 불리는 걸 내심 좋아할지도 모른다고 생각했다. 다행이라면 다행히도 파이논은 그 말을 알아들을 만큼 깨어 있진 않았다.
옆에서 카오스가 살짝 몸을 뒤척였다. 비유하자면, 대형견이 가장 좋아하는 쿠션에 기대 자는 모습과 크게 다르지 않았다. 문제는 무생물인 쿠션과 달리 살아 있는 사람인 아낙사에게는 감각이 있다는 점이었다. 따뜻한 숨결이 닿을 때마다 아낙사는 간지럼을 참기 위해 안간힘을 쓰고 버텼다.
도저히 못 참겠다는 생각이 들 무렵, 열려 있는 침실 문을 가볍게 두 번 두드리는 소리가 났다.
문가에는 카오스라나가 서 있었다. 그는 태연하게 방 안을 훑어봤다. 샌드위치 속처럼 형제들 사이에 꽉 낀 아낙사와, 각기 다른 방식으로 ‘샌드위치 속’에게 찰싹 달라붙어 있는 ‘식빵’들을. 카오스라나의 눈이 비판적으로 가늘어졌다. 흠, 샌드위치 빵은 저렇게 하얀 것보다는 조금 더 노릇하게 구운 게 보기 좋지 않나?
“선생님, 커피 내릴 준비 다 됐어요.”
그래도 눈길과 달리 말투는 다정했다. 잠시 뜸을 들인 뒤 카오스라나가 덧붙였다.
“지금쯤 필요하실 것 같아서요.”
아낙사는 파이논의 훤히 드러난 맨 어깨를 내려봤다가, 이번에는 반대쪽에 달라붙은 거대한 인간 형태의 난로를 흘끗 돌아봤다. 새삼스럽지만 이 구성이라면 카오스라나 너는 대체 어디서 자고 있었냐는 질문이 아낙사의 목 끝까지 차올랐다. 양옆을 이미 두 녀석이 차지하고 있다면, 그럼 남은 곳은 발밑이거나, 아니면…….
“그래. 금방 일어날게.”
건조하게 대답한 아낙사는 우선 현실적인 문제부터 해결하기로 마음먹었다. 당면한 과제: 침대에서 빠져나가는 것. 녀석들의 이 견고한 포위망을 뚫을 방법 말이었다. 탈출 경로를 잘 계획해야 했다. 파이논의 팔을 풀어내면 카오스가 깰 가능성이 높고, 카오스를 먼저 밀어내자니 파이논이 더 달라붙을 가능성이 있었다. 둘 다 자극하지 않으면서 아낙사만 몰래 빠져나갈 방법이 어디 없을까?
“도와드릴까요?”
카오스라나가 말을 걸었다. 웃음을 참는 기색이 역력했다. 아낙사는 못마땅한 얼굴로 중얼거렸다.
“됐어. 지금 방법을 생각하는 중이야.”
“필요하면 불러주세요.”
지극히 공손한 제안이었다. 다만 아낙사는 그 뒤에 생략된 문장을 똑똑히 들을 수 있었다—‘곧 그렇게 되실 것 같네요’.
흥. 누가 도와달라고 할 줄 알고?
결국 아낙사는 그의 도움을 받았다.
어이없을 정도로 해결책은 간단했다. 카오스라나는 천근만근으로 무겁게 느껴지던 파이논의 팔을 가볍게 옆으로 치우더니, 아낙사를 쏙 들어 올려 침대 아래로 내려주었다. 그리고 그가 누워 있던 자리에 잽싸게 베개를 밀어 넣었다. 이런 조잡한 속임수에 속을 리 없다고 생각했지만, 놀랍게도 파이논과 카오스는 잠시 주저했을 뿐, 곧 아낙사의 체온이 남아 있는 베개에 자연스럽게 달라붙었다.
‘냄새 때문이에요,’ 하고 카오스라나가 작게 속삭였다. 숨죽인 음성은 아직 잠든 두 사람을 위한 것이었다.
침실에서 나오자마자 아낙사는 길게 기지개를 켰다. 카오스라나는 이미 단정한 실내복 차림이었다. 머리카락도 어느 정도 정리된 상태였다. 곁눈질로 카오스라나를 살피면서 아낙사는 생각에 잠겼다. 얼마나 일찍 일어난 걸까. 그보다 더 중요하게는, 간밤에 대체 어디서 잤던 걸까. 물어보면 분명 솔직하게 대답해 주겠지만, 돌아올 대답이 듣고 싶은 내용일 거라는 확신이 서지 않았다. 아낙사는 결국 캐묻지 않는 걸 택했다. 대신 씻고 나올 테니 커피 두 잔을 준비해 달라고 말한 뒤 화장실로 향했다.
형제들 중에서 커피를 마실 줄 아는 사람은 카오스라나가 유일했다. 그렇다고 특별히 커피의 맛이나 향을 즐기는 것처럼 보이진 않았다. 그래도 자기 외에 커피를 마시는 식구가 하나쯤 더 있다는 건 생각보다 괜찮은 기분이었다. 다 큰 자식과 술잔을 주고받는 부모의 마음 비슷한 거라고나 할까. 물론 아낙사는 지금까지, 또 앞으로도 그런 경험을 할 일이 없을 테지만.
“다음 주에 실밥 풀러 오라고 했었죠,” 카오스라나가 아낙사의 왼쪽 눈가를 흘끗 보며 차분하게 말했다. “그만 만지세요. 그러다 덧나겠어요.”
“네가 뭐라고 하는 횟수가 실제로 내가 눈을 만지는 횟수의 10배는 될 것 같은데.”
“저랑 대화하는 동안에도 네 번이나 만지셨어요.”
아낙사가 짜증 섞인 쳇 소리를 뱉었다. “그런 건 왜 세고 있는 거야?”
카오스라나가 대답하기도 전에, 뒤쪽에서 우다다 달려오는 묵직한 발소리가 들려왔다. 그리고는,
“선생님! 눈은 좀 어떠세요?”
파이논이 거의 몸통박치기 수준으로 아낙사에게 와락 달려들었다. 커피가 컵 가장자리로 위험하게 흔들렸다. 그가 간신히 음료를 사수하는 동안, 파이논은 잠에서 깬 지 30초도 안 된 사람이라고는 도저히 생각할 수 없는 힘으로 아낙사를 꽉 껴안았다.
“파이논… 이러다 내 내장들도 병원 신세를 지겠어.”
문제의 백발 청년은 그의 어깨에 얼굴을 묻고 졸음 섞인 웃음을 터뜨릴 뿐이었다. 부드러운 백발이 밤사이 감전이라도 당한 것처럼 사방으로 뻗쳐 있었다. 아침마다 화장실에서 가장 오랜 시간을 보내는 사람이 (아낙사를 제외하면) 파이논인 이유도 이해가 가는 몰골이었다. 한동안 곁에 찰싹 붙어 있던 파이논은, 결국 아낙사가 두어 번 등을 토닥여준 다음에야 그를 놓아주었다. 그 토닥임은 ‘이제 그만하지?’를 의미하는 종을 초월한 신호였다.
“가서 머리 빗고 와.”
“으응… 네.”
순종적으로 파이논이 터덜터덜 걸어갔다. 파이논은 지나가며 카오스라나와 짧게 눈인사를 나눴다. 평화는 그로부터 딱 5초 정도 지속되었다.
다음으로 복도에 나타난 사람은 카오스였다.
파이논과 달리 그는 달려오지도, 이제는 그들 사이에서 아침 인사 대신이 되어버린 ‘눈은 괜찮냐’는 질문도 건네지 않았다. 그저 아낙사와 카오스라나 사이를 굳이 가로질러 걸어갔을 뿐이었다. 거의 다 지나갔을 무렵 카오스는 두 사람의 반응을 살피려는 듯 잠깐 멈춰 섰다. 아무도 항의하지 않자 그는 다시 부엌을 향해 걷기 시작했다.
복도는 네 사람이 나란히 걸어도 충분할 만큼 넓었다.
“…카오스라나.” 황당한 시선을 거두지 못하던 아낙사가 마침내 입을 열었다. “네 눈에도 지금 일부러 우리 사이로 걸어간 걸로 보였어?”
“그런 것 같네요.”
“저러는 이유가 뭔지 설명해 본다면?”
“막 일어났을 때가 가장 솔직하거든요. 사실 저희 셋 다 그렇죠. 지금쯤이면 아셨을 거라고 생각했는데요.”
카오스라나가 태연하게 커피를 한 모금 더 들이마셨다. 그의 입꼬리가 살짝 아래로 내려갔다. 역시 아직도 맛은 없는 모양이다.
파이논의 생기 넘치는 “저녁 다 됐어요!”라는 외침은, 아낙사가 마지막으로 위장에 뭔가를 집어넣은 이후로 시간이 얼마나 흘렀는지를 알려 주는 유일한 지표였다. 간헐적인 마우스 딸깍임이 멈췄다. 아낙사는 숨을 내쉬며 의자에 등을 기댔다. 집중하는 동안 잊고 있었던 눈가의 통증이 되살아나고 있었다. 마침 점심 약효가 딱 가실 무렵이었다. 짜증 나게도.
“선생님?”
“거의 다 했어, 잠시 밖에서 기다려.”
자리에서 일어나기 전, 아낙사가 노트북 화면을 절반쯤 내렸다. 끝까지 닫으면 오히려 부자연스럽게 보일 수 있다는 사실을 의식하고 한 행동이었다. 파이논은 겉보기보다 눈치가 빠른 녀석이라, 그의 앞에선 의심 갈 만한 행동을 삼가는 편이 좋았다.
“또 일하고 계셨죠.”
서재 문틈으로 파이논이 모습을 드러냈다. 다만 진심으로 탓하는 느낌은 아니었다. 그의 시선이 아낙사의 어깨 너머, 노트북 덮개와 자판 사이 빛이 새어 나오는 부분으로 향했다. 내용을 알아볼 수 있을 리 없다는 걸 알면서도, 그의 묘한 시선은 아낙사를 아주 약간이지만 긴장하게 했다. 얼른 다가가면서 아낙사가 목소리를 높였다.
“가자. 조금 배고프네.”
그러자 구름이 걷히는 것처럼 파이논의 얼굴이 환해졌다.
“그럼 서두를까요?” 그가 스스럼 없이 아낙사의 손목을 낚아챘다. “카오스라나가 드디어 카오스한테 요리 돕는 걸 허락해 줬거든요. 그러니까 시간을 너무 오래 끌면 둘이 또 양념 가지고 싸우기 시작할지도 몰라요.”
“둘이서? 그러면 파이논 너는 뭘 했는데?”
“저요? 전 총주방장이죠. 현장 전체를 지휘할 사람도 필요하잖아요. 제가 없으면 저희 보조 셰프들은 그냥 풋내기들이거든요.”
어이없을 정도로 당당한 말이었다. 아낙사는 저도 모르게 옅은 미소를 지었다. 손목을 붙잡았던 파이논의 손이 자연스럽게 아래로 미끄러졌다. 그렇게 손을 맞잡은 채, 두 사람은 그리 멀지도 않은 부엌을 향해 천천히 걸어갔다.
차려진 음식에서 부드럽게 김이 피어올랐다. 카오스라나 특제 수프에서는 은은한 허브 향이 났고, 카오스가 만드는 걸 도왔다는 면 요리는 놀랍게도 멀쩡한 모습이었다. 조금 면이 불긴 했지만, 첫 시도 치고는 놀라운 성과였다.
아낙사의 맞은편에서 카오스는 그와 식사 속도를 맞추고 있었다. 아낙사가 한 입을 뜨면 자기도 한 입. 한 모금 마시면 자기도 한 모금. 모든 동작은 1, 2초 뒤에 거울처럼 반복되었다. 파이논이 없었다면 조용했을 식탁은, 그가 쉴 새 없이 떠들어댄 덕분에 활기찬 분위기를 띠었다. 몹시 신기한 점은 그 와중에도 끊임없이 파이논 앞에 놓인 접시가 꾸준히 비워지고 있다는 사실이었다. 도대체 어느 시점에 음식을 씹고 삼키는 걸까. 문득 호기심이 생긴 아낙사는 은근히 그를 관찰하기 시작했다.
하지만 그 수수께끼는 끝내 풀리지 않았다. 아낙사와 눈이 마주치자, 파이논이 반사적으로 싱긋 웃었다.
“선생님?”
“음?”
“가만히 계세요.”
무슨 뜻인지 묻기도 전에 파이논이 식탁 너머로 몸을 숙였다. 그러고는 아낙사의 뺨에 묻은 소스 자국을 닦아주었다.
자신의 혀로.
“파이논!”
세 사람의 목소리가 동시에 터져 나왔다. 카오스는 하마터면 숟가락을 떨어뜨릴 뻔했고, 카오스라나는 이마를 짚고 있었다. 정작 당사자는 영문을 모르겠다는 얼굴이었다. 파이논은 식탁에 앉은 사람들을 차례로 둘러보며 눈을 깜빡였다.
“왜?”
이제 그는 인간인 채로 아낙사를 핥았다는 사실을 부끄러워하는 기색조차 없었다.
“이게 제일 빠른 방법이잖아.”
“그렇다고 잘했다는 건 아니지.”
카오스라나가 한숨을 쉬었다. 파이논은 잠시 생각에 잠긴 듯 고개를 갸웃했다.
“그래도 맛있었는데.”
“…….”
“아. 오해하지 마세요, 선생님도 맛있었어요.”
그 즉시 아낙사는 사레가 들렸다. 죽을 듯이 기침하는 아낙사의 팔꿈치 밑으로 물 한 컵이 매끄럽게 밀려 들어왔다. 아낙사는 새빨개진 얼굴을 하고 컵을 낚아챘다. 한참 후에야 아낙사는 겨우 기침을 멈추고 숨을 돌릴 수 있었다.
“이 버릇 없는 개들 같으니.”
그가 식탁에 모여 앉은 세 사람을 번갈아 노려봤다.
파이논. 카오스라나. 카오스.
그러나 아무리 버릇이 없어도, 아무리 최악의 응석받이들에다 사고뭉치들이라도, 그들은 아낙사의 지붕 아래 있었다. 그의 개들, 그의 동반자, 그의 책임이었다.
그리고 아낙사는 남은 평생 그들을 돌볼 준비가 되어 있었다.
귀여운 개 세 마리를 임종까지 보호한다는 건, 바로 그런 의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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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재 안쪽에서 노트북은 여전히 흐릿한 빛을 뿜고 있었다. 마우스 커서는 저녁 식사 전 내버려둔 모습 그대로, 화면의 중간 어디쯤에서 조용히 아낙사의 지시를 기다리고 있었다.
화면을 보고 아낙사가 혀를 찼다.
며칠 더 고생할 줄 알았는데, 쉽게 성공해버리고 말았다. 군 산하 연구소의 보안 체계가 일개 대학 교수에게 간단히 뚫릴 정도로 허술할 줄이야. 물론 아낙사고라스를 일개 대학 교수라고 부를 수 있는 사람은 그 자신밖에 없을 테지만 말이었다.
그들이 과거 어느 “시설”에서 지냈다는 카오스라나의 말, 세부 내용은 밝힐 수 없다는 비밀스러운 태도, 그리고 명령에 익숙한 세 사람의 모습까지, 아낙사의 추측을 올바른 방향으로 이끌어줄 재료는 이미 모여있었다. 관련이 있을 만한 연구 자료들을 깔짝거리다 결국 이곳까지 도달했을 때, 그의 입에서는 작게 “유레카!”하는 탄성이 터져나왔다.
등 뒤의 문이 굳게 닫힌 걸 재차 확인한 다음, 아낙사는 커서의 위치에서부터 다시 문서를 읽어 내려갔다.
“실험체 496호… 일명 파이논…….”
—실험체 496호 유닛 01, 일명 ‘파이논’, 원본의 496번째 복제품이자 최초로 감정 안정화에 성공한 전투형 수인 프로토타입. 후속 유닛 02, 03는 그를 기반 템플릿으로 삼았다.
…
초기 성장 과정에서 유닛 간 인위적 가족 각인 실시. 유닛 01~03 간 감정 루프 연결 성공 확인. 개체들은 서로를 형제 관계로 인식 및 호칭하였다.
…
<관리자 로그> #133
대상 유닛 01 생후 7년 2개월. 대상으로부터 거듭된 요구가 있어, 관리 인력이 파이논이라는 이명을 부여했다. 구분을 위해 본 항목부터는 이명으로 지칭한다.
…
<관리자 로그> #261
대상 ‘파이논’ 생후 7년 4개월. 일부 관리 인력에게 과도한 애착을 형성했다. 안정화를 위해 담당자 교체를 승인한다.
…
<관리자 로그> #2,001
대상 ‘파이논’ 생후 11년 1개월. 원본 관련 정보를 전달하는 과정에서 일부 항목(예: 출생지)에 극도로 감정적인 반응을 보였다. 단, 기존에 관련 정보를 학습했다는 이력을 확인할 수 없었다.
반복 테스트 결과, 원본으로부터 비정상적으로 일부 기억 및 정서 정보를 이어받았을 가능성이 제기되었다. 후속 관찰이 필요하다.
…
<관리자 로그> #67,022
관리 부주의로 유닛 01 탈주 사건 발생, 뒤이어 02, 03도 탈주, 현재 수색 중…
…
수색 중…
…
…
원본
코드네임 K, 최초로 발견된 자연 상태의 수인. 496 라인 복제품인 유닛 01, 02, 03의 오리지널이 되는 개체로, 현재 소재는 불명이다.
…
>> 경고: 이 작업은 복구할 수 없습니다. 데이터를 폐기하시겠습니까?
예
짧은 외전이 추가될 예정입니다. 읽어주셔서 감사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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