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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파이낙사] (AU) 1 + 1 + ... 1? 외전

 

 

외전 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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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사샤, 우리 똑똑한 사샤. 100까지 빨리 세는 건 우리 사샤한테는 별로 어려운 일도 아니지?’

  ‘당연하지, 누나. 그걸 말이라고 해?’

  ‘그렇지. 그럼, 이번에는 천천히 세는 연습을 해 볼까? 하루에 하나씩 세 보는 거야. 100까지 다 세고 나면 누나가 만나러 올게. 약속이야…….’

 

  백삼십일.

  볼에 묻은 크레용 자국을 닦아내며 아낙사는 조용히 마음속으로 되뇌었다. 오늘은 누나와 헤어진 지 백 서른한 번째 되는 날이었다.

  위탁 가정을 전전하게 된 이래, 남매가 각자 다른 집으로 찢어지게 된 건 이번이 처음이었다. 지난달에 다섯 살 생일을 맞은 아낙사는, 나이에 어울리지 않는 기민함과 영특함으로 자신들이 처한 상황을 제법 현실적으로 파악하고 있었다.

  이제 우리 집이라고 불리던 장소는 사라졌다는 것.

  누나가 열여덟 번째 생일을 맞을 때까지, 그들은 나라에서 정해 주는 대로 이 가정 저 가정을 돌아다녀야 하는 처지라는 것.

  그 과정에서 남매가 갈라지지 않고 한 집에 배정받을 수 있었던 건, 원래 그런 게 아니라 누나의 피나는 노력에 바탕을 두고 있었다는 것 또한 이번 경험을 통해 알게 되었다.

  마른 수건으로 아낙사는 묵묵히 볼을 닦았다. 이 집 아주머니와 아저씨는 꽤 친절하니까 얼굴에 크레용을 묻힌 것 정도로 뭐라고 할 것 같진 않지만, 칠칠치 못한 아이로 보이는 건 아낙사 쪽에서 사양이었다. 몇 번 더 닦아내자 크레용은 완전히 지워졌다. 다만 너무 박박 문지르는 바람에 여린 피부가 빨갛게 부어오르고 말았다. 얼얼해진 뺨을 토닥거리며 아낙사가 화장실에서 나왔다.

  화장실 문 앞에는 커다란 그림자가 기다리고 있었다.

  “지오리오스.”

  이름이 불리자 강아지가 통통한 꼬리를 움직였다. 지오리오스, 줄여서 ‘지오’. 아낙사도 좋아하는 유명 TV 애니메이션 시리즈에 등장하는 드로마스의 왕 이름이었다. 처음 강아지 이름을 알게 되었을 때 아낙사의 자그만 심장은 흥분으로 콩콩 뛰었다. 위엄 있고 자비 넘치는 왕의 이름은, 이 커다랗고 행동이 느린 강아지에게 제법 잘 어울렸다.

  작은 손이 강아지의 목덜미 털을 살짝 움켜쥐었다. 지오는 순한 갈색 눈을 천천히 끔뻑일 뿐, 아프거나 귀찮아하는 티를 내지 않았다. 나이는 아낙사보다 세 살 많은 여덟 살. 대형견의 일생에서 어느덧 중년이라 부를 수 있는 나이의 지오는, 작은 민트색 친구의 출현을 제법 마음에 들어 했다. 아낙사는 강아지에 대해 잘 알지 못했다. 하지만 지오가 자신을 좋아한다면, 자신도 지오를 좋아할 수 있을 것 같다고 생각했다.

  “이야기 더 읽어 줄까?”

  지오가 “멍”인지 “킁”인지 분간하기 어려운 소리를 냈다. 커다란 강아지와 작은 인간이 찰싹 달라붙어 계단을 내려갔다. 지오는 이 집에서 아낙사의 유일한 또래이자, 하나뿐인 친구였다.

 

  100일이 지나면 만나러 오겠다는 누나의 약속은 지켜지지 못했다. 지켜지지 못했지만, 겨우 42일 어긋났을 뿐이었다.

  아동보호기관 담당자를 어떻게 설득했는지 몰라도, 남매는 곧 둘이 함께 지낼 수 있는 집으로 재배치되었다. 작별하던 날, 아낙사는 지오에게 자신이 갖고 있던 드로마스 인형을 선물했다. 개는 이별을 직감한 듯 원래도 처진 눈가죽이 더 서럽게 팔자를 그리고 있었다.

  시간은 빠르게 흘렀다.

  위탁 가정이 몇 번 바뀌었고, 계절은 여러 번 바뀌었다. 어느덧 아낙사는 아동보호 시스템을 졸업할 나이가 되어 있었다. 서류 몇 장이 증명하는 어른의 증거를 갖고 나자, 아낙사의 얇은 입술에서 조금은 허망한 웃음이 터져 나왔다.

  택배가 도착한 것은 그로부터 얼마 지나지 않아서였다. 집 앞에 놓여 있는 택배를 보고 아낙사는 갸웃하며 송장을 확인해 봤다. 보내는 사람, 주소, 지역번호, 무엇 하나 짐작 가는 데가 없었다. 미심쩍은 눈을 하고 아낙사는 택배 상자를 뜯었다. 한쪽 모서리가 구겨진 상자 안에는 꼼꼼하게 포장된 낡은 드로마스 인형이 들어있었다. 동봉된 편지는 매우 짧았고, 얇고 힘없는 필체로 적혀 있었다.

 

우리 애가 마지막까지 이걸 품고 있었어요. 덕분에 행복했을 거예요.
당신에게도 소중한 물건 같아서 돌려보냅니다. 행복하게 살아요, 아낙사고라스.

 

  한동안 말없이 아낙사는 그 인형을 내려다봤다. 하늘색 인형은 기억 속의 것보다 훨씬 작았다. 들어 올리자 더욱 그랬다. 어린 시절에는 제법 커 보였는데, 어느새 한 손으로도 충분히 쥘 수 있을 만큼 작아져 있었다.

  아낙사는 인형을 가만히 품에 안았다. 몇 년이 지났어도 많은 것들이 선명하게 떠올랐다. 짧고 두꺼운 털의 감촉이라던가, 반들반들한 등, 털을 반대 방향으로 쓸어 올리면 몹시 싫어하면서도 꾹 참던 버릇. 밤에 잠에서 깨면 어느새 침대 밑에 와 있던 것. 책을 읽고 있으면 발등 위에 턱을 올리고 졸던 것.

  아낙사는 낡은 드로마스 인형의 꼬리를 매만졌다. 인형에서는 당연하지만 아무 냄새도 나지 않았다. 흐릿한 섬유유연제 냄새가 코끝을 스쳤을 뿐이었다.

  그날 밤, 꿈속에서 그는 다시 다섯 살로 돌아가 지오와 등을 맞댔다. 일어나 보니 베개가 아주 살짝이지만 젖어 있었다.



  그 소중한 인형이 지금은 완전히 개들 장난감 취급을 받고 있었다.

  폭신하다면서 끌어안고 자는 건 기본이었고, 밤새 물고 있느라 침으로 축축하게 젖어 있는 경우도 드물지 않았다. 주로 범인은 파이논이었다. 그뿐인가. 소파 밑에서 먼지를 잔뜩 뒤집어쓴 채 구조되질 않나, 카오스라나가 팔꿈치 기대는 용도로 사용하질 않나, 얼마 전에는 카오스를 위해 아낙사가 숲길에 냅다 던지는 일까지 있었다.

  그야말로 드로마스 인형의 수난기였다.

  아낙사는 세탁을 마친 인형을 조심스럽게 건조대에 걸었다. 물기를 머금은 하늘색 꼬리가 아래로 축 늘어졌다. 까만 단추 눈은 어딘지 모르게 아낙사를 원망하는 듯 보였다. 시선을 피해 아낙사가 작게 중얼거렸다.

  “미안해, 다신 안 그럴게.”

 

 

 






외전 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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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요즈음 남동생인 사샤가 뭔가 수상했다.

  디오티마가 이런 결론에 도달한 것은, 다른 모든 가능성을 하나둘씩 배제하고 난 뒤였다.

  지난 몇 달간 남동생에게 전화를 걸 때마다, 어딘가에서 생활 소음 같은 것들이 들려오곤 했다. 처음에는 너무 평범해서 디오티마도 대수롭지 않게 여겼다. 멀리서 들리는 발소리, 배경에서 문이 닫히는 소리, 샤워 물소리 등등. 사샤네 건물 벽이 조금 얇은 편인 걸 떠올려 보면, 여태 이런 소리가 들려오지 않았던 게 더 신기한 일이었다. 최근 조심성이 모자란 이웃이 이사 왔나 보다. 이것 참, 사샤도 힘들겠네. 괜찮은 귀마개를 발견하면 하나 보내줘야지.

  그러다 점차 그런 말로는 설명할 수 없는 일들이 벌어지기 시작했다.

  ‘선생님, 통화 언제 끝나요?’

  그건 젊은 청년의 목소리였다.

  아주 낮지도, 그렇다고 높지도 않은 목소리. ‘선생님’이라고 다정하게 발음하는 어조에는 뭐라 콕 집어 설명하기 어려운 애교 섞인 매력이 있었다. 그리고 무엇보다 가장 중요한 특징은, 그 목소리가 통화 중인 아낙사의 바로 옆에 딱 붙어있기라도 한 것처럼 지나치게 가까운 곳에서 들려왔다는 사실이었다.

  스피커폰 너머는 즉시 침묵에 휩싸였다.

  “사샤? 방금 뭐였니?”

  “…TV 소리야. 아, 냄비에서 타는 냄새가 나네. 이만 끊을게, 누나. 안녕.”

  라인이 끊겼다. 디오티마는 휴대폰을 빤히 바라봤다.

  하지만 사샤. 너희 집엔 TV가 없잖니. 게다가 네가 언제부터 직접 요리를 해 먹었다고? 드디어 건강한 식생활에 관심을 두게 된 거라면 정말 잘된 일이야. 누나도 기쁘게 생각해. 그렇긴 한데, 지금 그쪽은 새벽 1시 아니니?

  뭔가 수상했다. 지나치게 수상했다.

  그날 이후 디오티마는 남동생 주변에서 들려오는 소리에 한층 더 주의를 기울이기 시작했다. 마음을 먹고 나니 뒤늦은 깨달음이 찾아왔다. 그간의 소음의 주범이 갑자기 나타난 새 이웃이 아니라, 사샤의 집안에서 들려오는 거라고 가정하면 훨씬 더 매끄러운 설명이 가능했다. 노력 끝에 디오티마는 엇비슷하게 들리는 그 목소리들이 대략 세 종류로 구분된다는 걸 알게 되었다. 첫 번째, 밝고 다정한 목소리. 사샤를 ‘선생님’이라고 불렀던 그 목소리였다. 두 번째 목소리는 그보다 더 깊고 침착했다. 마지막 목소리는 거의 말을 하지 않아서, 가끔가다 들려오는 속삭임이 아니었다면 하마터면 깜빡 놓치고 넘어갈 뻔했다.

  그렇다는 건…….

  결론은 하나였다.

  디오티마의 소중한 어린 남동생이, 서로 다른 세 명의 남자와 한 지붕 아래에서 살고 있다는 것.

  그들이 사샤와 단순히 집을 공유할 뿐인 사이든 (동생의 성격을 잘 알기에 그럴 가능성이 매우 낮다는 데 신용 포인트를 걸 수도 있었다), 아니면 남동생이 마침내 자신을 억누르는 걸 그만두고 잃어버린 시간을 보상받기 위해 한 번에 세 남자와 같이 살기로 결심한 것이든, 디오티마에게는 별 차이가 없었다. 어느 쪽이든 그녀는 언제나 사샤 편이었다.

  하지만.

  ‘아무리 그래도 이런 일은 누나에게 미리 알려줬어야 하는 거 아니야?’

  지속 시간 약 30초의 짧은 고민 끝에, 디오티마는 자기 동생이 세 남자와 비밀리에 동거하고 있다는 사실을 알게 된 혈육이라면 누구나 할 법한 행동을 취했다.

  바로 예약할 수 있는 가장 빠른 비행기표를 끊는 것이었다.

 

 

  “누나?”

  “오랜만이야, 사샤.”

  “여기까지 어떻게……?”

  “비행기 타고 왔지, 그게 무슨 바보 같은 질문이니?”

  디오티마는 미소 지으며 여행 가방을 건넸다. 아낙사는 자동으로 가방을 받아 내려놓더니, 누나가 자신을 끌어당겨 꽉 안아줄 수 있도록 자세를 낮췄다. 누나는 수년째 같은 향수를 썼다. 익숙한 향이 부드럽게 그를 감쌌다. 아낙사는 어린애처럼 볼을 부풀리고 중얼거렸다.

  “미리 말해줬으면 공항까지 마중 나갔을 텐데.”

  “그럼 널 놀라게 할 수가 없잖아.”

  반박하고 싶어 하는 눈치였지만, 그래도 아낙사는 별말 없이 누나의 가방을 안쪽으로 옮겼다. 디오티마는 동생 뒤를 따라 벌써 집안을 둘러보는 중이었다.

  가장 먼저 눈에 들어온 것은, 물론 가까이에 있는 신발장이었다. 아낙사는 늘 꼭 필요한 것보다 세 배쯤 많은 신발을 짊어지고 다녔다. 그러니까 그 부분은 딱히 이상할 것도 없었다. 그러나 신발장을 꽉 채운 신발 중에는 척 보기에도 아낙사 물건이 아닌 것들이 섞여 있었다. 우선 사이즈가 사샤에게 맞지 않았다. 스타일도 전혀 다른 느낌이었다. 동생이 뒤늦은 패션 반항기를 겪는 게 아니라면 말이었다.

  ‘와, 물에 띄웠을 때 보트로도 쓸 수도 있겠네. 이 정도 발 사이즈면 키도 엄청 크겠는걸.’

  그러다 그녀의 시선이 신발장 위에 걸려 있는 다른 물건에 닿았다. 각기 다른 색의 목줄이었다. 귀여운 인식표도 달랑달랑 매달려 있었다. 사샤가 혹시 개를 키우기 시작했나? 깜짝 놀랄 만한 일이었지만, 동시에 진짜라면 반가운 소식이었다.

  새삼스러운 눈으로 동생을 바라보던 디오티마는 순간 멈칫했다. 아낙사는 전보다 훨씬… 나아 보였다. 그렇게밖에 표현할 길이 없었다. 뼈마디가 보이도록 마른 건 여전하지만, 그래도 더 이상 카페인과 학문적 열의로만 연명하는 것처럼 보이지 않았다. 영원히 사라지지 않을 것 같았던 눈 밑의 검은 부분이 못 보던 사이에 없어진 상태였다. 뺨에는 생기가 있었고 푸석하던 머리에 조금씩 윤기가 돌았다. 수분 부족으로 늘 말라 있던 입술은 몰라보게 물기가 찬 모습이었다. 안심하고 가슴을 쓸어내리면서, 디오티마는 자신이 발견한 부분들을 굳이 언급하지 않기로 했다. 외모, 특히 몸무게가 어떻다는 언급은 남동생을 괜히 신경 쓰이게 할 뿐이라는 걸 잘 알고 있었다.

  대신 디오티마는 가볍고 안전한 화제, 즉 출근 일정에 관한 이야기를 꺼냈다. 아낙사는 눈을 피하더니 지금은 방학 중이라 학교에 가지 않는다고 짧게 설명했다. 동생의 시선은 장식장 위에 올려진 화초에 고정된 채였다. 마치 그 식물이 거기 있는 걸 처음 발견하기라도 한 것처럼 말이었다. 그러는 동안 그의 손은 자꾸만 파자마 아래 받쳐 입은 티셔츠 목둘레를 만지작거렸다. 디오티마는 곧 그 이유를 어렵지 않게 알아차렸다. 목선 아래로 선명한 붉은 자국이 보였다. 하나도 아니고, 여러 개.

  아.

  아하.

  응, 아침부터 열정이 넘치는구나.

  디오티마는 아무것도 못 본 척했다. 사샤는 다 큰 어른이 된 지금도 영화에서 키스 장면이 나오면 괜히 팝콘 통에 얼굴을 묻는 아이였다. 연장자로서 그녀가 해 줄 수 있는 일은 적당히 눈을 감아 주는 것뿐이었다.

  그녀는 자연스럽게 집 안쪽으로 시선을 돌렸다. 동생의 집에는 몇 번이나 신세를 졌던 터라, 눈 감고도 돌아다닐 수 있었다. ‘재실 중’ 팻말이 걸린 작업실 문을 가리키며 그녀가 말했다.

  “이번에도 작업실 쓰면 되지?”

  아낙사가 드물게 말을 더듬었다.

  “잠깐만, 누나. 지금 작업실이 좀 어질러져 있어서, 웬만하면—”

  디오티마는 그사이에 벌써 문고리를 잡고 있었다.

  “—안 들어가는 게 좋을 텐데…….” 

  문이 열렸다.

  디오티마의 눈이 커다래졌다.

  작업실 안에는 처음 보는 백발 청년이 있었다. 갑자기 문이 열려서 깜짝 놀랐는지, 잘생긴 얼굴에 당황한 기색이 가득했다. 청년의 한쪽 팔은 티셔츠 소매에 들어간 채로, 다른 쪽 팔은 옷 속에서 어색하게 엉켜 있었다. 옷을 갈아입는 도중인 모양이었다. 수십 초가 흐르는 동안 아무도 감히 움직이지 못했다.

  그때 청년 뒤쪽에서 머리 하나가 더 나타났다. 몇 초의 시간차를 두고 또 하나 더.

  역시 세 명이 맞았어!

  디오티마가 만족스럽게 손뼉을 쳤다. 제 추측이 맞아떨어지는 건 언제 어느 상황에서라도 기분 좋은 일이었다. 그 기분은 아주 잠깐만 지속되었다. 마침내 상상 속에서만 존재하던 세 남자를 실제로 목격하게 되자, 새로운 의문이 떠올랐기 때문이었다.

  왜 다들 똑같이 생긴 거지?

  하나부터 열까지 완벽히 똑같지는 않았다. 머리색이나 스타일이 달랐고, 눈빛이 달랐다. 심지어는 몸을 가누는 느낌마저 조금씩 차이가 있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세쌍둥이임을 의심하는 편이 더 이상할 만큼 그들은 똑 닮아 있었다.

  게다가 모두 눈에 띄게 잘생기기까지.

  디오티마는 천천히 남동생 쪽으로 고개를 돌렸다.

  “사샤,” 하고 디오티마가 속삭였다. “혹시 너무 네 취향이라서 셋 다 데려온 거니?”

  그 말에 아낙사는 눈을 꼭 감아버렸다. 지금은 무슨 말을 해도 누나의 착각을 수습할 수 있을 것 같지가 않았다.

 

  다소 혼란스러운 자기소개가 한 차례 지나간 후, 그들은 다 같이 거실로 자리를 옮겼다. 디오티마는 소파에 나란히 앉은 세 청년을 바라봤다. 그러고는 백발 청년에게 맨 먼저 말을 걸었다.

  “제대로 이해했는지 확인해 볼게. 네가 파이논이지?”

  “네!”

  파이논의 표정이 즉시 밝아졌다. 그는 열정적으로 한 손을 척 들더니 앞으로 쭈욱 뻗었다. 뭔가를 기대하는 눈치였다. 디오티마는 그게 정확히 뭔지 알 수 없었다. 아마도 악수가 아닐까 싶어 그녀가 내민 손을 맞잡았다. 굉장히 따뜻한 손이었다. 악수라면 손을 흔드는 게 보통일 텐데, 파이논은 가만히 손을 붙잡고만 있었다. 그가 반갑게 입을 열었다.

  “디오티마 누님.”

  거실 벽에 기대 서 있던 아낙사가 천천히 얼굴을 들었다. 그가 파이논에게 보내는 시선은 살기등등하다는 말로밖에는 표현할 수 없었다. 하지만 파이논은 아랑곳하지 않고 활짝 웃을 뿐이었다.

  “선생님께 얘기 많이 들었습니다. 이렇게 뵙게 돼서 정말 기뻐요.”

  살기 어린 시선이 더욱 강해졌다. 디오티마는 나중에 꼭 파이논과 따로 이야기를 나눠봐야겠다고 마음속으로 메모를 남겼다. 그녀는 다음 차례인 금발 청년을 가리켰다.

  “카오스라나?”

  카오스라나가 고개를 끄덕였다. 이제 보니 손님용 차를 내온 사람도 그였다. 그는 이 중에서 디오티마의 깜짝방문에 그렇게까지 놀라지 않은 유일한 인물이기도 했다. 하얀 머리 형제와 달리 금발 청년은 제대로 된 악수를 청했다. 맞잡은 손이 너무 뜨거워 디오티마는 깜짝 놀라고 말았다. 이것이 젊은 남자애들의 신진대사라는 걸까.

  마지막으로 디오티마는 쌍둥이 중 남은 한 명에게 눈길을 돌렸다.

  “그럼, 네가 카오스구나.”

  카오스가 꾸벅 목례했다. 그는 얼굴이 가려질 만큼 후드를 깊게 눌러쓰고 있었다. 아마도 옷을 갈아입는 모습을 들킨 게 마음에 남은 모양이었다. 혹은 몹시 낯을 가리는 성격이거나. 한 명씩 이름과 얼굴을 외우려고 노력하면서, 디오티마가 입을 열었다.

  “파이논, 카오스라나, 카오스. 너희가 사샤의 룸메이트라는 거지. 우리 사샤를 잘 부탁해.”

  “사샤요?”

  “아, 내 말은, 아낙사 말이야.”

  “너희는 아낙사고라스라고 불러.” 아낙사가 기다렸다는 듯이 말꼬리를 잡았다. 동생의 말버릇을 아는 디오티마는 못 말린다는 듯 고개를 저을 뿐이었다.

  “저희도 사샤라고 부르면 안 돼요?”

  “아낙사고라스야.”

  “그럼… 사샤 선생님.”

  “아낙사고라스라니까.”

  “선생님 너무해.”

  “흥. 상황이 반대라고 생각해 봐. 내가 너를 파이라고 부르면… 아니, 이건 적절하지 않겠군. 카오스라나, 내가 널 라나라고 부르거나, 우리 강아지라고 부르면 기분이 어떨 것 같아?”

  “좋을 것 같은데요.”

  “…….”

  “…저도 강아지라고 불러 주세요.”

  “이것 보세요, 선생님. 카오스까지 좋다고 하잖아요. 그러니까 선생님 논리대로라면 저희도 사샤 선생님이라고 부를 수 있어야 한다고요.”

  디오티마는 대화가 오가는 동안 조용히 네 아이들을 지켜보고 있었다. 흥미롭다. 정말 흥미로웠다. 점점 더 이들의 관계를 어떻게 분류해야 할지 어려워지고 있었다. 분명한 건 세 청년이 평범한 룸메이트처럼 행동하지 않는다는 것이었다. 평범한 룸메이트라면 사샤가 입을 열 때마다 이토록 주의를 기울일 리 없었다. 그저 남의 말을 잘 듣는 정도가 아니었다. 마치 사샤가 그들의 우주의 중심이고, 세 청년은 그 주위를 도는 행성들 같았다. 동생이 조금이라도 움직이면 세 명의 고개가 동시에 돌아갔다. 동생의 입술이 그들의 이름을 부르면 그때마다 새롭게 존재를 인정받은 것처럼 기뻐했다. 이런 관계를 과연 어떻게 정의해야 할지 아직은 감이 잡히지 않았지만, 적어도 룸메이트라고 부를 수 없다는 것쯤은 디오티마도 알고 있었다.

  그나저나, 룸메이트 하니 말인데.

  “너희들 근데 평소에 잠은 어디서 자니?”

  세 청년을 향해 디오티마가 질문을 던졌다. 그녀가 알기로 아낙사의 집은 우선 문을 열고 들어오면 현관 옆에 작은 작업실, 공용 공간인 거실과 부엌을 지나 안쪽으로 꺾어 들어가면 서재와 아낙사의 침실, 마지막으로 작은 옷방으로 구성돼 있었다. 서재 가구를 통째로 비우지 않는 한, 건장한 청년 셋을 재울 만한 공간을 마련할 수 있을 것 같지 않았다.

  대답하기 어려운 질문이었는지, 묘한 침묵이 뒤따랐다.

  “그게,” 파이논이 먼저 말을 뗐다.

  “침대 위에서요.” 카오스가 말했다. 최대한 상냥하게 들리도록 노력하는 말투였다.

  “보통은 아낙사 선생님의 방이죠.” 카오스라나가 어떻게든 수습해 보려는 듯 덧붙였다. 이후에 이어진 침묵은 첫 번째 것보다도 훨씬 길었다.

  “너희 셋이 같이?”

  “네.”

  “그건…… 아무래도 아주 편하지는 않겠는걸. 다 같이 한 침대에서 자려면.”

  “혹시 아낙사 선생님이 불편하실까 봐 걱정하시는 건가요? 그러지 않으셔도 돼요. 사실 선생님은 너무 작아서 자리도 거의 차지하지 않거든요. 냄새도 좋아서 자는 동안 안고 있기 편하—”

  카오스라나가 그의 발을 밟았다. 아낙사는 두통이 느껴지는지 저만치 떨어진 곳에서 눈썹뼈 사이를 꾹꾹 누르고 있었다.

  디오티마는 막간을 이용해 차를 한 모금 마셨다. 조금 식긴 했지만 아주 훌륭한 맛이었다. 우리 사샤가 이런 차를 우려냈을 리는 없으니까, 세 청년들의 솜씨인 걸까 하고 잠시 생각했다.

  응, 아주 성실한 아이들 같네. 손님 대접할 줄도 알고.

  디오티마는 찻잔을 내려놓았다. 그렇게 세게 내려놓지도 않았는데, 세 청년이 꼭 귀를 쫑긋 세운 대형견들처럼 움찔하면서 나란히 그녀를 바라보았다. 그 일사불란한 반응이 조금 재미있어서 그녀는 괜히 잠시 말을 아꼈다. 

  “그러고 보니 다들 배고프지 않니? 우리 점심 시켜먹을까?”

  “저희가 만들게요.”

  형제들이 동시에 말했다. 디오티마는 눈을 깜빡였다. 그러다 그녀의 얼굴에 서서히 미소가 번졌다. 어쩐지 동생 얼굴이 전보다 나아 보이더라니. 그간 이 아이들이 우리 사샤를 든든하게 먹여 살리고 있었던 모양이었다.

  세 청년은 즉시 자리에서 일어났다. 무엇을 만들지에 관한 토론은 부엌으로 향하는 도중부터 시작되었다.

  “누님이 오셨으니까 좀 특별한 걸 해야 하지 않아? 제철 과일 샐러드는 어때?”

  “아니, 지금 냉장고에 있는 재료로는 어려워.”

  “내가 바로 사 올게.”

  “잠깐 기다려, 카오스. 그 전에 메뉴부터 정해야지.”

  목소리는 점점 멀어졌고, 얼마 지나지 않아 부엌 쪽에서 작은 실랑이가 이어졌다. 디오티마는 그 모습을 흐뭇하게 바라보고 있었다.

  “너무 놀리지 마. 순진한 애들이니까.”

  어느새 다가온 아낙사가 낮은 목소리로 입을 열었다. 그가 소파에 앉으며 바닥에 아무렇게나 굴러다니던 드로마스 인형을 집어 팔걸이 위로 치워놓았다. 디오티마에게도 물론 추억의 물건이었다.

  “사샤.”

  “왜?”

  “너도 나한테는 애야.”

  “……알아.”

  “아아, 우리 사샤가 벌써 저렇게 다 큰 자식을 보다니, 그것도 세 명이나. 하루아침에 조카가 셋이나 생길 줄은 몰랐는걸.”

  “그만 놀려, 누나.”

  “그래서 셋 중에는 누가 제일 취향이니?” 

  “누나!”

  “귀엽기로는 파이논이 제일 귀여운 거 같은데. 카오스도 의외로 지켜주고 싶은 귀여움 계열이고. 카오스라나는 애가 참 침착하고 야무지더라. 게다가 그 목소리가…….”

  “아, 제발.”

  “으응? 사샤 얼굴이 엄청 빨개졌는데?”

  디오티마가 부엌에서 들려오는 달그락거리는 칼질 소리를 배경음 삼아 맑게 웃었다. 낮은 반벽 너머로 세 청년의 모습이 드문드문 보였다. 파이논과 카오스는 냉장고 문을 열어놓은 채 무언가를 열심히 찾고 있었고, 카오스라나는 도마 위에서 채소를 정리하며 두 사람에게 뭐라고 지시하고 있었다.

  “잘됐네, 사샤. 외롭지는 않겠어.”

  “원래도 외롭지 않았어.”

  “그래, 그래.”

  디오티마는 고개를 끄덕였다.

  이번만큼은 정말 믿어 주기로 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