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문 바로가기

hsr/hsr

[파이낙사] 수확의 달(8월)






  공기 중에 감도는 들뜬 분위기가 올해도 나무 정원에 수확의 달이 돌아왔음을 알리고 있었다.

  세르세스로 대표되는 수확의 달은 만물이 무르익고 경작이 시작되는 때였다. 식물 구역을 담당하는 로토파고이 학파의 일사불란한 움직임은 지금 이때 이 계절이 아니면 볼 수 없는 제철 풍경이라 할 수 있었다. 여러 학파의 학생들은 곧 있을 축제를 기대하며 게시판 근처를 기웃거린다. 각종 기념 학술대회와 강연 포스터, 크고 작은 행사 안내물이 경쟁하듯 나붙어, 어쩐지 기묘한 화폭 같은 모습이었다.
  이런 분위기에서 학생들을 수업에 집중시키기란 배고픈 드로마스의 꼬리를 붙잡아 황토 더미에서 떼어놓기만큼이나 어려운 일이었다. 그렇지 않아도 흥분된 분위기는 올해 축제 만찬 초청자 명단이 곧 공개될 거라는 소문이 돌면서 더욱 걷잡을 수 없어졌다. 
  “사람들이 그러는데, 최연소로 그 만찬에 초대받은 사람이 아낙사 선생님이라면서요. 그때 얘기 좀 해주세요!”
  “만찬에 나오는 「지혜의 잎」을 먹으면 똑똑해진다는 게 사실인가요?”
  “무슨 맛인지 알려주시면 안 돼요?”
  열렬한 질문 공세에도 강단에 선 아낙사고라스의 태도는 한결같았다: 첫째, 날 아낙사라고 부르지 마. 둘째, 지혜라는 이름이 붙은 음식을 먹는다고 똑똑해질 수 있다면 차라리 우리가 딛고 있는 이 거대하기만 한 나무의 껍질을 벗겨 먹지 그래. 셋째, 그거 쓰고 맛없어. 이걸로 자유 질의 시간을 마치지.

  어찌저찌 수업을 마무리하고 첨삭을 마친 연구 계획서를 조교에게 전달하자, 선생으로서 아낙사의 오늘 일과가 끝났다. 이행시 4각쯤 되었을까. 어서 문을 걸어 잠그고 실험에 몰두하고 싶었다. 아무와도 마주치지 않도록 아낙사는 일부러 멀리 돌아가는 길을 골랐다. 사색을 위한 산책로지만, 요즘 같은 때에는 보나 마나 텅 비어 있을 것이다.
  그리고 실제로 비어 있었다. 아낙사가 유일하게 마주친 사람은 길의 끝자락에서 홀로 서성거리고 있던 백발 제자였다.
  “파이논?”
  이름을 부르자 그가 이쪽을 본다. 미소가 따라오는 속도가 평소보다 느렸다.
  “안녕하세요, 아낙사 선생님. 오늘 수업에서 뵙고 또 뵙네요.”
  “그래.”
  “여기 고요하고 참 좋아요. 귀를 기울이면 나뭇잎이 속삭이는 소리가 들리는 것 같다니까요. 선생님도 산책 나오셨어요?”
  대답 대신 아낙사는 한쪽 눈으로 파이논을 곁눈질했다. 지금도 나뭇가지가 흔들리는 소리를 듣고 있는 걸까, 옆모습만으로는 파이논이 무슨 생각을 하는지 파악하기 어려웠다.
  “파이논?”
  “네?”
  “하고 싶은 말이 있어?”
  파이논이 고개를 홱 돌렸다. 커진 눈으로 아낙사를 내려다보더니 이윽고 멋쩍게 웃기 시작한다.
  “역시 아낙사 선생님께는 숨길 수가 없네요.”
  그보다는 티가 너무 났다고 해야겠지, 아낙사가 속으로 생각했다. 입 밖으로 내뱉지 않은 건 파이논의 웃음이 무표정보다 비참해 보인 탓이다. 가만히 있어도 기분이 무르익는 계절이었다. 고독을 어지간히도 사랑하는 게 아니라면, 짙은 나무 그림자에 몸을 숨기고 어슬렁거릴만한 사람은 남들과 어울리지 못하는 괴팍한 학자이거나 가슴속에 고민을 담은 청년, 이렇게 두 부류이리라.
  “여기서 고향 생각을 하는 중이었어요. 이제 수확의 달이잖아요. 나뭇잎 소리가 밀밭을 스치는 바람 소리와 비슷할까 해서… 그런데 전혀 비슷하지 않네요.”
  “엘리사이 에데스의 밀밭?”
  “네. 밀이 자라나는 무렵엔 다 같이 손을 잡고 맥랑의 노래를 불렀죠. 이제는 가사를 많이 잊어버려서 민망하니까, 불러 달라고 하지는 말아 주세요.”
  그럴 생각도 없었지만, 이렇게까지 말하니 오히려 궁금해진다. 문득 아낙사는 파이논이 노래 부르는 목소리를 한 번도 들어본 적 없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조금 호기심이 생긴다.
  “어렸을 땐 못 참고 제단에서 파이를 훔치려다가 혼난 적도 있었죠. 조금만 기다리면 나눠 먹을 수 있었는데도요. 그렇게 웃지 마세요, 햇밀가루로 만든 파이는 정말 맛있단 말이에요. 이건 아무리 선생님이라도 한 번 드셔 보시면 그럴만했다고 인정하실걸요. 부엌만 빌려주시면 만들어 드릴게요. 그런데…….”
  그런데, 하면서 파이논의 말끝이 흐려졌다.
  “기회가 있을 때 제대로 배워 놓을 걸 그랬나 봐요, 하하. 제가 레시피를 틀려도 고쳐 줄 사람이 없어서 곤란하네요.”
  “…….”
  “이야기 들어주셔서 감사합니다, 선생님. 바쁘실 테니 시간을 너무 뺏지는 않을게요.”
  그건 혼자 있게 해달라는 완곡한 부탁이었다. 이럴 때조차도 파이논은 공손했고 다정했다. 아낙사가 거절당하지 않도록 먼저 선을 그었다. 그 능숙한 배려가 아낙사로서는 마음에 들지 않았다.
  제자답게 스승에게 기대어 주었으면 한다. 완벽하지 않은 빵을 만들고, 이 계절에 부르던 고향 노래를 들려주길 바랐다. 가사를 잊어버린 부분이 있다면 콧노래로 얼버무리며 마주 보고 웃으면 그만이었다.
  모두가 그를 완벽하다고 칭송하지만, 학생이 선생 앞에서까지 완벽해야 할 이유는 없었다.

  돌아온 아낙사를 기다리고 있는 건 쌓여 있는 서류들이었다. 어쩐지 피곤해져서 아낙사는 어깨를 늘어뜨렸다. 실험 인가 요청서, 연구 계획서, 논문 제안서… 연구와 실험 승인을 관리하는 누스페르마타 학파 현인으로서 어쩔 수 없이 발생하는 일상적인 잡무였다. 아낙사는 빠르게 제목만 훑기 시작했다. 그러다가 멈칫하더니, 그의 눈동자는 어느 한 페이지를 주목했다.
  <종자 다양성 확보를 위한 잃어버린 밀 품종 복원 프로젝트 승인 요청서.>
  눈은 문서에 고정한 채, 아낙사는 한 손으로 의자를 더듬더듬 찾아 앉았다. 프로젝트 개요는 이렇게 이어지고 있었다.
  ‘로토파고이 학파의 본 프로젝트는 <검은 물결>로 인해 엠포리어스 전역에서 유실된 각 지역의 토착 밀 품종 복원을 목적으로 한다. 보존되어 있던 표본과 문헌 자료를 토대로 복원 및 재배 가능성을 실험하고자 하며, 표본이 기 확보된 지역은 다음과 같다…….’
  엘리사이 에데스. 나열된 지명 사이에서 그 작은 마을의 이름을 발견했을 때, 아낙사는 저도 모르게 참았던 숨을 훅 뱉었다. 빠르게 서명하면서 그는 한쪽 여백에 짧은 주석을 덧붙였다. 엘리사이 에데스의 밀을 받아 봤으면 한다고.

 

  그러고 나서 한 달이 거의 다 되어가도록 로토파고이 학파로부터 아무런 소식이 없었다. 그들에게는 바쁜 시기이니 그럴 만도 했다. 그게 아니면 저 누스페르마타 현인의 요청 따위, 또 어떤 신성 모독 행위로 이어질지 모른다며 무시당했을지도 모른다.
  흥, 그러면 직접 찾아가서 사정을 설명하면 그만이지. 그렇게 생각할 무렵 놀랍게도 밀싹을 담은 모종 화분이 아낙사 앞으로 배달되었다. 누군가가 수기로 적은 정성스러운 재배 지침서까지 동봉되어 있어서, 시간이 지체된 이유를 짐작하게 했다.
  그렇다면 다음 단계. 파이논에게 어떻게 전달하지?
  답은 간단했다. 파이논은 누스페르마타 학생이고, 그들은 언제나 교실에서 얼굴을 마주 볼 사이였다.
  “파이논, 오늘 수업 끝나고 잠시 남아.”
  “네? 알겠습니다. 그렇게 할게요.”
  작은 목소리로 오간 대화였지만, 아무리 속삭인다 한들 사방이 트인 교실에서 그들만의 비밀로 삼을 수는 없는 법이었다. 본의 아니게 엿듣게 된 옆자리 학생들은, 마찬가지로 본의 아니게 머릿속으로 상상의 나래를 펼치고 말았다. 주로 민트색 고양이가 자신보다 몸집이 큰 흰 개를 할퀴는 장면에 가까웠다.

  물론 현실에서는 학생들의 상상과 전혀 다른 일이 벌어지고 있었다.
  “받아, 파이논. 네 고향에서 자라던 밀이다.”
  “…….”
  “안 받아?”
  파이논의 반응이 예상과 달랐다. 그는 화분에는 눈길도 주지 않고 아낙사의 얼굴만 뚫어져라 바라보고 있었다. 너무 앞서나갔음을 깨닫고 아낙사는 복원된 밀싹을 손에 넣기까지의 과정을 풀어 말하기 시작했다. 길지 않은 설명이 이어지는 동안 파이논은 한마디도 거들지 않았다.
  “—아무튼 감사 인사를 하고 싶다면 그쪽 학파 사람들을 찾아가 봐. 난 중간 전달책 역할을 했을 뿐이니까. 성장 기록을 남긴다면 좋아할지도 모르겠네.”
  한참을 침묵하던 파이논이 입을 열고 처음으로 한 말은 이것이었다. 정말 이걸 제가 가져도 될까요? 
  아낙사는 잠시 뜸을 들이다 가볍게 어깨를 으쓱한다.
  “안 될 것도 없지.”
  “실수라도 해서 말려 죽인다면, 제가 절 용서할 수 없을 것 같아서요.”
  “그럼 도와줄 사람을 찾아보면 돼. 왜, 이제 와서 포기하고 싶어졌어? 난 네가 나한테 파이를 구워주기로 한 줄 알았는데. 그때 그건 그냥 해본 소리였나?”
  “선생님.”
  성큼 다가온 파이논이 허락을 구하지 않고 아낙사를 와락 끌어안았다. 품에 안긴 채로는 파이논의 얼굴이 보이지 않지만, 분명 웃고 있을 것이다. 아낙사는 그렇게 확신했다.
  “감사 인사는 필요 없다고 하셨지만, 역시 전하고 싶어요. 감사합니다.”
  떨리는 목소리가 귓가를 간지럽힌다. 아낙사는 밀려나지 않는 따뜻한 몸을 밀어내려고 애쓰는 대신, 제자의 등을 조용히 다독였다.  
  역시 학생은 완벽할 필요가 없다. 그러라고 스승이 있는 거니까.


 

 

인게임 참고 문헌

수기로 작성한 재배 지침서
오래된 운송장
일곱 현인의 의정서
축제 요리 가이드(2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