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원을 들어주는 연못
In Time of Gold
0.
지금도 눈을 감으면 아낙사는 그날의 가족 여행을 떠올릴 수 있었다.
갈때는 자동차로 세 시간, 돌아올 때는 그보다 한참 더 걸렸다. 잠결에 흘끗 본 표지판에서는 분명 여기가 옛 신전 터라고 했는데, 차에서 내려 보니 실상은 웃자란 잡초와 돌더미, 그리고 부서진 기둥이 간헐적으로 남아 있는 허허벌판일 뿐이었다. 아낙사 어린이는 솔직히 실망하고 말았다. 거대하기만 한 공터는 <엠포리어스 신화집> 속 웅장한 삽화와는 달라도 너무 달랐다.
그런 동생의 어깨를 누나가 톡톡 두드렸다. 저기로 가면 소원을 비는 연못이 있대. 한 사람 당 하나씩이래. 다정한 목소리와 그보다 더 다정한 손길에 이끌려 아낙사는 연못 앞에 섰다. 누나는 두 손을 꼭 모으고 눈까지 감아 가며 열심히 소원을 빌었다. 아낙사도 얼른 손을 모았지만 그건 누나를 따라 한 행동이었을 뿐, 간절히 바라는 무언가가 있어서는 아니었다. 얼른 뭐라도 떠올려야 한다는 생각에 어린 아낙사는 초조해졌다. 나중에 누나가 무슨 소원을 빌었는지 물어봤을 때 거짓말하고 싶지는 않았다. 딱 하나. 딱 하나만 소원을 빌어야 한다면.
나는 이 연못이 어떻게 소원을 들어줄 수 있는지 알고 싶어.
그렇게 바란 순간, 어디선가 날아온 나뭇잎 한 장이 연못 위로 떨어졌다.
이다음에 겪은 일들은 그리 선명하지 않다. 뒤죽박죽 섞여버린 기억의 스냅숏 속에서 아낙사는 어느샌가 누나 손을 놓치고 미아가 되어 있었다. 입술을 꽉 깨물고 부모님과 누나를 찾다 돌부리에 걸려 넘어질 뻔했다. 지나가던 어른이 때마침 붙잡아주지 않았다면 흙바닥에 그대로 엎어졌을 것이다. 친절한 낯선 사람은 무릎을 꿇고 아낙사의 눈물 젖은 얼굴을 찬찬히 쓰다듬었다. 그리고 말했다.
오랜만에 재미있는 소원을 들어서 내려와 봤는데, 이렇게 어린 아이었다니. 미안할 정도인걸.
아직 나이가 차지 않은 사람의 아이야, 네가 바라던 비밀을 알려줄 수는 있지만 그러려면 너도 대가를 치러야 해.
네가 나중에 어른이 되면, 등가교환의 의미를 진정으로 이해하게 되면…
그때 만나러 가마.
신전의 월계수나무가 일제히 흔들리며 파도 소리를 냈다. 그리고 여기가 아낙사의 기억이 끝나는 지점이었다.
기억이 아닌 지식으로 알게 된 바에 따르면, 아낙사의 부모님은 이날 사고로 세상을 떠났다. 넷이 떠났던 가족 여행에서 돌아온 사람은 누나와 아낙사 두 사람뿐이었다. 집으로 돌아오는 길은 떠났을 때보다 훨씬, 훨씬 긴 여정이었다.
누나는 아낙사 앞에서 절대 그날 이야기를 꺼내지 않았다. 과거를 끄집어내는 게 누나를 괴롭히는 일이라면 아낙사 또한 그러고 싶지 않았다.
등가교환, 대가, 비밀. 이 알 수 없는 단어들이 아낙사의 인생에 다시금 등장하게 될 때까지는 조금 시간이 걸렸다. 참으로 아름다운 유예기간이었다고, 지금의 아낙사는 확신을 갖고 말할 수 있었다.
1.
어느 날 아침 식사 자리에서 누나는 담담히 선언했다.
“하숙을 놓을까 해.”
아낙사는 앞접시에서 탈출하려는 방울토마토와의 싸움을 멈추고, 아무렇지 않게 샐러드를 덜고 있는 누나의 얼굴을 본다. 어찌나 일상적인 말투였던지 아낙사는 순간 누나가 화단에 심을 꽃이나 오늘 저녁 메뉴를 상의하는 줄 알았다.
“갑자기?”
“갑자기는 아니지, 일주일 전에도 물어봤잖아.”
“그랬던가?”
얘도 참, 누나는 샐러드 집게로 아낙사의 머리를 콩 때리는 시늉을 한다. 그게 남동생으로부터 작은 웃음을 이끌어냈다. 누나는 만족하며 집게를 내려놓았다.
“어떤 사람일까 궁금하지 않아?”
“어차피 결정된 거잖아. 직접 만나서 판단하면 되지.”
누나가 입가를 가리며 쿡쿡 웃었다. 그게 말이지, 하면서 운을 떼는 모습이 몹시도 즐거워보인다.
“꽃집 단골손님이 아는 학생인데, 대학 기숙사에 못 들어갔다나 봐. 타지에서 혼자 쩔쩔매고 있다길래 우리 집으로 들어오라고 말해버렸어. 너 학교 다닐 때 생각도 나고 해서. 아, 그때 생각 난다.”
“그렇게 좋은 추억은 아닌데.”
“이거 봐, 벌써 연락처도 주고받았다? 여기 사진.”
확대된 프로필 사진이 아낙사의 눈앞에 들이밀어졌다. 백발 남학생이 커다란 하얀 개에 파묻혀 있는 사진이었다. 어디까지가 강아지 털이고 어디서부터가 사람 머린지 잘 구분되지 않는다. 강아지와 사람이 한 날 한시에 태어났다고 해도 농담으로 들리지 않을 것 같았다. 아낙사는 안심했다. 적어도 새벽 늦게 술에 취해 귀가하거나 몰래 친구들을 불러 파티를 할 것 같은 인상은 아니었다.
“귀엽지? 번호 알려줄까?”
“됐어, 어차피 자주 볼 일도 없을 텐데.”
누나가 꽃집에서 일하는 것처럼, 아낙사는 대학에서 강의를 하고 남는 시간엔 개인 연구를 하면서 하루의 대부분을 보냈다. 곧 개강을 앞두고 있으니 지금까지와 같은 생활 패턴을 유지한다면 그가 이 싱그러운 대학생과 얼굴을 마주치는 건 아침이나 저녁 식사 때가 유일할 거라고 아낙사는 짐작했다. 엄청난 우연으로 강의실에서 교수와 학생으로 만나면 모를까. 하지만 누나의 생각은 다른 듯했다.
“세상에.” 믿을 수 없다는 듯 누나가 목소리를 높인다. “너 지금 누나 혼자 무럭무럭 자라나는 대학생을 먹이고 재우고 입히라는 거니?”
“…미안. 나도 도울게.” 재우고 입히는 건 아니지 않나? 그런 의문이 들었지만 지금은 속에 담아둬야 할 때라고 직감이 아낙사에게 말하고 있었다.
문 앞에 서서 파이논은 길게 심호흡했다. 전혀 두근거리지 않는다고 하면 거짓말일 것이다.
오늘부로 그는 이 집의 하숙생이 된다. 갑자기 거처가 결정되고 난 후로 지난 며칠은 안도감 그리고 새로운 긴장감으로 가득한 나날이었다. 집주인 누나는 친절한 사람이었다. 파이논의 사정을 전부 고려해 주고, 맞춰줄 수 있는 부분은 최대한 맞춰주었다.
누나와는 미리 연락처를 주고받아 파이논은 벌써 남매의 이런저런 생활 습관에 대해 많은 정보를 얻은 상태였다. 단지 누나가 종종 언급하는 또 한 명의 동거인, 그러니까 ‘아낙사’에 관해선 아직 많은 부분이 수수께끼로 남아있었다. 하지만 그가 어떤 사람일지라도 파이논은 잘 지낼 자신이 있었다. 중요한 건 첫인상, 그리고 오갈 데 없는 대학생다운 천진 가련한 태도, 그리고 또… 호감 가는 미소?
좋아, 할 수 있어.
혼잣말하고는 파이논이 벨을 눌렀다. 체인이 덜그럭하는 소리가 나더니 금방 문이 열린다.
제일 먼저 파이논의 시야에 들어온 건 꽃 한 아름이었다. 그다음으로는 꽃다발을 안고 있는 팔. 느슨하게 묶은 긴 머리. 입은 무슨 말을 하려다 멈춘 것처럼 살짝 벌어져 있었다. 올려다보는 오묘한 눈동자와 시선이 마주치면서 파이논은 저도 모르게 얼굴이 화끈 달아오르고 말았다.
“크흠. 드디어 뵙네요, 누나. 새삼스럽지만 다시 인사드립니다. 파이논이에요.”
“…….”
“남동생 분은 안 계신가봐요?”
“누나 지금 집에 없는데.”
하숙생의 표정이 물음표에서 느낌표로, 나아가 경악으로 진화했다. 웃음이 흘러나오는 걸 감추기 위해 아낙사가 꽃다발 뒤로 얼굴을 숨겼다. 이렇게까지 감정을 못 숨기는 사람은 살면서 처음 보았다. 하숙생이 그를 누나로 착각했다고 해서 아낙사는 딱히 기분이 상하지 않았다. 남매가 서로 닮은 건 이상한 일도 아니고 부끄러워할 일도 아니었다. 다만 파이논이 어쩔 줄 몰라서 당황해하는 모습을 보는 게 무척 재미있었다. 순진한 대학생에겐 안된 일이지만 조금만, 아주 조금만 더 연극을 계속해 볼 생각이었다.
“따라와. 네 방을 보여줄 테니까.”
쌀쌀맞게 말하고는 파이논을 기다리지 않고 먼저 계단을 올라갔다. 슬쩍 뒤를 보니 파이논은 고개를 푹 떨구고 있었다. 첫인상이 모든 걸 좌우한다고 생각한 지 5분도 되지 않아서 이런 초특대형 실수를 저질러 버렸다. 안고 있는 짐이 세상의 무게처럼 파이논을 짓눌렀다.
“뭐 해, 안 올라올 거야?”
“죄송합니다! 금방 갈게요.”
재촉받고 그제야 파이논이 계단을 한 번에 두 칸씩 오른다. 아낙사는 손짓으로 각자의 방을 안내했다. 내 방은 여기, 네 방은 저기. 나란히 자리 잡은 구조를 보고 파이논이 반짝 눈을 빛낸다.
“바로 옆이네요.”
“왜, 싫어? 싫으면 다른 방으로 바꿔줄 수도 있고.”
“네에? 아뇨, 그럴 리가요!”
깜짝 놀라며 파이논이 고개를 도리도리 흔든다. 분위기가 조금 누그러든 지금이 어쩌면 다시 시작할 마지막 기회일지도 몰랐다. 파이논은 얼른 짐을 놓고 손을 내밀었다.
“앞으로 잘 부탁드려요, 아낙사. 좋은 이웃이 되려고 노력하겠습니다. 불편한 점이 있다면 언제든 말씀해주세요.”
“벌써 하나 생겼네. 내 이름은 아낙사가 아니라 아낙사고라스야. 누나가 그렇게 부른다고 너까지 따라 부르면 어떡해?”
“아… 하하하, 네.”
“그리고 이거 받아. 누나가 보내는 선물이야.”
아낙사가 멋쩍게 비어 있는 파이논의 손에 꽃다발을 안겨주었다. 누나의 취향을 듬뿍 담아 풍성하고 화려한 조합이었다. 이렇게 훌륭한 꽃다발이라니. 파이논은 감격해서 폭신해 보이는 겹작약 한 송이에 코를 묻어 보았다. 시야가 금방 연분홍색으로 물들었다. 당장 꽃병부터 사야겠다고 계획을 세우는데, “파이논” 하고 부르는 목소리가 그를 생각에서 깨웠다. 분홍빛 시야 속에서 아낙사는 작게 웃고 있었다.
“그렇게 좋아?”
순간 파이논의 심장이 미끄러졌다. 속절없이 그가 중얼거렸다. 네, 너무 좋아요.
2.
하숙생 입주 후 2주간은 시범 기간이었다. 누나와 상의한 건 아니고, 어디까지나 아낙사 혼자 독단적으로 정한 절차였다.
길지 않은 시간 동안 지켜본 것만으로도 아낙사는 그가 배려심있고 부지런하며, 자기주장을 이기적으로 관철하지 않는 사람이라는 걸 알 수 있었다. 전반적으로 파이논은 같이 살기 좋은 성격이었다. 무슨 말을 해도 “불편하신가요? 제가 맞춰드릴게요!” 같은 태도를 취한다. 하우스메이트로서 여기서 뭘 더 바랄 수 있을까. 어딜 가도 이런 동거인은 흔치 않을 테니, 남매는 축복받았다고 해야 할 것이다.
하숙 예산을 짜면서 누나는 파이논이 원래 받으려던 하숙비에 추가 식비를 자발적으로 얹어 냈다고 했다. 액수를 듣고 아낙사는 조금 과한 게 아닌가, 돌려주는 게 맞지 않는지 생각했었다.
이제 보니 쓸데없는 고민이었다.
두 사람만 있었을 땐 일주일 걸려서 겨우 비웠을 분량이 이삼일 만에 사라진다. 누나가 어디서 얻어 온 파이나 홀케이크 같은 디저트도 이제는 소비기한을 신경 쓸 필요가 없었다. 누나는 손뼉을 치며 감탄했고 아낙사도 겉으로 티만 내지 않았을 뿐, 씩씩하게 접시를 비우는 파이논을 속으로 몇 번이나 쓰다듬었는지 모른다. 냉장고 속에서 파이논 몫! 이라고 써붙인 누나의 글씨를 마주칠 때마다 아낙사는 미소를 짓게 되었다. 가족이 아닌 타인이 꾸준히 곁에 존재한다는 감각은 아낙사의 심리에 큰 안정을 주었다.
그 타인이 파이논이라서 다행이었다. 아낙사는 진심으로 그렇게 생각한다.
3.
8월의 남은 날은 빠르게 지나가고 이제는 달력을 한 장 넘길 시간이었다.
파이논은 아침의 노래를 흥얼거리며 계단을 내려갔다. 눈으로 슬쩍 체크한 옆방 문은 오늘 아침에도 굳게 닫혀있었다. 써니 사이드 업을 여러 장 만들고 토스터에서 식빵이 튀어나오면 그제야 아낙사가 졸린 눈을 하고 터덜터덜 1층으로 내려오는 것. 그게 파이논이 아는 이 집의 일상이었다. 꽃집을 운영하는 누나는 파이논보다도 훨씬 아침이 이르다. 누나로부터 부탁을 받은 것도 아닌데, 파이논은 어느샌가 아낙사를 그가 돌보고 챙겨야 할 사람으로 여기고 있었다.
하지만 놀랍게도 오늘 아침엔 아낙사가 먼저 테이블에 앉아 있었다. 꾸벅꾸벅 조는 모습도 아니고, 심지어 홈웨어 차림도 아니었다! 파이논의 머리가 과부하에 걸린 사이 아낙사 쪽에서 먼저 안녕, 하고 인사했다. 허겁지겁 파이논도 아침 인사를 건넨다. 자리에 앉으면서도 그는 계속해서 아낙사를 흘끗거렸다.
“오늘 어디 가세요?”
“뭐?”
“정장을 입으셨길래 무슨 날인가 해서요.”
아낙사는 토스트 반쪽을 베어 물다 말고 잠시 파이논의 얼굴을 빤히 바라보았다.
“잊은 건 아니겠지, 파이논? 오늘부터 9월이잖아.”
“네? 그렇죠.”
“네가 다니는 대학 개강일이고.”
“맞아요. 기억하고 계셨네요! 아, 혹시 제가 지각할까 봐 걱정해 주시는 거라면 괜찮아요, 이번 학기에는 오후 수업만 있거든요. 수강신청 대성공이죠.”
“그게 아니라, 누나가 말 안 했어?”
“뭐를요?”
나 그 학교 교수인데. 제 입으로 그렇게 말하기가 조금 껄끄러웠다. 아낙사는 테이블에 올려놨던 휴대폰을 조작해서 파이논에게 쓱 내민다. 화면에 띄운 건 대학 웹사이트의 교수진 소개 페이지였다. ‘아낙사고라스 교수’―그 프로필 사진을 본 순간 파이논이 억울함을 가득 담아 외쳤다.
“교수? 우리 학교 교수님이셨다고요?”
미리 알았다면 공감대를 형성해서 훨씬 더 많이 대화할 수도, 그가 가르치는 수업을 수강할 수도 있었을 것이다. 학과가 다른 게 무슨 대수인가. 파이논의 머릿속에 뭉게뭉게 상상이 피어오른다. 매일 아낙사와 나란히 출근하고, 가르침을 청하고, 수업 후엔 둘만의 시간을… 갖기는 아무래도 힘들겠지만, 아무튼.
또 하나 파이논의 마음에 걸리는 게 있었다. 이제까지 파이논은 꿋꿋하게 그를 아낙사라고 불러왔다. 그런데 다니는 대학의 교수라는 걸 안 이상, 지금처럼 가볍게 부를 수는 없었다.
“저, 교수님. 죄송해요.”
“이제 와서 뭘 새삼스럽게. 그냥 아낙사고라스라고 불러.”
“그럴 순 없죠. 남들이 오해하면 어떡해요.”
무슨 오해? 아낙사는 묻고 싶기도 하고, 묻고 싶지 않기도 했다. 그나저나 아낙사가 교수인 걸 몰랐다면, 방학 내내 출근하지 않고 방에서 빈둥거리는 (적어도 겉보기엔) 그를 파이논은 대체 뭐라고 생각했을까. 그나마 밥은 적게 먹는 식충이, 체력이 모자라는 상주 경비원? 이 또한 알고 싶은 마음 반, 모르고 싶은 마음 반이었다.
“호칭 문제는 네 마음대로 해. 난 먼저 가 봐야겠으니까 아침은 알아서 차려 먹고.”
“출근하시는 거예요? 그럼 저도 같이 갈게요!”
“넌 오후 수업만 있다며?”
“개강 첫날이라도 예습을 놓칠 수 없죠.”
파이논이 진지하게 헛소리했다. 때마침 들려오는 커다란 꼬르륵 소리가 아니었다면 훨씬 그럴듯하게 들렸을지도 모르겠다. 아낙사는 비어 있는 파이논 전용 접시를 물끄러미 보았다. 타이밍 한번 완벽하게도, 토스터가 노릇하게 구워진 식빵 네 쪽을 팅 내놓는다.
“먹을 거지?”
“ …네, 주세요.”
머쓱하게 접시를 내미는 모습이 귀엽다. 아낙사는 새로 산 잼을 챙겨서 파이논 앞으로 슥 밀어주었다.
파이논이 이날 새롭게 배운 사실 하나. 아낙사는 대중교통으로 출퇴근한다. 버스를 타는 교수님이라니 신선하다고 하자 아낙사는 잠시 침묵한 후 운전면허가 없다고 했다.
버스 안은 출근하는 직장인들과 통학하는 학생들로 붐볐다. 중간에 딱 하나 자리가 나긴 했는데, 둘이서 마주 보고 아낙사 교수님 앉으세요, 난 됐으니까 파이논 네가 앉아, 아무리 그래도 교수님이, 이렇게 실랑이하는 사이에 다른 승객이 냉큼 앉아버렸다. 숨죽여 웃는 파이논의 옆구리를 아낙사가 팔꿈치로 쳤다.
버스가 커브 길을 돌 때마다 아낙사는 자주 휘청거렸다. 손잡이가 제 역할을 못 하는 것 같아서 파이논은 차라리 그를 잡으라고 제안해 보았다. 아낙사는 이리저리 흔들리면서도 끝까지 손잡이를 잡겠다고 고집을 부렸다. 파이논은 생각한다. 다음부턴 무슨 일이 있어도 아낙사를 자리에 앉혀야겠다. 아낙사가 앉으려 하지 않는다면… 음, 교수님을 무릎에 앉히면 아무래도 혼나겠지?
새로 알게 된 또 다른 사실 하나. 아낙사가 이번 학기에 담당하는 수업은 <졸업 프로젝트 1>이다. 이것만큼은 파이논이 아무리 열정이 넘쳐도 타과생으로서 수강할 자신이 없었다. 다음 학기에는 그도 들을 수 있는 입문 수업을 열어달라고 농담 삼아 말해봤는데, 아낙사가 진지하게 고려해 주는 걸 보고 파이논은 깜짝 놀랐다.
4.
개강 후 첫 주말을 기념하여 아낙사는 다시 새벽에 잠드는 삶으로 돌아왔다. 언제 잠들었는지는 모르겠지만, 어렴풋이 옆방에서 달그락거리는 소리가 났던 걸로 봐서 아마 파이논이 조깅을 나가는 시간대가 아니었을까 싶었다. 느지막이 눈을 뜬 아낙사는 이불에서 거의 기어 나오다시피 빠져나왔다.
욕실 문을 열자 살짝 미지근한 공기와 샤워 젤 향이 훅 끼쳐왔다. 이미 누군가 (어차피 파이논이겠지만) 한 차례 씻고 샤워부스까지 정돈해 놓은 흔적이 있었다. 참 부지런한 녀석이라고 아낙사는 새삼 감탄한다.
이메일을 체크하고 다음 주 강의 자료를 업로드하고 나니 벌써 저녁때가 되었다. 너무 늦게 일어난 탓에 아낙사는 입맛이 하나도 없었다. 하지만 며칠 전부터 누나가 “우리끼리 개강 파티를 하자!” 라며 들떠 있었기 때문에 오늘 식사는 거를 수 없었다.
비적비적 아래층으로 내려가 보니 파이논이 누나와 함께 부엌에서 분주하게 일하는 중이었다. 아낙사는 스툴에 걸터앉아서 두 사람이 일하는 모습을 지켜봤다. 파이논의 특기는 샐러드라고 했던가. 사과 깎는 데도 소질이 있는 것 같지만 깎자마자 반 이상이 입으로 들어가서 정작 접시에 남는 게 별로 없었다.
파이논이 온 뒤로 누나는 전보다 밝아졌다. 같이 산 세월이 긴 아낙사의 눈에는 차이점이 또렷하게 보였다. 이런 변화를 불러온 파이논에게 고마운 한편, 조금 울적한 마음이 들기도 했다. 아무리 노력해도 과거 부모님의 사고가 남매 사이에 크레바스처럼 균열로 남아 있었다. 그걸 극복하지 않는 한 파이논처럼 무구한 행복을 누나에게 줄 수 없었다. 그게 아낙사를 만성적으로 우울하게 했다.
“개강 축하해!”
“한 주간 고생하셨습니다!”
“아무튼 축하해.”
불협화음의 건배사가 부딪혔다. 주종마저 제각각이어서 파이논은 페일 에일, 아낙사는 레드 와인, 누나는 위스키 온더락이었다. 각자 한 모금씩을 하고 누나와 파이논은 크으, 하는 감탄사를 내뱉는다.
“파이논, 일주일 통학해 본 소감이 어때? 할만해?”
“그럼요. 기숙사보다 훨씬 좋아요. 설마 같은 학교 교수님이랑 함께 살게 될 줄은 상상도 못 했지만… 아낙사 교수님은 어떠세요?”
“아낙사고라스라니까.”
아낙사를 제외한 두 사람이 서로 눈빛을 주고받더니 푸하하 웃음을 터뜨렸다. 아낙사의 이 버릇은 알고 봤더니 학교에서 알 사람은 다 아는 유명한 이야기였다. 그래도 다들 굴하지 않고 그를 아낙사 교수님, 낙사 교수님으로 불러댔다. 파이논이 이 이야기를 들려 주자 누나는 굉장히 재밌어했었다.
대학 이야기 외에도 세 사람은 시시콜콜한 일상 대화를 나눴다. 요즘 잘 나가는 데이트용 꽃다발, 파이논이 산 골동품 화병에 얽힌 사연, 아낙사가 실수로 짝짝이 양말을 신고 나갔던 케케묵은 일화까지. 밤이 깊어질수록 그들의 얼굴도 발갛게 익었다. 결국 누나는 뒷정리를 동생들에게 맡기고 제일 먼저 퇴장했다.
나란히 서서 설거지하는 동안 아낙사는 조금씩 술이 깨는 게 느껴졌다. 취기는 아낙사의 손끝에만 어렴풋이 남아있었다. 잠시 부엌에는 달그락 소리 외에 아무 말도 오가지 않았다. 아낙사가 거품을 내서 접시를 닦으면 파이논이 받아서 물에 헹군다. 건조대에 차곡차곡 접시가 쌓여갈수록 파이논은 이 시간이 끝나지 않기를 바랐다. 하지만 당연히 끝은 도래하고 수도꼭지는 잠글 때가 오는 법이었다.
아쉬워하는 파이논의 어깨를 아낙사가 두드렸다. 미련이 남은 건 아낙사도 마찬가지였다. “한 잔 더 할래?” 하는 물음에 대한 답은 물론 무조건적인 긍정이었다.
둘은 맥주 한 캔씩을 들고 거실 소파로 가서 앉았다. 캔을 기울여서 말없이 건배한다. 그 반동으로 맥주 거품이 아낙사의 손과 커피 테이블에 튀었다. 즉시 휴지를 가지러 일어서는 아낙사를 파이논이 끌어다 앉혔다. 보리와 알코올 향이 나는 손등 위로 파이논의 입술이 다가왔다. 시선은 흔들림 없이 아낙사를 향하며 파이논은 경건한 의식처럼 그 손등을 핥았다.
“아낙사.” 파이논의 목소리가 이렇게 낮아질 수 있었던가? “전 당신을….”
파이논은 그 이상 말을 잇지 못했다.
갑자기 아낙사의 분위기가 확 달라진 탓이었다. 그의 온몸에서 날 선 긴장감이 느껴졌다. 교수는 경계심을 가득 담아 날카로운 눈초리로 거실 어딘가를 똑바로 노려본다. 하지만 파이논이 뒤를 돌아봐도 거기엔 아무것도 없었다. 그저 누나가 기르는 화분 몇 구가 있을 뿐이었다.
“교수님? 아낙사?”
“파이논, 나중에 다시 얘기하자.”
“제가 뭘 잘못했나요?”
“그런 거 아니야.”
고개까지 저어 가며 아낙사가 부정했다. 미안하지만 지금은 다정하게 설명해 줄 시간이 없었다. ‘저것’이 무엇인지 제대로 규명해 내기 전에는, 혹시라도 파이논에게 해가 미칠 가능성이 있는 한, 이 자리에서 내보내는 게 가장 빠르고 안전한 방법이었다.
‘저것’이란, 거실에 반투명하게 떠 있는 여성의 형상이었다.
나뭇가지를 몸에 기생시킨 듯한 모습을 하고, 두 눈은 꼭 감은 채 손을 포개고 있다. 치렁치렁한 옷자락은 그야말로 <엠포리어스 신화집>에서 방금 튀어나온 듯하다.
아낙사는 저것과 만난 적이 있다. 어린 시절 신전 터에서 그의 눈물을 닦아주었던 어른, 이상한 말을 하던 낯선 사람.
“오랜만이야, 사람의 아이야. 그런데 어쩐지 내가 타이밍을 잘못 맞춘 것 같네?”
신과의 오래된 약속이 드디어 아낙사고라스의 시간을 따라잡았다.
'hsr > au' 카테고리의 다른 글
| [파이낙사] (현대AU) 온라인 회의 시 복장에 유의합시다 (0) | 2025.08.31 |
|---|---|
| [파이낙사] (현대AU) 우리 교수님이 이렇게 휴강하실 리 없어 (0) | 2025.08.30 |
| [파이낙사] (현대AU) 소원을 들어주는 연못 (3) 完 (0) | 2025.08.20 |
| [파이낙사] (현대AU) 소원을 들어주는 연못 (2) (0) | 2025.08.15 |
| [파이낙사] (현대AU) 커플 테라피 (0) | 2025.07.23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