9.
아낙사는 꿈을 꾸었다.
꿈이라는 게 으레 그렇듯, 그 내용은 무질서 속 질서로 가득했다. 아낙사는 바닷가에서 멸종한 드로마스의 등을 타고 있었다. 처음에는 단순히 해안가를 산책하는 정도였는데, 어느새 사명을 가진 걸로 설정이 바뀌었다. 무슨 일이 있어도 이 드로마스들을 바다 건너 섬까지 데려가야 한다는. ‘왜’라는 질문은 꿈나라의 혼란스러운 이치에 통하지 않았다.
모래사장에서 일광욕하는 저 사랑스러운 짐승들을 바라보며, 아낙사는 드로마스 열세 마리를 태울 배의 넓이와 깊이를 열정적으로 계산했다. 드로마스 무게 재는 법, 부력 공식, 그리고 현실의 책상 위에 펼쳐져 있는 풀다 만 수식까지 모든 게 머릿속에서 하나로 뒤엉켰다.
‘내가 답을 밝혀냈다!’
풀이를 떠올린 순간 모래사장의 조명이 일제히 꺼졌다. 암전 속에서 세르세스가 고요히 그를 주시하고 있었다. 그 손에 들린 나뭇가지에서 초록 잎사귀 하나가 툭 떨어진다.
열하나.
떨어진 잎이 땅에 닿기 직전에 아낙사는 꿈에서 깼다. 침대 밖으로 내동그라진 드로마스 인형이 그를 원망하듯 바라보고 있다. 아낙사는 팔을 뻗어서 인형을 건져 올렸다. 누가 갑자기 스피커 볼륨을 높인 것처럼 일상의 소리들이 한 번에 밀려들었다. 지나가는 자전거 벨소리. 커튼을 스치는 바람. 호스 물줄기. 이웃에게 인사를 건네는 파이논의 밝은 목소리. 품에 안은 인형을 아낙사가 좀 더 꽉 끌어안았다.
어제도 같은 장면에서 눈을 떴었다. 어제도, 그제도, 그전에도. 시작할 땐 열다섯 장이었던 나뭇잎이 이제 열한 장으로 줄었다.
알겠으니까 쓸데없는 참견은 그만하라고 세르세스에게 전하고 싶다. 카운트다운 쯤은 세르세스 도움 없이도 아낙사 혼자 충분히 할 수 있었다.
D-10.
세르세스, 세르세스. 대체 무슨 말이 하고 싶은 거지?
잎사귀가 하나 더 떨어진 날, 아낙사는 참지 못하고 꿈속의 세르세스에게 말을 걸었다. 세르세스의 대답은 아낙사가 아는 어떤 언어와도 일치하지 않았다.
꿈에서 깨 보니 귀가 먹먹했다. 고도를 바꾸는 비행기 안에 앉아 있을 때처럼 말이었다. 하나 다른 점이 있다면, 시간이 지나도 사정이 크게 나아지지 않았다는 것이다. 잔잔한 두통과 잘 들리지 않는 귀 때문에 아낙사는 이날 강의 중 학생들의 질문을 세 번이나 놓치고 말았다. 아슬아슬하게 놓치지 않은 네 번째 질문은 “교수님, 괜찮으세요?” 였다. 그는 새침한 얼굴로, 수업 내용과 무관한 개인적인 질문은 강의가 끝난 후에만 받겠다고 엄포를 놓았다.
꿈 속의 세르세스와 대화하려는 실험은 실패로 돌아갔다. 현실에서 찾아오는 걸 기다리거나, 그가 있음직한 장소를 찾아가는 수밖에 없었다. 아무래도 후자가 아낙사의 취향에는 더 맞았다.
D-9.
토요일 낮부터 예보에 없던 많은 비가 내렸다. 오후 세 시라는 게 믿기지 않을 정도로 창밖 풍경은 순식간에 어두워졌다. 유리창을 때리는 빗소리가 아프게 느껴질 정도다.
“같이 누나 마중 나갈까요?”
파이논이 멍하니 창밖을 보던 아낙사에게 제안했다. 아낙사는 책을 덮고 고개를 끄덕였다.
현관 앞에서 파이논은 우산꽂이를 뒤적거리더니 우산 두 개를 꺼냈다. 그가 고른 건 큰 장우산 하나와 누나의 체크무늬 접이식 우산이었다.
“이거면 되겠죠?”
태연하게 묻는 말에 아낙사는 모르는 척 괜찮지 않겠냐고 대답한다. 결국 그들은 하나뿐인 장우산을 나눠 쓰고 길을 나섰다. 빗줄기가 우산 위를 두드리는 소리가 요란했다. 그 속에서 대화를 나누려면 목소리를 조금 높여야 했다.
“파이논, 그만 붙어.”
“죄송해요, 제 생각보다 우산이 좀 작네요. 그런데 이래야 제가 안 젖죠. 감기라도 걸려서 아낙사한테 옮기라도 하면 큰일이잖아요.”
“말은 잘하네.”
잠시 후, 둘은 꽃집 간판이 보이는 골목에 접어들었다. 가게 문에 영업 마감 사인이 걸려있지만 실내에는 불이 켜져 있었다. 우산 속 두 사람의 걸음이 자연스레 빨라졌다. 그때 알 수 없는 통증이 아낙사의 가슴을 치고 지나갔다. 옆을 스치던 어깨가 멈추자 파이논이 고개를 돌렸다.
“왜 그러세요?”
“아무것도 아냐.”
어서 가자고. 아낙사가 재촉했다. 빗방울이 흐르는 유리벽 너머로 누나가 동생과 하숙생을 알아보고 반갑게 손을 흔든다.
D-8.
냉장고에 우유가 떨어졌다. 치즈도. 샐러드용 채소도. 팬트리 빵 선반에도 빈자리가 눈에 띄었다. 이번 주 장보기 담당이 누구였는지 잠시 생각하다가, 누나는 부엌에 붙어 있는 집안일 담당표를 확인했다. 이번 주 칸에는 남동생의 이름이 적혀 있었다.
“아.”
천장을 보며 누나가 탄식했다. 많은 의미가 담긴 한마디였다.
벌금통을 찾으러 거실로 향하는데, 방에 콕 박혀 있을 거라고 생각했던 아낙사가 거기에 있었다. 동생과 파이논은 서로에게 기대어 곤히 자는 중이었다. TV에서는 잔잔히 영화가 흘러나오고, 파이논은 잠들기 직전까지 리모컨을 만지고 있었는지 손끝이 전원 버튼 근처에 가 있었다. 크레딧이 올라가고 있는 로맨틱 코미디 영화는 (동생이 고른 건 아닐 테니) 아마 파이논에게 선택을 양보한 결과가 아닐까 싶었다. 아낙사의 한 손은 쿠션을, 다른 한 손은 바로 옆에서 잠든 파이논을 붙잡은 채였다. 껴안을 게 없으면 쉽게 잠들지 못하던 동생의 어린 시절이 떠올라 누나는 조용히 웃음을 지었다.
‘이건 뭐지?’
조심스레 누나가 손을 뻗었다. 동생의 머리에 싱싱한 초록 잎사귀가 붙어있었다. 정원에도, 집안에도 이런 종류는 없었다. 어디서 뭘 했길래 이런 걸 머리에 붙여 왔나 싶었다. 갑자기 끼고 나타난 안대도 그렇고, 제 동생이지만 아낙사는 가끔씩 이해하기 힘든 면이 있다. 누나는 별 생각 없이 나뭇잎을 한쪽으로 치웠다. 그리고 잠들어 있는 동생들의 사진을 휴대폰에 담았다. 나중에 파이논에게만 몰래 공유할 생각이었다.
D-7.
물컵이 쨍그랑 깨지는 소리가 바쁜 월요일 아침 식탁을 순간 정적으로 만들었다.
컵을 깨뜨린 아낙사보다, 파이논이 먼저 정신을 차리고 깨진 유리조각들을 줍기 시작했다. 아낙사는 눈이 동그래져서 파이논이 식탁 아래로 들어가는 걸 멍하니 지켜봤다. 그러다 퍼뜩 정신을 차리고 몸을 숙여 파이논을 도우려 했다.
“잠깐. 파이논, 내가 할게.”
“아뇨. 위험하니까 다 치울 때까지 거기 계세요.”
파이논은 깨진 조각을 치우고 바닥에 흥건한 물을 닦았다. 손이 바쁘게 움직이면서도, 조심스럽게 발걸음을 옮겨 사방으로 퍼진 유리조각을 밟지 않도록 주의했다. 신중하게 움직이는 파이논의 모습에서 평소와는 다른 묘한 집중력과 안정감이 느껴졌다.
“안대 때문에 거리감이 어색하신가 봐요. 제가 잘 보고 도와드려야 했는데, 죄송해요.”
“네가 사과할 필요 없어. 나도 부주의했으니까.”
“역시 안내견 등록을 못 한 게 마음에 걸려요. 아, 지금이라도 다시 신청서를 내 볼까요?”
안내견이라는 말에 잠시 묻어두었던 그때의 기억이 떠올랐다. 아낙사는 어이없다는 듯 고개를 절레절레 흔들었다. 다만 입가에 지어지는 미소까지 숨기지는 못했다.
“…그렇게 개가 되고 싶어, 파이논?”
“그럼 마음껏 칭찬받을 수 있잖아요.”
지금도 칭찬을 바라는 눈으로 파이논이 말한다. 잠시 망설이다가 아낙사는 그의 머리를 쓰다듬었다. 놀라면서도 기뻐하는 파이논을 보니 더 자주 이렇게 해야 했다는 생각이 들었다.
물컵을 깨뜨린 건 실수가 아니었다. 파이논 말대로 거리 조절 문제도, 부주의한 탓도 아니었다. 분명 아낙사는 유리컵을 쥐고 있었다. 그러나 눈 깜짝하는 사이에 떨어져 산산조각 났다. 마치 한순간 아낙사의 손이 투명해져, 제자리에 있는 컵을 통과해 버린 것처럼 말이었다.
D-6.
“아낙사, 취하셨어요.”
파이논은 꾸벅꾸벅 조는 아낙사를 부드럽게 깨웠다. 아낙사는 눈을 뜨는가 싶더니 몸이 앞으로, 또 옆으로 기울었다.
오늘 밤 <동문의 날> 행사에서 돌아온 아낙사는 잔뜩 취해 있었다. 매 해 이 주 화요일에 열리는 행사라고 했다. 비틀거리고 엉겨 붙는 그를 2층까지 부축해서 침대에 앉히기란 보통 일이 아니었다. 작년에는 어떻게 했는지 누나에게 물어 보니, 아낙사가 알아서 스스로 방까지 걸어갔다고 한다. 눈도 뜨지 못하고 걸어가는 게 아주 귀여웠다고도.
솔직히 말해서 그냥 아낙사를 들어서 나르는 게 파이논으로서는 훨씬 수월할 것 같았다. 다음 날 깨어난 아낙사가 무슨 말을 할지 걱정된다는 점만 아니었다면, 아마 그렇게 했을 것이다.
“제 말 들리세요?”
흔들흔들. 파이논이 흔드는 대로 아낙사의 어깨가 흔들린다. 깨우는 걸 포기하고 파이논은 불편해 보이는 그의 넥타이만이라도 풀려고 했다.
“가만히 계세요, 이것만 풀어드릴게요. 그럼 푹 잘 수 있어요.”
파이논이 조심스레 매듭을 잡아당겼다. 한쪽 눈을 꼭 감은 아낙사는 그저 숨을 고르듯 침대 끄트머리를 붙잡고 앉아 있다. 매듭이 느슨해지고 파이논의 손끝이 목덜미에 스치자 아낙사가 가볍게 웃었다.
“네 손… 따뜻해.”
“아낙사, 움직이지 마세요.”
“그래.”
하지만 대답과 달리, 아낙사는 천천히 몸을 기울였다.
“조심하세―”
말을 끝내기도 전에 아낙사의 입술이 파이논에게 닿았다. 파이논의 머릿속이 새하얘지고 상황을 이해할 즈음엔 목까지 화끈 달아올랐다. 숨 쉬는 것조차 잊어버렸을 때, 아낙사가 살짝 입술을 떼더니 낮게 속삭였다.
“역시 여긴 뜨겁네.”
심장이 가슴을 두드리는 소리가 방 안을 가득 채우는 것만 같았다. 도저히 가만히 있을 수 없었다. 아낙사의 셔츠를 살짝 움켜쥐고 이번엔 파이논이 체중을 앞으로 실었다. 덮쳐오는 무게를 아낙사는 피하지 않았다, 아니, 오히려 고개를 살짝 기울여 파이논의 침범을 기꺼이 재촉한다.
열기에 휩쓸려 파이논은 헐거워진 넥타이를 잡아끌었다. 그리고 아낙사의 입술에서 턱으로, 목덜미로 내려가며 몇 차례씩 뜨거운 키스를 남겼다. 한 손으로 성급하게 단추 몇 개를 풀고, 드러난 가슴께를 더듬었다.
부드러운 살결이 아닌, 시리게 차가운 감촉이 그를 기다리고 있었다.
“……?”
분명 닿았는데도 실체가 느껴지지 않았다. 숨을 삼키며 내려다본 파이논의 눈앞에서 아낙사의 가슴 일부분이 말 그대로 텅 비어 있었다. 테이블 램프 조명이 비어있는 모양대로 투과해 반대편으로 빛을 뿌렸다.
“이게… 이게 대체…….”
파이논이 중얼거렸다. 혹시 꿈을 꾸는 걸까? 눈을 비벼도 사라지지 않는 광경이었다. 어떻게 이런 일이 있을 수 있지? 믿기지 않아서 그는 그 공허한 부분을 다시 한 번 조심스레 쓸어보았다.
“……!”
아낙사의 어깨가 크게 움찔했다. 화들짝 놀란 파이논이 손을 거두며 숨을 삼켰다.
“죄송해요! 아프세요?”
“그냥 좀 놀란 것뿐이야. 파이논, 이만 네 방으로 돌아가.”
불에 덴 것처럼 뜨거워서 놀랐다는 말을 굳이 할 필요는 없었다. 아낙사는 갈 곳을 잃은 파이논의 손을 맞잡았다. 손끝을 잠시 움켜쥔 뒤, 그는 천천히, 아주 천천히 몸을 일으켰다.
“두 번 말하게 하지―”
“아뇨.”
파이논의 목소리가 떨렸다. 어느새 눈가에 맺힌 눈물이 그의 시야를 흐렸다. 아낙사가 어떤 표정을 짓고 있는지 보고 싶지만 눈물이 번져 흐릿해진 탓에 제대로 볼 수 없었다.
“설명해 주세요, 아낙사. 그러기로 약속하셨잖아요. 전에 뭐라고 하셨는지 잊으신 건가요? 그렇다면 제가 다시 들려드릴게요. 네, 다음에 얘기하자고 하셨어요. 그때 말씀하신 그 ‘다음’이 대체 언제인가요, 열흘 뒤? 일 년 후? 남은 한쪽 눈까지 불편해진 다음에야 말해 주실 건가요!”
목소리는 차츰 격해졌고, 쏟아낸 말이 방 안에 무겁게 가라앉았다.
“곧 가능하겠지.”
아낙사가 짧게 대답했다. 하나 남은 눈에 냉소적인 빛이 어렸다.
“아낙사!”
외침에 겹쳐 쉿, 하는 낮은 소리가 흘렀다. 아낙사가 손가락으로 파이논의 입술을 막았다.
“내 말을 끊지 마. 열흘이나 일 년까지 갈 필요 없어. 고작 가설 하나 세우는 데 그렇게까지 시간이 오래 걸릴 리가 없잖아.”
그러곤 잠시 숨을 고르고, 말투를 살짝 바꿔 아낙사가 물었다. “너, 내일 수업 끝나는 시간이 몇 시지?”
“수업이요? 갑자기 수업은 왜…….”
파이논은 눈물을 훔치며 혼란스레 물었다.
“4시 전에는 끝났던가? 잘됐네. 그러면 강의실 밖에서 보자고. 같이 갈 데가 있으니까.”
말이 끝나자, 한동안 어색한 정적이 흘렀다. 아낙사는 멍하니 있는 파이논을 바라보다가, 주저하듯 손을 들어 그의 머리를 쓰다듬었다. 다정하다기보단, 서툴고 어색한 동작이었다. 그럼에도 손끝이 머리카락을 스치는 감각이 확실히 전해졌다. 파이논은 본능처럼 손길이 가는 대로 고개를 기울였다.
한동안 둘은 말없이 그렇게 있었다. 방 안 공기는 조금 전의 들뜬 기운이 무색하리만치 조용했다.
약간은 가벼워진 숨결 사이로 아낙사의 눈꺼풀이 천천히 내려앉기 시작했다. 안도감이 밀려오자 잊고 있던 피로와 술기운을 더한 어지러움이 전신을 급습했다. 이마를 한번 짚더니, 더는 참지 못하고 아낙사는 그를 기다리던 베개 위로 풀썩 몸을 던졌다. 깜짝 놀라 파이논이 어쩔 줄 몰라 하는게 느껴졌다. 아낙사는 반쯤 감긴 눈으로 흐릿하게 웃었다. 졸음에 겨운 목소리가 맥없이 흘러나왔다.
“나갈 때… 불 끄고 가.”
머리맡의 인형을 끌어다 안으며 아낙사가 중얼거린다. 곧 눈앞의 세상이 어두워졌다.
D-5.
옛 신전 터로 가는 투어 버스는 일주일에 세 번, 하루에 왕복 한 번씩인 배차 간격으로 운영되었다.
가는 길은 편도로 두 시간 반. 돌아올 때는 퇴근 시간과 겹쳐서 얼마나 걸릴지 모르겠다. 창밖으로 낡은 표지판이 아낙사를 스쳐 지나갔다. 옆자리의 파이논은 잠이 부족했는지 끄덕거리면서 졸고 있다. 별 볼 일 없는 비슷비슷한 풍경이 이어지고, 이내 지루해진 아낙사는 잠들어 있는 파이논에게 몸을 기댔다.
“이제 물결 위로 황금빛이 빛나니
내 나이 얼마이고 세월은 어찌 흘렀던가.”
밑둥만 남은 기둥 앞에서 파이논이 나지막이 읊조렸다. 감상에 젖어 있는 파이논의 어깨를 아낙사가 툭 치며 말했다.
“이쪽이야.”
아낙사가 이끄는 대로 두 사람은 연못으로 향했다. 모든 게 기억 속 그대로이면서도 동시에 아니었다. 연못 주변 나무들은 세월을 먹어 몸통이 두꺼워졌고, 어린 아낙사의 눈에 그렇게나 맑아 보였던 물은 사실 그렇게까지 깨끗하지는 않았다. 하지만 공기 중의 오래된 나무껍질 냄새와 풀벌레 소리, 그것이 자아내는 엄숙하고 비일상적인 분위기만큼은 그때 그대로였다. 장소가 주는 마력이라는 것을 아낙사는 예나 지금이나 부정할 생각이 없었다. 파이논은 압도당한 듯 숨을 죽여 말했다.
“마음이 평온해지는 풍경이네요.”
“흥. 알고 보면 그렇지도 않을걸.” 아낙사는 연못에서 시선을 떼지 않은 채 중얼거렸다. “귀찮기 짝이 없는 곳이야.”
참으로 그렇다. 모든 게 이 장소에서 시작되었으니까.
나는 이 연못이 어떻게 소원을 들어줄 수 있는지 알고 싶어. 천진난만하게 바라던 마음을 아낙사는 아직 기억하고 있었다. 모든 훌륭한 연구자는 어린 시절의 명랑한 호기심을 얼마간 간직한 사람들이며, 아낙사도 예외는 아니었다. 그 빛나던 소원에 값을 매긴다면 과연 얼마짜리일까. 세르세스는 수확의 메커니즘이 등가교환이라고 했다. 절대 값싸지 않을 것이다.
아낙사는 쇄골 아래, 자기 가슴 언저리를 지그시 눌러 보았다. 투명화의 첫 단계는 손, 다음에는 가슴. 서서히 전신으로 퍼질 거라는 예측은 비관주의의 산물이 아니었다. 쓸데없이 비장한 세르세스의 카운트다운과 요 며칠간의 투명화 현상을 바탕으로 생각해보건데,
“대가는 나 자신이겠지.”
덤덤히 결론 내리는 아낙사를 향해 세르세스가 소리 없이 박수를 보냈다. 보이지는 않아도 뭔가를 느낀 듯 파이논이 주위를 두리번거렸다. 신전에 발을 들였을 때부터 세르세스는 몇 걸음쯤 떨어진 곳에서 그들을 따라오고 있었다.
세르세스는 이야기한다.
마지막 비밀에 도달한 걸 환영해, 사람의 아이야.
기억조차 나지 않는 까마득한 옛날, 세르세스도 한때는 소녀의 명랑함과 학자의 호기심을 모두 갖춘 사람이었다. 그 또한 무수한 소원을 빌어 준다는 신들의 축복을 파헤치고자 했다. 그리고 알게 되었다, 신들의 세계를 엿본 사람은 그 대가로 인간으로서의 행복을 뒤로 하고 자신도 신의 영역으로 들어서야 한다는 걸. 오랫동안 세르세스는 연못을 지켰고 긴 시간 동안 폐허가 되는 걸 지켜보았다. 옛 신전 터는 관광지로서도 고고학 탐사지로서도 그 매력을 잃은 지 오래였다.
그 앞에 봄날의 나뭇잎처럼 연두색을 띤 아이가 나타났다. 등가교환의 의미조차 모르는 어린아이가.
“그때 난 네게 유예기간을 주기로 마음먹었어. 진정한 의미의 등가교환이려면 네가 자기 자신을 가치 있게 여기지 않으면 안 되니까.”
너 자신을 소중히, 네 남은 시간을 소중히. 세르세스는 그때의 충고를 다시 건네며 아낙사의 뺨을 쓰다듬는다. 아무 감촉도 없어야 할 손에서 아지랑이 같은 따뜻함이 느껴졌다. 단순한 환상일까, 아니면…….
날카로운 알람소리가 이제 막 싹트려던 그들 사이의 연결을 끊었다. 돌아가는 차편에 맞춰 파이논에게 설정해 두라고 시켰던 알람이었다. 파이논이 허둥지둥 알람을 끄지만, 풀벌레들의 노랫소리는 이미 끊겨버렸다.
“이만 돌아가자, 파이논.”
아낙사가 낮게 속삭였다.
그날 밤, 아낙사는 침대에 누워 천장으로 손을 뻗었다. 쫙 핀 손가락을 하나씩 접으면 다섯, 넷, 셋… 남은 하루를 어렵지 않게 세어 볼 수 있었다.
‘등가교환이라.’
과거의 그라면 어떻게 반응했을까. 망설임 없이 몸을 내어줬을지도 모르겠다. 하지만 그렇게 쉽게 내놓을 수 있는 걸 대가라고 할 수는 없었다. 파이논. 파이논이 모든 걸 바꿔놓았다.
아낙사가 침대를 짚고 일어섰다. 아직 그에게 설명해야 할 몫이 남았다는 걸 잊지 않았다. 복도를 몇 발짝만 걸으면 바로 옆이 파이논의 침실이었다.
노크도 없이 아낙사가 문손잡이를 돌렸다. 문은 역시나 잠겨 있지 않았다. 열린 문틈으로 동그래진 한 쌍의 파란 눈이 그를 바라보고 있었다. 그 눈빛에 놀라움과 기대가 뒤섞여 있다.
남은 시간을 소중히. 세르세스의 충고가 끊임없이 귀를 울렸다.
“널 느끼고 싶어.”
아낙사는 발돋움하여 파이논의 목덜미를 끌어안았다. 아직 그럴 수 있을 동안 서로의 존재를 확인하고 싶었다.
“네 온기로 날…….”
뒷말은 이을 필요가 없었다. 허리를 받치는 파이논의 손에 힘이 들어갔다. 숨결이 가까워지고 아낙사는 천천히 눈을 감았다.
D-4.
모든 걸 듣고 나서 파이논은 물었다. 후회하지 않냐고.
잠시 생각해 보고 아낙사는 진심을 담아 말했다. 무엇 하나 후회하지 않는다. 그런 소원을 빌지 않았다면, 누나의 소원에 대가가 필요하다는 걸 이해하지 못했다면 지금쯤 한쪽 눈이 없는 건 누나일 수도 있었다.
“착각하기 전에 말해두는데, 후회하지 않는 대상엔 너도 포함이야.”
“…전 역시 아낙사를 보내고 싶지 않아요.”
파이논이 엎드린 채로 팔 사이에 고개를 묻었다. 헝클어진 그 백발을 아낙사가 쓸어 넘겼다. 빨개진 눈가가 드러났다. 귀엽다고 해야 할지, 안쓰럽다고 해야 할지. 정작 울 사람은 밤새 시달리느라 고생한 아낙사인 것 같은데, 조금 억울하다는 생각도 들었다.
커튼이 걷힌 창밖으로 해가 떠오르고 있었다. 또 하나의 소중한 하루를 시작할 시간이었다.
D-3.
“파이논 아직 학교에 있어?”
전화 스피커 너머로 누나가 물었다. 그걸 내가 어떻게 알아, 반사적으로 되물으려다 몇 박자 늦게 아낙사는 깨달았다. 자신은 그 질문에 대답할 수 있을 만한 사람이었다. 수업이 끝나면 파이논은 당연하다는 듯 아낙사의 연구실 문을 노크하곤 했다―늘 누나 핑계를 대면서. 누나 대신 아낙사 교수님이 과로하시지 않게 지켜봐야죠. 누나가 오늘은 일찍 집에 데려오라고 했어요. 저녁에 누나가 맛있는 거 산다는데, 빨리 집에 가요. 그렇게 재촉받다 보면 열에 대여섯 번쯤은 발길이 연구실 밖으로, 버스 정류장으로, 그들의 집 현관으로 향하게 되었다.
하지만 오늘 파이논의 지정석은 주인 없이 비어 있었다.
“아니, 여기 없어.”
“그래? 알았어.” 잠시 주저하다 누나가 조심스레 말을 꺼냈다. “너희 혹시 싸웠니?”
“왜 그렇게 생각해?”
“아니라면 다행인데, 요즘 파이논 기운이 좀 없는 거 같아서.”
“…기운은 넘치는 거 같던데.”
“응?”
쉬엄쉬엄하고, 파이논에게 연락해 보는 거 잊지 말라는 말을 남기며 누나가 전화를 끊었다. 잠시 휴대폰 화면과 눈싸움을 하다 아낙사는 메시지 창을 열었다. 몇 번을 지웠다 썼다 하면서 겨우 완성한 문장은 이랬다.
누나가 걱정하던데, 얼른 돌아와. 나도…….
받은 메시지를 확인하자마자 파이논은 미소지었다.
누나가 걱정하던데, 얼른 돌아와. 나도 걱정하고 있으니까.
전송 버튼을 누르기까지 아낙사가 얼마나 고민했을지를 상상하면 가슴이 저절로 두근거렸다. 최대한 빨리 갈게요. 그렇게 답장하고 파이논은 바로 휴대폰을 주머니에 넣었다. 지금부터 할 일에 휴대폰은 필요가 없었다.
결심했다면 고개를 들자.
“여기 오면 당신을 만날 수 있다고 들었어요.”
정작 파이논의 눈에는 보이지 않지만, 아낙사가 묘사한 대로라면 지금도 신전 어딘가에서 세르세스는 그를 지켜보고 있을 것이다. 그래야만 했다.
“제 소원은…….”
연못에 부는 바람 소리가 거칠어졌다. 파이논은 그것이 어떤 계시이길 간절히 바랐다.
“제 소원은, 아낙사의 소원이 이루어지는 거예요.”
파이논의 바로 코앞에서 세르세스가 고개를 갸웃했다.
“네, 제대로 들으신 게 맞아요. 전 아낙사가 소원을 이루기를 희망합니다. 그런데 아시다시피 아낙사 몫의 소원은 이미 이뤄졌어요. 지금 그 대가까지 치르는 중이죠…….”
잘 아네. 세르세스가 맞장구쳤다.
“그러니 감히 하나 제안하겠습니다. 제 소원을 이루는 아주 간단한 방법이에요. 시간을 되돌려주세요, 아낙사가 아직 소원을 이루기 전으로요.”
네 소원의 대가가 뭘지 생각해 봤어? 어쩌면 네 선생님과는 비교도 할 수 없을 만큼 엄청날 수도 있어. 아니, 분명 그럴 거야. 그래도 좋아?
“아낙사 교수님께서 이렇게 말씀하신 적이 있어요, 그렇게 뭐든 남에게 맞추려 하지 말고 제가 원하는 걸 말해보라고요. 이게 제가 원하는 겁니다. 무슨 일이 있어도, 어떤 대가를 치르더라도 저는 아낙사를──”
0.
어느샌가 아낙사는 미아가 되어 있었다. 방금 전까지 누나 손을 꼭 잡고 있었는데, 하늘에 뜬 신기한 모양 구름을 구경하다가 누나를 놓치고 말았다. 누나가 준 드로마스 인형과 꼭 닮은 모양이었는데. 누나한테도 보여 주고 싶었는데.
“누나…….”
자그맣게 부르는 목소리는 들판에 부는 바람에 삼켜져 버렸다. 괜히 큰 소리로 울면 누나가 곤란할까 봐, 눈물은 안쪽에서만 자꾸 부풀어 올랐다.
정신 없이 걷던 중, 아낙사는 돌부리에 걸려 발을 헛디뎠다.
“앗!”
깜짝 놀란 아낙사를 지나가던 어른이 재빠르게 잡아주었다. 동시에 떨어진 인형을 주워 흙을 털고, 아낙사에게 건네주었다. 두 팔 가득 인형을 안으며 아낙사가 꾸벅 인사한다. 하늘만큼 파란 눈과 구름처럼 하얀 머리카락을 가진 그 어른은, 기특해하며 아낙사의 머리를 쓰다듬었다.
“조심하렴.”
“감사합니다. 저기.”
“왜 그래?”
“혹시 우리 누나 봤어요?”
키 큰 어른이 곤란해하며 머리를 젓는다. 옆에 서 있던 긴 머리 어른에게도 물어봤지만, 마찬가지로 모르겠다고 했다. 아낙사의 얼굴이 흐려지자 그 어른들은 금방 만날 수 있을 거라고 앞다투어 위로했다.
세 사람은 나란히 앉아서 아낙사의 누나가 나타나기만을 기다렸다.
“명심해, 파이논. 네 미래는…….”
“알아요.”
파이논의 미래는 이제 아낙사의 손에 달려있었다. 과거로 돌아오는 것의 대가는 미래를 잃는 것. 아낙사가 소원을 이룰 때까지 파이논의 미래는 존재하지 않는 길이나 마찬가지였다. 그리고 그의 미래는 바로 오늘 결정될 운명이었다.
“여기 소원을 비는 연못이 있는 거 알아?”
파이논이 다정하게 물었다. 어린 아낙사가 ‘파이 삼촌’의 질문에 열정적으로 고개를 끄덕인다. 안 그래도 누나와 연못에 가는 길에 서로 떨어지고 말았다고 한다.
“정말 뭐든 들어줄까요?”
“그럼. 당연하지.” 세르세스가 의기양양하게 말했다. “뭐든 들어줄 수 있어. 원한다면 세상의 모든 비밀도 알려줄 수 있단다. 심지어 네 미래까지 알려줄 수도 있어.”
아이는 드로마스 인형에 턱을 받치고 잠시 생각에 잠겼다. 그리고 어린 아이만이 할 수 있는 진지한 말투로 선언한다.
“그렇다면 전 아무도 모르는 미래로 갈래요. 남들이 알려 주는 미래는 재미없으니까.”
신전의 월계수들이 한꺼번에 흔들리며 기쁨을 속삭였다.
파이논의 미래로 향하는 궤도가, 지금 결정되었다.
fin.
Now there are gold reflections on the water, how old am I and how have the years passed?
H.D. “In Time of Gold.”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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