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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파이낙사] (AU) 1 + 1 + ... 1? 외전 외전 1더보기 ‘사샤, 우리 똑똑한 사샤. 100까지 빨리 세는 건 우리 사샤한테는 별로 어려운 일도 아니지?’ ‘당연하지, 누나. 그걸 말이라고 해?’ ‘그렇지. 그럼, 이번에는 천천히 세는 연습을 해 볼까? 하루에 하나씩 세 보는 거야. 100까지 다 세고 나면 누나가 만나러 올게. 약속이야…….’ 백삼십일. 볼에 묻은 크레용 자국을 닦아내며 아낙사는 조용히 마음속으로 되뇌었다. 오늘은 누나와 헤어진 지 백 서른한 번째 되는 날이었다. 위탁 가정을 전전하게 된 이래, 남매가 각자 다른 집으로 찢어지게 된 건 이번이 처음이었다. 지난달에 다섯 살 생일을 맞은 아낙사는, 나이에 어울리지 않는 기민함과 영특함으로 자신들이 처한 상황을 제법 현실적으로 파악하고 있었다. 이제 우리 집이라고..
[파이낙사] (AU) 1 + 1 + ... 1? ⑤ 完 고요한 자신의 침실에서 아낙사는 눈을 떴다. 새로 바꾼 커튼 사이로 부드러운 아침 햇살이 살짝 새어 들어오고 있었다. 어스름 속에서 서로 다른 호흡이 나른하게 겹쳤다. 이상할 만큼 평화롭고, 또 가정적인 분위기. 아낙사는 아직 이런 분위기에 완벽히 적응하지 못했다. 왼쪽에서는 파이논이 흰 머리카락을 사방에 흩뜨린 채 베개에 얼굴을 묻고 잠들어 있었다. 드러난 팔 하나가 아낙사의 허리를 가로질러 떡하니 놓여 있었다. 반대편에서는 카오스가, 벽돌 담장을 발견한 담쟁이덩굴의 조용한 집념을 띄고, 옆으로 누운 자세로 그에게 달라붙은 채였다. 그나마 카오스라나만이 먼저 일어나 조용히 집안을 돌아다니면서 형제들의 마지막 남은 품위를 지켰다. 아낙사는 말 없이 어둑한 천장을 응시했다. 대학 본부 측의 권고로 ..
[파이낙사] (AU) 1 + 1 + ... 1? ④ 샤워 부스의 뜨거운 김을 헤치고 나온 아낙사는 곧바로 두 가지 사실을 눈치챘다. 하나, 어째서인지 카오스가 개 모습으로 변해 있다는 것. 그리고 또 다른 하나는, 평소 삼 형제로 북적이던 거실이 이상하리만치 활기를 잃었다는 것. 오직 카오스만이 소파에서 가장 좋아하는 자리를 차지하고 누운 채, 가끔 앞발을 움찔거리거나 감은 눈꺼풀을 무의식적으로 깜빡이는 중이었다. 제법 깊이 잠든 모양이라고 아낙사는 추측했다. 갑자기 개로 변한 이유도 그 때문이라면 앞뒤가 맞는다. 삼 형제 중 아낙사가 고심해서 고른 침대를 애용하는 녀석은 괘씸하게도 한 명도 없었다. 이쯤 되니 아낙사도 밤마다 슬그머니 침대 위로 기어 올라오는 녀석들을 꾸짖는 일을 반쯤 포기한 상태였다. 파이논이 그가 아끼는 드로마스 인형에 잔뜩 침..
[파이낙사] 영원의 페이지에서 “선생님, 저 왔어요.” 문이 벌컥 열리는 소리가 파이논의 입장을 알리는 밝은 목소리보다 먼저였다. 남의 방에 들어가기 전에는 노크부터. 아무리 가까운 사이라도 신분을 밝히는 예의를 잊지 말아줬으면 좋겠다. 그렇게 몇 차례나 타박을 들었으면서도 파이논은 좀처럼 이 버릇을 고치지 못했다. 어쩌면 그 책임은 절반쯤 스승인 아낙사에게 있는 걸지도 모른다. “저희가 그렇게 가까운 사이인가요?” 하고 아무것도 모른다는 얼굴로 매번 되묻는 제자를, 제대로 밀어낸 적이 없었으니까. 순진한 척하는 갸웃거림 아래 무슨 의도가 숨어 있는지 뻔히 알면서, 적당히 휘말려 주는 아낙사야말로 이 나쁜 버릇에 무럭무럭 양분을 준 정원사라고 할 수 있었다. 어쨌든 스승의 체면이라는 게 있으니, 아낙사는 오늘도 빠뜨리지 않고 한..
[파이낙사] (AU) 1 + 1 + ... 1? ③ 3화 밑창이 붉은 클래식 검정 드레스업 슈즈. 같은 라인의 크림 브라운 한 켤레. 앞코가 뾰족한 미들힐 부츠. 로퍼 두 켤레. 활동량 많은 날을 위한 고무 밑창의 더비 슈즈. 그 자신의 취향이 듬뿍 담긴 아이템들을 지나, 아낙사의 시선이 신발장 한 칸 위로 올라간다. 얼마 전만 해도 빈 공간이었던 그곳에는 어느덧 늘어난 삼 형제의 신발이 제각각 놓여 있었다. 잔디 묻은 운동화. 흙투성이 조깅화. 기본형 버클 구두도 한 켤레씩 마련해줬지만, 이것만큼은 신은 흔적 없이 새것처럼 반짝거렸다. 그러고 보면 아직 구두를 신을 만한 곳에 데려간 적이 없던가. 조만간 적당한 식당을 알아봐야겠다고 머릿속에 메모 한 줄을 남기며, 아낙사는 조용히 신발장 문을 닫는다. 신발장 위쪽 벽에는 똑같은 열쇠 네 개가 나..
[파이낙사] (AU) 1 + 1 + ... 1? ② 아낙사라고 해서, 귀여운 반려동물과의 행복한 일상을 꿈꿔보지 않은 건 아니었다. 그가 수년째 주임 교수를 맡고 있는 누스페르마타 학파의 단체 공지방은 원래도 자유롭기로 정평이 나 있는 공간이었다. 아낙사가 공지방에 출몰하는 일은 거의 없었고, 그나마도 학생들 쪽에서 교수를 애타게 찾는 목소리에 소환되어 오는 경우가 더 잦았다. 화기애애한 분위기 속에서 학생들은 캠퍼스 근처 맛집 리스트라거나, 최근 학내 이슈 같은 것들을 스스럼없이 공유하면서 놀았다. 이런 자유로운 분위기는 히아킨이 조교로 들어오면서부터 한층 더 강화됐는데, 공지방 관리자 역할에나 충실해지라고 잔소리하면서도 아낙사는 조교가 공유한 「반려동물에게 꼭 입혀볼 의상 리스트 Top 15」 게시글에 좋아요를 남기고, 남몰래 주소를 복사해 뒀다...
[파이낙사] (AU) 1 + 1 + ... 1? ① # 누페마 공지방💗 >● 11 online카스토리스 21:32선생님카스토리스 21:32아낙사 선생님, 계세요?히아킨티아(관리자) 21:33@아낙사고라스 선생님~ 아낙사고라스 21:45무슨 일이지? 히아킨티아(관리자) 21:46드디어 나타나셨네요~히아킨티아(관리자) 21:46들으셨어요? 저희 기숙사 근처 산에 강아지가 돌아다니고 있대요 아낙사고라스 21:47? 히아킨티아(관리자) 21:48저랑 카스둥이 둘이서 보러 가기로 했는데, 선생님도 관심 있으신가 해서요~ 한 손에는 손전등, 한 손에는 장우산을 들고, 아낙사는 빠르게 숲길을 올라가고 있었다. 도대체가, 제자들의 겁 없는 발상에는 아낙사도 혀를 내두를 수밖에 없었다. 보호자도 없이, 이 밤늦은 시간에 단둘이서 들개를 보러 가겠..
[파이낙사] 기연의 달(12월) 어느 기연의 달 둘째 주에 있었던 일이다. 아낙사고라스가 거액의 복권에 당첨되었다. 그야말로 눈이 휘둥그레질 만한 액수의 복권에. 이 소식을 듣자마자 급성 복통으로 앓아누운 사람이 얼마나 많았는지 모른다. 어째서 그 신성 모독자에게 이런 행운이 찾아오는 거냐, 신들의 지고한 뜻은 정말 종잡을 수 없다고 탄식하는 사람부터, 앞으로는 자그레우스 대신 세르세스에게 공물을 바쳐야겠다고 진지하게 고민하는 사람까지. 운이 더 좋아진다는 약간의 기대만 있으면 당장 다른 티탄의 신전을 두드린다는 점에서, 후자야말로 진짜배기 자그레우스 신자였다. 물론 나무 정원의 현인씩이나 된 자가 세속적인 가치를 탐한다는 질투 섞인 비난도 빠져서는 아쉬운 레퍼토리였다. 이 비난은 주로 은퇴한 학자들의 입에서 나왔다. 한마디씩 ..